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25(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1. 06:45

봉천 할매25(작성자; 손진길)

 

손수석이 1942년 9월 조선을 방문한 김에 부산에 살고 있는 안성기 교장 댁에 잠시 머물면서 해박한 노인 안교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그 정도만이 아니다. 손수석이 지금 일본제국이 중국대륙에서 그리고 태평양에서 진행하고 있는 구미 열강과의 전쟁상황에 대하여 안성기 교장에게 질문을 하자 그가 실로 놀라운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그때 손수석이 듣고서 그의 머리속에 체계적으로 입력하고 있는 전쟁의 불가피성에 관한 내용을 먼저 적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로, 일본제국이 만주와 중국대륙으로 진출하여 군사력으로 계속 식민지를 확장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과도하게 외국 차관을 들여와서 단기간에 산업근대화를 이룬 부작용이라는 것이다. 명치원로들이 적극 외자를 유치하여 공장을 짓고 최신식 생산설비를 갖추어 대량생산을 한 것은 좋은데 문제는 그 상품을 팔아서 자본을 회수하고 이익을 남기며 차관을 갚을 수 있는 소비시장이 없다는 것이다.

산업근대화를 먼저 이룬 서양의 열강들이 일찍 해외로 진출하여 세계의 자원과 소비시장을 선점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후발 산업국인 일본은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해야만 한다. 그 방법은 서양의 세력과 전쟁을 불사하는 무서운 경쟁을 하는 것이다. 먼저 가까운 대륙으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개척해야 한다. 그 대상이 인접한 조선반도이고 그 다음이 만주인 것이다. 그 마지막은 인구가 많고 넓은 중국대륙이다.

따라서 일본제국은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전쟁을 거쳐 비로소 1910년에 조선반도를 완전히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청국이 망하였기에 중국대륙이 혼란한 틈을 타서 만주를 1931년에 점령하고 이듬해에 괴뢰정부 만주국을 세운 것이다;

둘째로, 일본이 조선과 만주를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고 보니까 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상품을 팔 수 있는 시장을 확장하고 식민지의 자원을 실어오기 위해서는 철도와 도로 그리고 항만시설이 필요한데 그것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더구나 적은 수의 일본군으로 식민지의 수많은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정보전달이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하므로 통신시설이 필요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선반도에서 군수물자를 생산하여 만주의 일본군에게 보내고 나아가서 만주에서 생산한 군수품을 중국대륙으로 진출한 일본군에게 보내기 위해서는 전장이 가까운 식민지에서 병참공장을 가동해야만 한다. 따라서 병참공장의 가동을 위하여 전력과 원자재의 공급이 절실하다. 그와 같은 이유에서 일제가 식민지에서 인프라의 구축과 공장가동의 기반시설을 확충하다가 보니까 자본이 엄청 필요하고 또 건설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다.

셋째로, 일본제국은 조선반도와 만주를 식민지로 삼았지만 당장은 투자자본이 계속 필요하다. 그러므로 본전을 찾기 위하여 식민지 백성들에 대하여 무자비한 착취를 감행하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에 인프라를 구축하고 병참공장을 세우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따라서 일본은 1910년에 조선을 병합한 후 21년이 지나서 1931년에 되자 비로소 만주를 침략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32년에 만주국을 세우고 5년이 지나서야 1937년에 중국대륙을 침략하게 된다. 그 이후에도 일본은 중국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관동군에게 군수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계속 만주의 철도망을 확충하고 있다. 그 결과 무려 5,000km에 달하는 철도망을 만주철도회사를 통하여 건설하여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 일본제국이 식민지인 조선과 만주에서 얻고 있는 이익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그곳에 투자한 자본이 엄청나다. 그러므로 조선과 만주만으로는 일본제국의 경제와 산업이 원활하게 돌아가지를 않는다. 그에 따라 중국대륙의 대도시를 군사력으로 점령하여 일제의 식민지로 만들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중국대륙침략의 시작이 1937년 7월이라는 안성기 교장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중국대륙의 대도시를 집어삼키겠다고 만주에서 남하하고 있는 일본제국 군대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일본제국과 중국과의 전쟁에 대하여 안교장이 다음과 같이 분석을 하고 있다;

첫째로, 일본의 관동군이 1937년 7월에 남침을 시작하였는데 초기에는 전투가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그해 11 월에 상해를 집어 삼키고 12월에는 수도인 남경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장기전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내륙의 중경으로 후퇴한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가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하고 있으며 미국을 위시한 서양의 열강들이 서서히 일본군대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일본제국이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북쪽의 쏘련과는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버마 등 남방의 보급로에 대해서는 공격을 감행했다.  먼저 일제는 1941년 4월에 쏘련과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그 조약으로 쏘련은 일본의 군대가 북진하는 것을 피하면서 유럽전쟁에 전념할 수가 있게 되고 일제는 중국의 장개석 군대가 쏘련 스탈린의 지원을 얻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일본의 군대가 영국의 식민지인 버마와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 북부를 공략하여 중국으로 들어가는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한다. 그러나 워낙 넓은 지역이라 완전히 차단하지를 못한다. 그 때문에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는 그 보급로를 통한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일제의 침략에 계속 맞서게 된다.

게다가 모택동의 공산당 게릴라 부대와 중국백성들의 저항이 농촌지역에서 계속 일본군대를 괴롭히고 있다. 그러자  일본 군대는 이미 점령한 지역의 철도망을 보호하는 한편 대도시를 계속 장악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셋째로, 1939년에 독일의 나치와 이태리의 파쇼가 유럽전쟁을 일으키자 일제는 얼른 그들과 동맹을 맺는다. 일제가 전투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그들의 지원을 받은 것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유럽의 열강들을 유럽전쟁에 묶어 두는 효과만은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전쟁으로 묶어 둘 수 없는 강대국이 하나 있다. 그것이 아메리카의 미국이다.

그런데 그 미국이 일본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를 대신하여 미국이 동남아를 통하여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를 지원하는 한편 인도양과 태평양을 지나서 일본으로 가고 있는 모든 자원과 석유를 차단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일본제국은 필요한 석유의 8할을 얻지 못하여 장기전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된다.

어찌할 것인가? 그 타개책은 하나뿐이다. 기습적으로 미국의 해군을 공격하여 제해권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동남아를 재빨리 점령하여 그 자원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군부가 선택한 전략이 선전포고도 없이 1941년 12월 7일에 미국의 태평양사령부가 있는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고 동시에 구미열강이 차지하고 있는 인도차이나와 태평양의 전략기지들을 기습한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 작전이 멋지게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러하지가 못하다. 그 이유가 두가지이다;

(1)  첫째,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에서 미국의 함정과 전투기를 많이 파괴하였지만 미국의 주전력인 항공모함이 바다로 나가 있어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고 또한 미국의 잠수함이 그대로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둘째, 그 때문에 일본이 미국의 전략기지인 미드웨이 섬을 대대적으로 공략하여 점령하려고 하였으나 무참하게 패배를 당하고 만다. 그것이 1942년 6월의 일이다. 그때부터 태평양에서 일본의 해군은 미국과 장기전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일본제국이 결코 원하지 아니하는 전투의 양상인 것이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안성기 교장은 미국이 결코 서두르지 아니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자원이 많은 호주와 뉴질랜드를 견고하게 지키면서 서서히 일본군대에서 기름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제국이 이미 확보한 대만과 사할린 그리고 동남아지역에서 자원을 가져다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계속 전쟁을 수행하기에 부족하기 이를 데가 없다;

결국 일본제국은 항복할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 미국은 더 많은 함정과 전투기를 만들어서 일본제국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한 시기가 1943년과 1944년이 될 것으로 안성기 교장이 설명하고 있다. 그와 같은 안성기 교장의 가르침을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손수석이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그렇게 흡수를 하고 있다. 그때가 바로 1942년 가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