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13(작성자; 손진길)
그날 집에 돌아온 가주 손성규는 아내인 월성 이씨 이숙임에게 아들 손상훈이 벌써 마음에 두고 있는 처녀가 있다는 사실을 상세하게 말해 준다. 훈장 이덕화의 집에서 발생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듣게 된 손상훈의 모친인 이숙임은 그 얼굴 빛이 밝아지고 있다.
이숙임은 외아들인 손상훈이 그동안 24살이나 되도록 먼저 결혼이야기를 꺼내지 아니하고 있기에 은근히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혹시 장가를 갈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 없는 기우에 불과하다. 훈장 이덕화의 딸이 마음에 들어서 그 집을 자주 출입하고 있다고 하니 한시름 덜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또 다른 걱정이 이숙임의 마음에 찾아오고 있다. 훈장의 딸인 이채령이 어떠한 성품의 처녀인가 하는 것이다. 혹시 천석꾼 부잣집에 시집을 와서 한번 호강을 실컷 누려 보겠다고 생각하여 숫기가 없는 손상훈에게 접근을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하면 정말 큰 일이다. 천석꾼 살림이라고 하더라도 거덜나기가 쉬운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이 직접 이채령이를 한번 만나서 선을 보아야 하겠다고 결심한다. 언제가 좋을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그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 온다. 내일 남편 손성규가 아침 일찍 훈장 이덕화와 함께 경주 오일장을 가면서 사정리에 있는 석수공장을 방문한다고 한다. 새 묘소에 상석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양삼마을에 찾아가서 이채령이 어떠한 성격의 인물인지 한번 염탐을 하고 가능하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애써 잠을 청하고 있는 이숙임이다.
그녀는 남편 손성규보다 4살 연하이다. 옛날부터 어른들이 남편이 4살 많고 아내가 4살 어리면 궁합이 좋아서 한평생 잘 산다고 말하고 있다. 이숙임은 그 말이 맞다고 여기고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딸 둘 아들 하나를 낳아 잘 키웠기 때문이다. 손상훈의 누나 둘은 진작에 시집을 보냈다. 이제 상훈이만 장가를 보내면 되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 손성규가 50살이 될 때까지 거랑가의 땅을 개간할 수 있도록 적극 내조를 했다. 살림을 알뜰하게 살았으며 딸 둘을 시집 보내는 일을 도맡아서 했다. 그러므로 가주인 손성규가 천석꾼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살림솜씨가 알뜰한 아내 월성 이씨 이숙임의 공이 큰 것이다.
날이 새자 이숙임은 남편 손성규를 위하여 아침식사준비를 서두른다. 손성규가 경주 오일장에 가는 도중에 석물공장을 들러 상석부터 알아보고 주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삼마을에 살고 있는 훈장 이덕화도 그 일을 위하여 동행을 한다고 하니 아침 일찍 찾아올 것이다.
그녀의 생각이 적중을 했다. 남편 손성규가 아침식사를 끝내자 마자 훈장 이덕화가 찾아온 것이다. 그 두사람이 발걸음도 가볍게 동네를 벗어나는 것을 보고서 이숙임은 자신도 양삼마을을 방문하고자 서두르고 있다. 아들 손상훈이 이채령을 만나러 가기 전에 먼저 그녀를 한번 만나볼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채령은 오늘 따라 부친이 왜 그렇게 일찍 일어나서 길 떠날 준비를 서두르고 계시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그녀의 마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제 손상훈의 부친이 돌연 찾아와서 벌어진 사태는 다시 생각을 해도 아찔하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말하듯이 그 소란 끝에 이제는 좋은 결말이 있을 것만 같아서 부녀가 모두 마음이 바쁜 것이다.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이채령이 정성껏 부친의 아침상을 차려드렸다. 그리고 손상훈이 이채령 자신을 걱정하여 찾아올지도 몰라서 그녀는 몸단장에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런데 오전에 뜻밖에도 손상훈이 대신에 그 모친 이숙임이 찾아온 것이다.
천석꾼지기의 아내인 이숙임은 아침에 양삼마을에 들러 참으로 오래간만에 서당과 그 훈장이 살고 있는 집을 둘러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소작을 하고 있는 일가를 찾아서 이채령에 관하여 요모조모 물어보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동네에 소문이라도 먼저 나게 되면 될 일도 안될 것만 같아서 조심스럽다.
따라서 그녀는 훈장 집에 혼자 남아 있을 이채령에게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을 하고서 조용히 그 집을 들어서고 있다. 인기척 소리를 느꼈는지 이채령이 바깥을 내다본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있다. 처음보는 부인이지만 그 옷차림을 보아서 지주 집 마님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채령은 동네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손상훈의 모친을 자신의 방으로 모신 다음에 절부터 단정하게 드린다. 그녀는 진심으로 손상훈의 아내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처녀이다. 그러한 그녀가 처음으로 손상훈의 모친에게 절을 올리고 있는 것이니 그 마음이 속으로는 많이 떨리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는 절하는 자세가 추호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렇게 속으로 단단한 여자가 이채령인 것이다.
이채령의 절을 받으면서 이숙임은 그 용모도 깨끗하고 맵씨도 나무랄 데가 없다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의 성격이다. 과연 자신의 아들 손상훈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시집을 올 생각이 있는지 아니면 부잣집 도령이므로 탐을 내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을 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숙임의 첫마디가 날카롭다; “내 아들 손상훈이와 알고 지내는 처자라고 하여 염치 없이 내가 어른이라고 하여 절을 받고 있습니다. 편히 앉으세요. 몇가지 들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채령이 차분하게 말씀을 드린다; “먼저 제가 금방 다과상이라도 마련하여 올 터이니 목을 축이시면서 천천히 말씀을 하십시오. 제가 숨김없이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그 말도 옳다고 생각이 되어 이숙임이 고개를 끄떡인다.
차 한잔으로 목을 축인 이숙임이 다시 말문을 연다; “남녀가 유별한데 어떻게 내 아들을 알고 말을 나눌 수 있게 되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채령이 다소 얼굴을 붉힌 채 답변을 드린다; “10년 전 제가 9살때부터 아버지께서 이곳에서 훈장생활을 시작하셨기 때문에 당시 생도였던 댁의 아드님과는 자연히 아는 사이입니다. 하지만 특별히 제가 누이동생처럼 보였는지 언제나 오라버니처럼 은근히 저를 챙겨주곤 했었지요. 그런데 저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곳에서 아버지밖에 없는 저는 저도 모르게 댁의 아드님을 마음속으로 의지하고 있었던가 봅니다”.
그 말을 들은 이숙임은 이채령을 보면서 짠한 생각이 든다. 모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부친이 재혼도 하지 아니한 채 딸 하나를 데리고 고향 서배 마을을 떠나 이곳에 와서 훈장생활을 10년째 하고 있다고 하더니 실제로 형편이 그러하다. 그 작은 손으로 어릴 때부터 긴 세월 살림을 살았을 것이니 그 외로움과 어려움이 선하게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렇지만 짚고 넘어갈 대목이 아직 남아 있다.
본래 성격이 숨기거나 내숭이 별로 없는 이숙임인지라 단도직입적으로 이채령에게 묻는다; “혹시 내 아들이 부잣집 도령이라서 더 좋거나 한 것은 아닌지 묻고 싶군요”. 이채령이 갑자가 작은 한숨을 쉬면서 조용히 말을 한다; “가난한 시골훈장의 딸인 제가 부잣집 아들인 상훈 오빠를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요.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서당을 진작 졸업하고서도 지난 7년간 저의 아버지를 찾아오면서 꼭 저를 만나보고 가시는 상훈 오빠의 마음을 제가 알 것만 같아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정이란 것이 무엇일까? 이채령이는 어째서 손상훈에게 끌린 것일까? 또 손상훈이는 어째서 이채령이를 그렇게 자주 보고 싶어한 것일까? 이채령이는 일가친척이 없는 마을에서 부친 밖에는 의지할 데가 없는 외로운 처녀이다. 그러므로 은근히 자신을 챙겨주는 손상훈에게 어릴 때부터 마음이 끌릴 수가 있다. 그런데 손상훈은 어째서 이채령이를 만나러 졸업을 하고서도 훈장집을 긴 세월 7년 세월이나 찾고 있는 것일까?
이숙임은 그것이 아들 손상훈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한 여자에게 빠져서 평생을 살아갈 아들의 성격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그것이 좋은 것 같지만 자식이 없거나 상처라도 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외로움이 어떠할 것인가? 그것보다 과연 이숙임 자신이 어미라고 하여 그 긴 세월 아들 손상훈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이채령이를 지울 수가 있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인데 이미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손상훈과 이채령의 인연이 하나의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숙임은 이채령을 손상훈의 짝으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간을 두고서 이채령의 성격과 진심을 다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숙임은 그날 저녁 남편 손성규에게 결혼을 시키더라고 반년쯤 지난 다음 농한기가 찾아오면 그때 혼사를 치르자고 제안을 하게 된다.
그것은 나이가 24세나 된 아들 손상훈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불리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숙임은 이채령의 마음씨와 성격에 대하여 좀 시간을 가지고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을 하고 있다. 가주 손성규도 사람 보는 눈이 상당히 정확한 아내 이숙임인지라 그 판단을 존중하고 있다.
따라서 손상훈은 부모님의 반쯤 허락을 얻어서 정식으로 이채령과 사귀는 6개월간의 달콤한 시간을 뜻밖에 가지게 된다. 개화기 이전 조선 고종시대에 손상훈과 이채령이 그러한 특혜를 누리게 되었으니 그것은 큰 행운이라고 하겠다.
'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배 할배15(작성자; 손진길) (0) | 2021.09.15 |
---|---|
서배 할배14(작성자; 손진길) (0) | 2021.09.15 |
서배 할배12(작성자; 손진길) (0) | 2021.09.15 |
서배 할배11(작성자; 손진길) (0) | 2021.09.15 |
서배 할배10(작성자; 손진길) (0) | 2021.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