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16(작성자; 손진길)
춘삼월이면 남쪽에서부터 꽃이 피어 북상을 한다. 경주 월성지역에도 4월이 되면 벚꽃이 만개하기를 시작한다. 그러면 청춘남녀들이 경주 인근의 고적지에서 만나 꽃구경을 하면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 조선의 유교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고종시대라고 하지만 그러한 청춘남녀의 만남은 역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경주 안압지와 반월성 그리고 계림숲과 첨성대는 서로 멀지 아니한 위치에 사이 좋게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봄이 되면 많은 상춘객들과 관광객들이 경주를 방문하여 그 네 군데의 고적지를 차례로 돌면서 꽃구경을 하고 있다. 그 무리 가운데 금년 4월에는 손상훈과 이채령이 들어 있다.
4월 17일은 경주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다. 그날 지주 손성규는 아들 상훈이를 데리고 웃시장을 방문했다. 포장마차에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훈장 이덕화가 자신의 딸 채령이를 데리고 그곳으로 왔다. 진작에 두 사람이 자신들의 아들과 딸을 경주 읍내에서 실컷 만나게 해주려고 약속을 하고서 그렇게 조치한 것이다.
부친의 배려로 손상훈이와 이채령은 도보로 경주 안압지까지 걸어가서 꽃구경을 하고 있다. 그리고 큰 연못 가까이 지어져 있는 전각 임해전 위에 올라 함께 수면의 연꽃을 내려다본다. 그 옛날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이 그 전각에서 밤새도록 연회를 즐겼을 것이다. 그 당시에도 청춘남녀들은 그곳에서 사랑의 밀어를 나누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 주인공이 손상훈 자신과 이채령이 된 것만 같아서 기분이 한껏 부풀어 오른다. 그러한 봄의 기운에 들떴는지 갑자기 손상훈이 이채령의 목에 뜨거운 입김을 내쉬며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채령아, 사랑해…”. 이채령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화닥닥 놀란다. 평소 목석과 같은 손상훈에게 이러한 달콤한 면이 있는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화답한다; “저도 그래요, 상훈 오빠…”.
안압지를 빙 돌아 남서쪽으로 올라가면 반월성이다. 분지로 되어 있는 산성터가 꽤 넓다. 그 옛날 토성이었던 그 언덕에 앉아서 솔바람을 맞으며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천년 전의 신라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 언덕에 앉아서 그날 손상훈과 이채령이는 자신들의 사랑이 백년이 아니라 천년까지 계속이 되게 해달라고 두 손을 마주 잡고 기원을 했다.
그날 푸르른 높은 하늘에서는 찬란한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그리고 바람에 일렁이는 잔가지들은 서로 몸을 부딪히면서 마치 선녀의 옷자락처럼 부드러운 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한 주위의 황홀함과 신비함에 취하여 손상훈과 이채령은 천년의 고도 경주에서 자신들도 백년해로를 하자고 굳게 약속을 한 것이다.
내남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들은 반월성의 서쪽에 있는 계림숲과 첨성대를 찾았다. 경주 김씨의 시조가 닭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을 가진 숲이 계림이다. 그리고 신라의 제27대 왕인 선덕여왕의 치마모양을 본 따서 365개의 돌로 쌓았다는 첨성대가 계림숲의 인근 북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손상훈과 이채령은 여러 해 전에 어른들과 함께 계림숲과 첨성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둘이서만 그곳을 찾고 있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 그리고 그 숲과 돌로 된 그 건축물이 얼마나 멋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제 짝을 찾아 함께 천년의 고도 경주를 방문하는 것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결혼 전에 좋은 추억을 만들며 참으로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는 청춘남녀가 그날은 손상훈과 이채령이다.
그들은 첨성대까지 구경을 하고 나서 내남으로 가고자 남쪽으로 난 길을 들어서고 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아니하여 손상훈은 앞서 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재종 누나인 손예진과 그 남편인 최사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 불러본다; “예진이 누나 아니세요? 저 상훈이 입니다”. 그 소리에 여자가 즉시 뒤돌아 본다. 맞다. 2살 위인 예쁜 누나 손예진이다.
예진 누나 옆에 함께 길을 걷고 있던 젊은 선비도 뒤를 돌아 보면서 반색을 한다; “허, 종처남 상훈이 아닌가? 오래간만이야. 그런데 그 옆의 동행인 처녀는 누구신가?”. 역시 지각이 뛰어난 자형 최사권이다. 그는 내남 이조와 덕천에서 촉망을 받고 있는 선비이며 천석꾼인 경주 최씨의 아들이다. 월성 최씨인 조천 최부자가 경주 교리로 옮겨 가서 만석꾼이 되고 있는데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남에 살고 있는 경주 최씨도 대단하다. 최사권의 집안이 천석꾼이기 때문이다.
최사권은 척 한번 보고서 재종 처남인 손상훈이 묘령의 처녀와 나들이를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있다. 그래서 짓궂게 누구냐고 묻는 것이다. 그런데 평소 손상훈은 자신보다 15살이나 위인 자형 최사권을 신뢰하고 있다. 따라서 정직하게 답변을 한다; “네, 자형, 저의 훈장선생님의 영애입니다. 오늘 경주 오일장에서 만나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의 설명만 드려도 전후사정을 꿰뚫을 것만 같은 젊은 선비 최사권이다. 그는 더 이상 묻지를 않는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한다; “종처남 바쁘더라도 더러 덕천에 있는 내집으로 찾아오게. 자네 누나도 그대를 보고 싶어 한다네. 그리고 내 바로 밑의 처남인 손형이와 자네는 동갑내기가 아닌가? 모두 만나서 한잔 하도록 하세”.
손상훈은 사람을 사귀기를 좋아하는 종매형 최사권의 초대가 고맙다. 따라서 시간을 내어 덕천을 방문하고 또 구왕골로 재종간인 손형을 찾아가 보고자 한다. 작은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때에 그 손자인 손형이를 여러 번 만났다. 그렇지만 손상훈은 손형과 동갑내기이므로 또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덕천에서 천석꾼 살림을 살고 있는 예진이 누나를 만나서 한가지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 있다.
어떻게 그 옛날에 천석꾼 집안의 똑똑한 아들인 최사권을 만나서 사귀게 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예진이 누나보다 13살이나 많은 최사권이 어떻게 내남에서 미인으로 소문이 난 예진이 누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도 역시 듣고 싶다. 자신이 이채령이를 이끌면서 사랑을 키워가는데 있어서 그들의 그 유명한 연예담이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 양삼마을까지 이채령이를 바래다 주고 집에 돌아온 손상훈의 얼굴이 얼마나 밝은지 모른다. 그 모습을 보고서 모친 이숙임이 한말씀을 하신다; “상훈아, 이채령이가 그렇게 좋더냐? 아주 입이 귀에 와서 걸리고 있구나!”. 평소 숫기가 없는 손상훈이지만 오늘은 한마디를 한다; “네, 이제사 세상사는 재미를 알 것만 같습니다. 모두 부모님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이숙임은 아들에게 한마디 더 하려다가 그만둔다. 에미보다 네 색시가 그렇게 더 좋더냐? 하는 말이 나올까봐 애써 자제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채령이는 그날 부친 이덕화의 기분이 역시 매우 좋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채령이 자신이야 오늘 좋아하는 상훈이 오빠와 경주 고적지를 돌면서 사랑의 속삭임을 하였으니 기분이 너무나 좋지만 아버지는 어쩐 일이실까? 딸이 사위감과 함께 바깥 나들이를 하고 왔다고 하여 그렇게 기분이 좋으신 것일까? 이채령이는 그것이 아니라 또다른 무엇인가가 부친에게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며칠 전에 경주 오일장을 갔다가 황혼에 돌아오신 부친 이덕화가 딸을 시집 보내고 나면 자신도 새 장가를 들어서 한번 재미나게 살아볼 것이니 이채령에게 아무 걱정을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말씀이 그냥 딸 채령이를 위로하고자 하신 허세가 아닌 것만 같다. 여자의 직감은 과연 무서운 것이다.
이채령이가 눈치를 채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그날 선비 이덕화는 죽마고우 김종민의 돼지국밥 집을 방문했다. 여느 때와 같이 점심시간이므로 김종민이 부부와 그 모친 그리고 김옥심이까지 모두가 바쁘다. 오늘은 경주 오일장날이니 웃시장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돼지국밥 골목이 붐비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종민이 부부와 그 가족들이 선비 이덕화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지나고 손님들이 조금 뜸해지자 이덕화를 둘러싸고서 공짜 국밥과 막걸리를 계속 권한다. 선비 이덕화는 친구도 좋고 그 모친도 좋지만 자꾸만 친구의 여동생인 과부 김옥심에게 눈길이 간다.
그 모습을 보고서 눈치가 빠른 김종민이 너스레를 떤다; “허허,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알고 홀아비 신세는 과부가 안다고 하는데 괜히 우리가 두사람을 잡아 두고 술만 먹이고 있구만. 여보게 친구, 오늘은 내가 여동생 옥심이를 하루 빌려줄 터이니 경주 고적지에 꽃구경이나 다녀오게. 사람이 그렇게 청승스럽게 홀아비로 10년이나 살고 있는 것이 결코 자랑이 아니네”.
이덕화는 자신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는 친구 김종민이 고맙다. 그래서 한마디를 한다; “불알친구가 과연 좋기는 좋구만. 그러면 오늘은 내가 염치불구하고 자네 여동생을 하루 빌리도록 하겠네. 저녁에는 반드시 돌려 보내 줄 터이니 다른 걱정은 하지를 말게. 모친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농처럼 말을 해도 선비는 역시 선비다. 예의 바르게 옥심이의 모친에게 양해를 구하고 있는 이덕화이다.
그날 선비 이덕화는 김옥심이와 함께 경주 근교 나들이를 했다. 웃시장에서부터 남쪽 불국사로 가는 길을 그냥 둘이서 걸었다. 그 길로 쭉 올라가면 불국사로 가기 전에 괘릉이 나오고 그들의 고향인 서배 마을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곳까지 갈 이유는 없다. 그저 봄바람을 맞으며 함께 고향으로 가는 길을 걷고 싶을 뿐이다.
이덕화는 어린 시절 김종민의 꼬마 여동생 김옥심을 떠올리면서 지금은 37세가 되어 있는 그녀를 쳐다본다. 세월이 그 꼬마를 어느덧 중년부인으로 만들고 있다. 그녀처럼 그 옛날 12살 짜리 소년이던 자신도 이제 42살의 중년이 되어 있다. 그것도 세월이 지나고 보니 두 사람은 팔자가 기구하여 한사람은 아내가 죽어 홀아비가 되었고 또 한사람은 남편이 벌써 죽어서 청상 과부가 되어 있다. 비슷한 팔자를 타고난 것만 같아서 서로가 거울을 마주 보는 것과 같다. 차이가 있다면 이덕화는 시집을 보낼 딸이라도 있지만 김옥심이는 아예 자녀가 없다.
생각해보면, 김옥심이가 나이가 더 들면 더 외로울 것이다. 자녀가 없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그 점에 생각이 미치자 그날 단단히 마음을 먹고서 이덕화가 김옥심에게 기어코 한마디를 한다; “옥심이 너나 나나 참으로 팔자가 기구하구나. 두사람이 동병상린이니 함께 위로하면서 남은 세월을 살아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는 금년내로 딸아이를 시집을 보낼 생각이다. 그러니 그때 살림을 합쳤으면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하냐?”.
김옥심은 막상 그녀가 원하던 말을 듣게 되니 갑자기 할말이 없다. 그 말을 여러 달 후에나 듣게 되지 않겠는가 기대를 했지만 오빠의 친구인 이덕화가 참으로 솔직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렇게 직선적이고 하나밖에 모르는 양반이니까 지금까지 10년 동안 딸아이 하나를 키우면서 독신으로 살아온 것만 같다. 생각에 변함이 없는 선비 이덕화와 한번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날 답을 했다; “오빠가 좋다면 저도 좋아요”. 그 오빠가 바로 이덕화 자신임을 알고서 그는 불국사 가는 길에서 그녀를 품 안에 안았다. 그러하니 그날 저녁에 집에 돌아온 훈장 이덕화가 딸아이 보기에도 싱글벙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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