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86(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27. 00:46

서배 할배86(작성자; 손진길)

 

손예진 여사가 포함이 됨으로써 방문단은 이제 9명이 되었다. 그들은 경성 남대문정차장으로 되돌아가서 원산까지 가는 ‘경원선’ 열차를 탄다. 1914년에 경성에서 원산까지 가는 경원선이 개통이 되어 지금까지 운행이 되고 있지만 그곳에서 함경도 회령까지 가는 함경선은 아직 개통이 되지를 못하고 있다. 참고로 그것은 1928년이 되어야 완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행은 원산역에 내려서 버스를 이용하여 그 먼 함경도 회령까지 가야만 한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보통 고역이 아니다. 물론 요금도 기차에 비하면 엄청 비싸다. 그렇지만 그나마 버스가 운행이 되고 있는 것도 고마운 노릇이다. 물론 그것은 그들 방문단을 위하여 운행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함경도의 지하자원을 개발하기 위하여 일본의 기술자들이 오가고 있기 때문에 버스가 운행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회령에서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에 있는 연길이나 그 남쪽 용정까지 가는 버스가 바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과 중국이 완전히 다른 나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래서 방문단 일행은 회령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여 많은 돈을 주고 작은 승합차를 한대 빌린다. 그것을 일본말로는 ‘노리아이’라고 부르고 있다;

경성 남대문정차장에서 오후에 열차를 탔는데 함경도 회령에 도착을 하고 보니 벌써 다음날 정오이다. 서배 할배가 용정에 살고 있는 오경덕 선생의 주소를 그 승합차 운전수에게 주었더니 금방 그 쪽지의 한문을 읽고서 알겠다고 한다. 그리고 두만강의 철교를 건너서 싱싱 신나게 신작로를 달린다.

북간도 용정 명동마을은 생각보다 깨끗한 한인촌이다. 동네 중앙에는 큰 교회당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그 옆에 소학교가 있다. 그곳 한인촌에 들어서더니 운전수가 동네주민들에게 그 주소의 집을 묻는다. 별로 좁지도 아니한 골목이라 그 승합차는 오경덕 선생이 살고 있는 집 앞까지 가서 멈춘다.

방문단 9명이 ‘노리아이’를 타고 오는 것을 보고서 동네의 꼬마들이 뒤를 따라온다. 그것은 별로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중의 한 아이가 오경덕 선생의 집으로 뛰어 들어간다. 얼마 되지 아니하여 오경덕 선생이 사랑방에서 마당으로 나온다. 그 모습을 보고서 서배 할배와 김춘엽 선비가 차에서 내려서 오경덕 선생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더니 그는 간단하게 예를 한 후 바로 승합차 운전수에게로 간다.

그 모습을 보고서 얼른 차안에 있던 장인식 교장이 차비를 꺼내서 운전수에게 준다. 그리고 운전수에게 잠시 짐을 내릴 동안 기다려 달라고 당부한다. 운전수가 요구한 돈보다 장교장이 많이 주었는지 그 조선인 운전수는 허리를 굽혀서 연신 절을 하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다.

일행은 먼저 차에 실려 있는 짐부터 마당으로 옮긴다. 그러자 차가 출발을 한다. 그 사이에 안방에 있던 오경덕 선생의 부인 김해련이 마당으로 나와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다. 그러자 4명의 남자들은 오경덕 선생을 둘러싸고 5명의 부인들은 김해련 여사를 둘러싼다. 서로가 얼싸 안으면서 감격에 겨워한다. 그 상봉의 정이 깊다. 특히 김해련은 사촌 오라비 김춘엽 내외가 방문하니 더욱 기뻐한다.

절절한 인사가 일단 끝나자 오경덕 선생은 4명의 남자 손님을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사랑방으로 안내한다. 그리고 김해련 여사는 5명의 부인들을 안방으로 인도한다. 모두들 자신들의 짐을 찾아서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안방마님 김해련이 그 사이에 부엌으로 들어가서 막걸리와 안주를 차린 술상을 보아 사랑방으로 들여놓는다. 그리고 다과상을 들고서 안방으로 들어간다.

그날 김해련 여사는 뜨끈한 국밥을 준비한다. 5월달 북간도의 날씨는 아직 쌀쌀하다. 그러므로 뜨거운 국밥을 대접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녁시간이 한참 멀었지만 먼 길을 오신 손님들이라 시장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그녀는 11명 모두가 사랑방에서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다. 

그러고 보니 오경덕 선생이 거처를 하고 있는 사랑방이 상당히 넓다. 어째서 그는 그렇게 규모가 큰 사랑방을 사용하고 있는가? 식사를 하면서 서배 할배 손상훈이 두가지를 오경덕 선생에게 묻는다; “여보게 오선생, 어째서 자네 아들들이 보이지를 않는가? 그리고 사랑방은 어찌 이렇게도 넓은가?”.

오경덕 선생이 식사를 하다 말고 빙그레 웃으면서 답한다; “아따, 형님도, 성격이 급하십니다. 안 그래도 식사를 하고서 천천히 말씀을 드리려고 했지요. 저희 노인들만 빼고 모든 식구들이 예배당에 갔어요. 거기서 예배도 보고 식사도 한답니다. 그리고 저는 사랑방을 크게 지었지요.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과 회의를 할 일이 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김춘엽이 말한다; “아, 그러면 오선생 아들과 며느리들이 기독교인들인 모양이군요. 그리고 회의는 무슨 회의를 하는 것이지요?...”. 오선생이 답한다; “천천히 식사를 마치신 다음에 제가 상세하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선생의 부인 김해련 여사도 말을 보탠다;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세요. 그리고 천천히 밤새도록 말씀을 나누도록 하시지요”.

식사가 모두 끝나자 그때서야 오경덕 선생이 말을 시작한다; “이곳 명동 한인촌은 1899년에 회령에 사시던 김약연 선생 등 4분의 선비들이 식솔들을 이끌고 항일운동을 하기 위하여 개척한 마을입니다. 이제는 김약연 선생이 교회를 세우고 장로가 되어서 교회를 중심으로 애족운동과 독립운동에 힘쓰고 있지요. 그리고 마을에서 학교도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자녀들이 그 일에 힘써 참여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김약연 선생의 사진이 다음과 같다;

이어서 오경덕 선생이 말한다; “여기는 두만강 북쪽에 있으므로 ‘북간도’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연길과 용정이 그 중심이 되고 있지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유명한 이상설 선생이 1906년 용정에서 이동녕 선생과 함께 사재를 털어서 70평의 집을 사서  가장 먼저 한인학교를 세웠는데 그것이 ‘서전서숙’입니다”;

 오경덕 선생이 이어서 말한다; “그런데 헤이그 밀사사건을 빌미로 일제가 그 학교를 그 다음해에 폐교시키자 1908년에 김약연 선생이 명동마을에 그 정신을 이어 받아 ‘명동학교’를 세운 것이지요”;

잠시 숨을 돌린 오경덕 선생이 이어서 말한다; “한편, 압록강 이북지역은 ‘서간도’라고 부릅니다. 그곳에 넓은 땅을 사서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무장독립투쟁의 기지를 만들고자 계획한 단체가 1907년 4월에 안창호와 양기탁이 발족한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입니다. 그 밀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1910년에 서간도로 파송이 된 이동휘, 이동녕, 이회영 등이 봉천 유하현 삼원보를 적지로 선정합니다”;

오경덕 선생이 이어서 설명을 한다; “1910년 12월에 한양의 명문가출신인 이회영은 5형제와 더불어 집안의 재산을 정리하여 삼원보의 땅을 매입하여 이동녕, 이동휘와 함께 한인촌을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1911년에 ‘신흥강습소’를 세웁니다. 그것이 1913년에는 신흥중학교로, 1919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게 되지요. 안타깝게도 1920년에는 일제에 의하여 폐교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배출이 된 인재들이 훗날 독립군의 지휘관들이 되지요”;

오경덕 선생이 이제는 러시아에 속하고 있는 연해주에서의 한인촌과 독립운동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그가 다음과 같이 말문을 연다; “흔히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있는 ‘고안촌’이 조선사람들이 가장 먼저 개척한 마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의 역사를 생각하면 맞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인 20가구가 흑룡강 고안촌에 정착을 한 것이 1888년인데 그보다 훨씬 먼저 1863년에 벌써 13명의 조선인 소작농이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로 들어가 한인촌을 개척하기 때문이지요”;

그 말을 듣자 안성기 교장이 질문을 한다; “어째서 북간도보다 러시아 연해주로 조선인들이 먼저 이주를 한 것이지요?”. 오경덕 선생이 답한다; “그것은 청국이 1911년에 신해혁명으로 왕조가 망할 때까지 간도와 만주지역을 자신들의 조상들의 땅이라고 하여 조선인들의 출입을 강하게 통제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종시대에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박해를 당하던 조선인들이 북간도가 아니라 러시아의 극동 그 먼 변방인 연해주로 살길을 찾아 떠난 것이지요. 그리고 1911년에 청국이 붕괴가 되자 그때부터 조선인들이 안심을 하고 간도지방으로 이주를 한 것입니다”.

9명의 방문단이 ‘아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자 오경덕 선생이 말을 잇는다;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최재형과 문창범이 독립운동가로 유명합니다. 최재형은 1860년생이며 문창범보다 10살이 많습니다. 그는 1908년부터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했는데 이상설, 안중근 등과 친합니다. 그래서 1909년에 안중근이 거사를 계획할 때 그에게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까지 선물하게 됩니다”.

좌중의 인사들이 ‘아’하고 놀라자 오경덕 선생이 설명을 계속한다; “최재형은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1911년에 이상설과 함께 ‘권업회’ 활동을 하다가 1914년에는 이상설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하는 망명정부성격의 ‘대한광복군정부’를 만듭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러시아가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게 되자 그 단체는 해산이 되고 말지요. 한편 문창범은 1919년 5월에 블라디보스톡에 ‘한인군관학교’를 세웠는데 혹자는 그를 연해주 조선인들의 대통령으로 부르기도 하지요”;

  그날 방문단 9명이 오경덕 선생으로부터 들은 정보가 너무 많다. 쉽게 머리 속에 모두 정리가 되지 아니할 정도이다. 그래서 한 이틀 그 집에서 쉬면서 다음날은 한인촌 명동마을을 둘러보고 아울러 용정 시내와 이웃 도시 연길도 방문한다. 그렇게 북간도 오경덕 선생의 집에서 방문단은 이틀을 보내게 된다.

그 동안에 오경덕 선생의 장남 오동휘 부부와 차남 오동수 부부를 만나게 된다. 그들 두 부부는 북간도 조선인들의 대통령이라고 불리고 있는 김약연 장로를 도와서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신실한 기독교인들이다. 그렇게 조국을 떠나 북간도에서 전혀 다른 삶을 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오경덕 선생의 자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