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12(작성자; 손진길)
훈장 이덕화는 자신의 사랑방 문을 벌컷 열었다가 그 자리에서 얼어 붙고 말았다. 상상조차 하지를 못한 인물이 그 방안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손상훈의 부친인 내남 너븐들의 천석꾼 지주 손성규가 그 방에서 자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지주 손성규가 양삼마을에 살고 있는 이덕화 자신의 사랑방을 예고도 없이 방문하리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방안에는 자신의 딸과 손상훈이 함께 앉아 있지를 않는가?
지주 손성규는 훈장 이덕화가 방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자신이 그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경악을 하는 장면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는 마음속에 집히는 바가 있다. 분명히 훈장의 딸 이채령은 손성규 자신이 보기에도 아름다운 처녀이다. 24살이나 먹은 자신의 아들 손상훈이 어찌 그녀에게 끌리지 아니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덕화 훈장이다. 그가 어째서 청춘남녀가 한방에 있는 것을 용인한채 자리를 떴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의도가 무엇인가? 딸 자식을 부잣집에 시집 보내고자 하는 마음 뿐인가? 아니면 그 재산이 탐이 난 것인가? 그 대답을 들어야 하는 순간이다.
그때 방안으로 들어온 훈장 이덕화가 갑자기 지주 손성규 앞에 무릎을 꿇는다. 선비가 딸자식이 보고 있는 앞에서 체면을 차리지 아니하고 다른 이에게 무릎을 꿇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행위이다. 어떠한 처벌이라도 감수를 하겠다는 태도이다.
훈장 이덕화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지주 손성규를 향하여 무겁게 말문을 연다; “제가 손상훈의 마음과 제 딸의 마음을 눈치를 챘다고 하더라도 선비로서 또 애비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 두 사람에게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자연스럽게 주고자 한 저의 행동이 그만 남녀가 유별한 현실을 망각한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책임이 저에게 있으니 부디 저를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지주 손성규는 훈장 이덕화의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자신의 하나 뿐인 딸을 애비가 되고서 어찌 부잣집에 시집 보내지 아니하고 싶을 것인가? 마침 서당에서 자신에게 한학을 배운 바가 있는 손상훈이 자신의 딸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을 그가 눈치를 챘을 것이다. 천석꾼의 외아들인 손상훈이 신랑감으로는 제격이다. 하지만 문제는 손상훈이 나이만 들었을 뿐 처녀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성격이다. 훈장은 자신의 딸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으므로 숫기가 별로 없고 태평스러운 성격의 손상훈을 쳐다보기에 답답했을 것이다. 따라서 둘만의 시간을 가지도록 도와준 일이 그만 이렇게 일그러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년한 처녀가 노총각과 함께 다과를 나누고 있는 것은 어느 나라의 예법인가? 지주 손성규는 그 점이 못마땅하여 방안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채령을 둘러본다. 그때 이채령이 앞으로 나아와 훈장 이덕화 옆에 꿇어 앉는다. 그리고 애원하는 목소리로 지주 손성규에게 말을 건넨다; “제가 처신을 잘못한 것이니 저를 꾸짖어 주시고 저희 아버지를 용서하여 주세요. 제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눈치 채신 아버지께서 저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채령의 말을 듣고서 지주 손성규는 허허라고 웃는다. 처녀인 그녀가 손상훈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는 말이 아닌가? 자신의 아들인 상훈이도 그녀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훈장 이덕화가 스스로 중매쟁이 노릇을 하다가 잘못 처신하여 지금 욕스러운 처지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가지 남은 문제는 훈장 이덕화가 천석꾼의 재물에 탐을 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지주 손성규가 교리 최부자 집에 식객으로 있는 서배 마을 출신의 선비인 이종흠으로부터 벌써 들은 이야기가 있다. 훈장 이덕화는 명리를 쫓는 것보다는 선견자의 길을 선택한 선비라는 것이다. 그리고 상처를 한 후에는 재혼도 하지 아니하고 딸 자식 하나를 키운 이덕화이다. 그러한 선비가 남의 재산에 흑탐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하나뿐인 딸이 부잣집에 시집을 가서 잘 살아 주었으면 하는 순전한 애비의 마음일 것이다.
그렇게 판단을 한 지주 손성규는 훈장 이덕화와 그의 딸 이재령이 함께 꿇어 앉아 있는 그 앞으로 가서 돌연 자신도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훈장 이덕화의 두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 쥐면서 말을 한다; “애비의 마음이 다 그런 것이겠지요. 훈장 선생님의 마음이나 저의 마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아들과 훈장님의 딸이 서로 좋아하는 것 같으니 제가 내자에게 이야기를 전한 후에 그 의견을 구해보겠습니다. 저희 부부가 의견이 같으면 훈장 선생님의 집안과 금년 내에 좋은 인연을 맺도록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으로 시원하고도 명쾌한 지주 손성규의 결론이다.
40대 장년인 훈장 이덕화의 눈에 이슬이 맺히고 있다. 선비로서 있을 수 없는 광경을 연출하게 해놓고 그것이 공교롭게도 지주 손성규의 눈에 뜨이게 되어 만사가 틀렸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복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해와 같은 지주 손성규의 은혜이며 자신을 믿어 주고 있는 그 마음이 참으로 고맙다. 장차 무엇으로 그 믿음과 고마운 마음에 보답을 해야만 할까?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나온 말이 다소 엉뚱하다; “하해와 같은 은혜와 믿음을 주시니 앞으로 제가 형님으로 알고서 한평생 섬기겠습니다. 못난 아우의 절을 받아 주십시오”.
실제로 훈장 이덕화가 지주 손성규 앞에서 절을 넙죽한다. 손성규가 만류를 하려다가 자신도 그만 맞절을 하고 만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서 이채령은 왈칵 눈물을 쏟는다. 딸 자식의 장래를 위하여 죄인임을 자처한 부친이시다. 얼마나 딸 자식의 장래가 틀어질까 염려를 하셨으면 꼿꼿한 선비가 자식이 보고 있는 앞에서 무릎까지 꿇으셨을까? 재혼도 하지 아니하고 긴 세월 자신만을 바라보고 살아오신 고마운 부친이시다. 그리고 자신과 손상훈의 마음을 순수하게 받아 주고 있는 지주 손성규도 참 고마운 분이시다. 일이 잘 풀리어 자신이 며느리가 된다면 한평생 그 집안을 지키고 돌보는데 열과 성을 다할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을 하는 이채령이다.
그 모습을 보고서 손상훈이 아버지 손성규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부친과 스승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로 전한다; “저로부터 시작이 된 일입니다. 제가 남자 답게 똑바르게 처신하고 처리를 하지 못하여 어른들의 심려만 끼쳤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평생 이채령이만 사랑하고 집안을 책임지겠습니다. 그것이 두분에게 드릴 수 있는 저의 약속입니다”. 행동이 태평스러워 보여도 결코 우유부단한 손상훈이 아니다. 그의 말속에는 숨길 수가 없는 강단과 결단력이 들어 있다. 하지만 훗날 그의 말이 장부일언중천금이 되어 그의 인생을 좌우하게 될 줄은 모두들 꿈에도 몰랐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자 지주 손성규가 먼저 헛웃음 소리와 함께 가볍게 말문을 연다; “허허, 누가 보면 초상이 난 줄 알겠습니다. 훈장 선생 댁에 혹시 막걸리가 있으면 한잔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오늘은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온 것입니다”. 편히 앉으면서 훈장 이덕화가 딸에게 지시를 한다; “가장 맛있는 안주와 함께 탁배기를 내오도록 해라”. 지주 손성규도 아들에게 한마디를 건넨다; “상훈이는 내 옆에 앉아 있고”. 어색한 분위기를 슬며시 벗어나려고 한 손상훈이 그만 사랑방에 잡히고 만다.
술상이 사랑방으로 들어오자 훈장 이덕화가 막걸리를 한잔 채워 지주 손성규에게 먼저 권한다. 그러자 손성규는 다른 잔에 탁배기를 가득 채워 훈장 앞에 놓고서 함께 마시자고 제안한다. 그 다음에는 세번째의 잔을 들어 막걸리를 부은 다음에 아들 손상훈에게 건넨다. 그리고 엄숙하게 말한다; “너도 이제 24살이다. 동무들은 진작에 결혼하여 벌써 자식이 여럿이다. 애비의 개간일을 돕느라고 결혼이 많이 늦어졌다. 그러니 이 잔을 들고 이제 어른이 될 준비를 해라. 애비가 보는 앞에서 한 잔 마셔보도록 하려무나”.
고개를 돌려 그 잔을 마시면서 손상훈이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해본다. 50평생을 허리 한번 펴지를 못하고 조상들의 숙원사업을 마무리하고자 개간일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오신 부친이시다. 이제 남은 세월이 얼마이실까? 60세 환갑도 모두들 축하를 하고 있는 고종시대이다. 그러므로 아들 손상훈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얻어 평생 자신과 조상님들이 이룬 기업을 잘 경영하고 지켜서 훗날 자손에게 대물림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 마음을 그 술잔에 담아 주시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손상훈이다. 그는 한마디로, 효심을 지니고 있는 젊은이인 것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훈장 이덕화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사랑방에 술상을 드려 놓고 안방으로 건너온 이채령이는 사랑방을 바라보면서 그 눈을 뗄 수가 없다. 여자의 운명이 뒤웅박 팔자라고 하는데 왜 아니 그럴까? 자신의 결혼의 성사여부가 절반은 그 방안의 분위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방에서 나는 웃음소리에 그녀의 얼굴이 은연중에 상기가 되고 있다.
탁배기를 몇 순배 돌린 다음에 지주 손성규가 용건을 말한다; “오늘 제가 갑자기 훈장님 댁을 찾아온 목적은 제 숙부님의 상석에 글을 써 주실 수 있는지 여쭈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49제가 끝나기 전에 상석을 설치하자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아서 입니다”. 훈장 이덕화가 시원하게 대답을 한다; “감히 어느 분의 부탁이라고 제가 거절을 하겠습니다. 불감청 고소원입니다. 명필은 못 되어도 정성을 다하여 상석에 붓을 대겠습니다. 언제 상석을 보러 가면 됩니까?”.
지주 손성규가 한가지 더 청을 한다; “그렇게 쾌히 허락하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왕이면 돌을 고르는 곳에도 함께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돌의 크기를 한번 보셔야 글귀를 만들기에도 수월하실 것입니다”. 이번에도 훈장 이덕화는 좋다고 한다. 따라서 두 사람은 당장 명일 3월 2일에 경주 오일장으로 가는 길에 돌공장을 들리기로 약속을 한다. 그리고 누가 보아도 돌공장으로 행차하는 명분이 뚜렷하므로 내일은 함께 길을 나서기로 굳게 약속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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