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14(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5. 15:18

서배 할배14(작성자; 손진길)

 

4. 천년의 고도에서 피어나는 그들의 사랑

 

32일 훈장 이덕화와 함께 경주 오일장을 가는 길에 지주 손성규는 사정리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석수장이의 돌공장을 찾았다. 경주의 인근 월성지역에서 생산이 된 좋은 화강석이 즐비했다. 그 가운데 고인이 된 숙부 손익채의 묘소에 어울리는 크기의 상석 견본을 발견하고 새것 하나를 주문했다.

석수장이들의 솜씨가 대단한 모양이다. 생각보다 빠른 시일내 주문한 물건이 준비가 된다고 한다. 따라서 손성규는 훈장 이덕화에게 7일날 오일장에 자신과 함께 석물공장을 다시 방문할 수가 있는지를 묻는다. 이덕화는 마치 그러한 제의를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것처럼 시원하게 좋다고 답변을 한다.

숙부의 49제가 끝나는 328일까지는 26일이나 남아 있다. 그러나 경주 웃시장에 들린 손성규는 훈장 이덕화에게 탁배기를 나누어 마시자고 권한다. 이덕화는 손성규가 유교를 잘 지키는 내남 너븐들 양반마을 월성 손씨의 가주이지만 때로는 형식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고 사람을 사귈 줄 아는 그러한 포용력까지 겸비한 인물이라고 새삼 느끼게 된다.

참으로 진취적인 성격의 손성규이다. 새로운 개화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한몫을 단단히 할 수가 있는 위인이다. 그러나 벌써 그의 나이 50이 되고 말았으니 새 시대를 맞아 그 뜻을 펴기에는 황혼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을 애석하게 생각하면서 훈장 이덕화는 그의 아들인 손상훈만이라도 부친의 뒤를 이어 진취적이고 앞길을 개척하는 인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손성규는 훈장 이덕화에게 넌지시 말을 전해준다; “제가 내자에게 어제 일과 함께 상훈이의 결혼문제에 대하여 말을 해 두었습니다. 좀 생각을 하고 나름대로 판단을 한 후에 저에게 답을 주겠지요.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상훈이가 외아들이고 또한 24살이나 되었으니 저희 부부도 하루 속히 친 손주를 안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참으로 꾸밈이 없고 소탈한 성격의 지주 손성규이다. 훈장 이덕화로서는 지주 손성규가 마치 형님과 같이 정이 가고 마음에 드는지라 그와 사돈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고 내심 생각을 하고 있다. 따라서 기분 좋게 빙그레 웃으며 5일후에 있을 경주 장날을 기대해본다.

이덕화의 기대가 헛되지 않다. 3 7일 석물공장에 가고자 함께 길을 나선 지주 손성규가 좋은 소식 하나와 별로인 소식 하나를 동시에 그에게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은 상훈의 모친 이숙임 마님이 아들과 이채령과의 교제를 허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별로인 소식은 다만 혼례는 금년 농사가 끝나고 농한기가 시작이 되면 그때 올리는 것으로 하자는 것이다.

훈장 이덕화는 그 별로인 소식도 결코 나쁘지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10년 동안 타향인 내남 양삼마을에서 딸 자식 하나만을 키우면서 훈장으로 홀로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딸 채령이가 시집을 가게 되면 자신의 거취를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 자신이 40대 초반의 나이이므로 딸 만을 바라보고서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다가 보니 사정 동네에 있는 석물공장에 언제 도착을 했는지 모른다. 훈장 이덕화는 지주 손성규와 함께 준비해온 글자를 보고서 말끔한 상석에 한자를 그대로 옮겨 적고자 한다. 노란 물감을 묻힌 붓으로 매끈한 돌의 표면에 한자를 쓴다. 약하지도 강하지도 아니한 필체가 보기에 좋다. 그 옆에서 지주 손성규가 고개를 끄떡이고 있다. 그날 훈장 이덕화는 지주 손성규와 함께 웃시장 포장마차에서 상당히 취했다.

그는 혀 꼬부라진 소리를 지주 손성규에게 하고 있지만 그것은 술의 힘을 빌려서 그가 고백하고 있는 취중진담이다; “사돈이 아니라 제가 형님으로 잘 모실터이니형님, 부디 제 딸을 불쌍히 보시고 며느리로 잘 거두어 주십시오. 제 소원이 그것 뿐입니다”. 손성규는 그날 얼핏 훈장 이덕화의 눈에 맺히고 있는 이슬방울을 본 것만 같다. 애비의 마음이 다 그런 것이겠지

그 다음날부터 328일 숙부의 49제가 끝날 때까지 지주 손성규는 경주 오일장을 찾지를 못했다. 상석을 주문하고 거기에 한자를 적는 일이 남보기에 좋은 명분이 되어 훈장 이덕화와 함께 경주를 두 번 다녀올 수 있었지만 다른 날은 일가와 이웃의 눈치가 보여서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묘소에 상석을 설치하고 49제를 지내는 날은 아예 오늘날의 울주군 두서면에 있는 고 손익채의 무덤 옆에 큰 천막을 쳤다. 멀리 떨어진 높은 산지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문중 사람들과 지인들이 찾아와 주었다. 그날에는 이조와 덕천에 살고 있는 경주 최씨들도 많이 참석을 했다. 그들 조상들의 산소가 인근에 있는지라 그들도 관심이 큰 것이다.

그렇게 3월달이 지나가고 4월이 되었다. 이제는 모를 키우기 위하여 못자리를 설치하고 동시에 보리를 수확해야 할 때이다. 그리고 보리 추수가 끝나면 재빨리 밭을 논으로 만들기 위하여 물을 끌어들이고 땅을 쟁기로 갈아엎어야 한다. 그러므로 4월부터 벼의 추수기인 9월말까지는 농사일에 바쁜 농번기인 것이다.

그렇지만 천석꾼 지주 손성규는 약간의 농사만 자신이 짓고 나머지는 전부 일가를 중심으로 소작을 주고 있는 처지라 그렇게 바쁘지는 않다. 그리고 서당 훈장인 이덕화는 농부가 아니기에 그렇게 바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두 사람은 42일부터 다시 경주 오일장을 빠지지 아니하고 함께 다니고 있다. 자주 보게 되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많은 식견과 경륜을 서로 피력하게 되니 그들 사이가 마치 친형제처럼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경주 오일장 출입을 빈번히 하고 있던 훈장 이덕화에게 기이한 일이 발생하고 있다. 그날은 지주 손성규와 간단하게 웃시장에서 탁배기를 나누고 일찍 헤어졌다.  손성규가 다른 사람과 점심약속이 별도로 되어 있어서 부득이 그렇게 되었다. 이덕화는 하는 수가 없이 혼자 식사를 하기 위하여 그날은 돼지국밥 집이 즐비한 시장 통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크게 바쁜 일이 없으므로 이덕화는 긴 골목식당을 구경하면서 상당히 안쪽에 있는 돼지국밥 집을 찾아 들어갔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만남을 그곳에서 가지게 된다. 어릴 적 동무를 근 30년 만에 그곳에서 만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반려자를 만나게 된다.

그 집에 손님으로 들어서고 있는 이덕화를 보고서 돼지고기를 썰고 있던 노파가 어어 하고 놀라고 있다. 그 놀라는 소리에 안쪽 손님의 식탁에 돼지국밥을 날라 주고 돌아오던 장정이 힐끗 이덕화를 보고서 눈을 끔뻑거린다. 그들의 행동이 하도 이상하여 이덕화도 그 두사람을 세심하게 살펴본다. 그리고 대뜸 묻는다; “혹시 서배 마을에 살던 경주 김씨 종민이와 그 모친 아니십니까?”.

두 모자가 동시에 외친다; “그래, 고향 사람 이덕흠이가 맞구만.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크게 변하지 않았어. 반가우이. 이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이덕화도 얼마나 반가운지 반색을 한다; “30년 세월이 지났지요. 그래 고향을 떠나서 여기서 국밥 장사를 하고 있다니신라 왕손의 체면이 영 말씀이 아니구먼허허허”. 경주 김씨인 동무 김종민이를 여전히 옛날처럼 놀리고 있는 말이다.

그 말끝에 김종민이도 크게 웃는다. 그리고 안쪽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부인과 또 한사람을 불러서 일부러 동무 이덕화에게 인사를 시킨다; “여보게 덕흠이 여기가 내 안사람이고 이쪽은 내 여동생 옥심이야. 생각이 나나?”. 이덕화는 동무 김종민의 처를 처음 대하는지라 깍듯이 인사를 한다. 그런데 김옥심에 대해서는 어릴 때에 보고 처음 보는지라 좀 어색하여 한마디를 한다; “, 이 사람, 30년 세월이 지났는데 어릴 때의 자네의 꼬마 여동생을 내가 무슨 재주로 알아보겠나. 아주 참한 부인이 되어 계시는 구만. 그래 남매가 함께 국밥집을 운영하고 있는 것인가?”.

이덕화가 어색하여 한마디 한 말을 동무 김종민은 곧이 곧 대로 알아듣고서 진지하게 설명을 한다; “이 가게는 우리 식구와 어머님이 함께 운영을 하고 있다네. 내 동생 옥심이는 혼자 몸이 되어 있기에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중이지…”. 김종민이가 어째서 그토록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지 그때 선비 이덕화는 제대로 알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된 동무 이덕화의 모습을 보고서 김종민이 짐작하는 바가 있어서 그렇게 말을 꺼낸 것이다.

사실은 그 돼지국밥 집을 애용하고 있는 서배 마을 출신들이 꽤 많이 있다. 그 가운데 교리 최부자의 집에 식객으로 오래 머물고 있는 이종흠 선비가 포함이 되어 있다. 얼마전 이종흠 선비가 김종민에게 이덕화의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그가 10년전에 상처를 하고 내남 안심에 들어가서 훈장일을 하고 있는데 여전히 독신이라는 것이다. 부인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딸 자식 하나만 키우고 있으니 그 정이 참으로 깊은 사내라는 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김종민은 언제 시간이 나면 내남 안심으로 찾아가서 옛날 친구 이덕화를 한번 만나볼 생각까지 했다. 그 이유는 분가하여 경주시내에서 자식이 없이 남편과 함께 살던 여동생 옥심이가 그만 남편을 사별하고 오갈 데가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임시로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식당에서 일을 도와주고는 있지만 여동생을 볼 때마다 다시 짝을 찾아 주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계속 드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김종민 앞에 옛 동무 이덕화가 떡하니 나타났으니 그것이 천우신조가 아니면 무엇인가? 장사에 소질이 있는 김종민이는 여동생을 친구에게 소개를 하는 일에 있어서도 참으로 재능이 남다르다. 그는 정말 반갑다면서 그날 이덕화에게 술을 자꾸만 권한다.

나중에는 김종민이 여동생 김옥심에게 한잔 술을 이덕화에게 부어주라고 짓궂게 말한다. 그런데 이덕화는 김옥심의 술을 받는 것이 영 싫지가 않다. 그는 너무 오래 독신이다. 더구나 가을이 되면 딸자식 이채령이를 시집 보내고 완전히 혼자가 되고 만다. 그 생각에 참으로 인생이 허무하며 쓸쓸하다고 느끼고 있다. 따라서 훈장 이덕화는 선비답지 아니하게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의 여동생 김옥심이를 참으로 깊숙한 눈매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