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15(작성자; 손진길)
훈장 이덕화는 그날 30년만에 만난 죽마고우 김종민의 식당에서 대취를 했다. 좀체 꼿꼿한 선비 이덕화에게서 볼 수 없는 일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가을걷이가 끝나면 천석꾼 집에 며느리로 시집 보낼 수 있게 되었는데 어째서 이덕화가 그날은 마냥 술에 취하고자 하는가?
기쁘고 행복한 생각이 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10년간 상처를 하고 혼자서 딸 하나를 키워온 그 세월에 대한 허무함이 한없는 쓸쓸함으로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딸 채령이가 없는 집에서 혼자 어떻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니 그 앞길이 아득하기 때문이다.
김종민은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돼지국밥 집에서 자꾸만 취해가는 동무 이덕화를 바라보고 있다. 그의 모친은 단지 선비 이덕화가 홀로 산 세월이 길어서 그러한 줄로만 짐작을 한다. 따라서 김종민의 모친은 선비 이덕화가 혼자 몸이 되어 있는 자신의 딸 김옥심과 잘 되어 새 출발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들 김종민이 부부도 같은 생각이다.
김종민의 부인인 동래 정씨 정해옥이 한마디를 한다; “친구분이 너무 취하신 것 같아요. 아직 점심시간이 약간 지나서 날이 훤하기는 하지만 만취가 되면 오늘 걸어서 내남에 있는 집까지 가기가 힘이 들 텐데요…”. 남편 김종민이가 걱정하는 아내의 말에 농담으로 대꾸를 한다; “허허, 집에 가봐야 여우같은 마누라가 있나. 과년한 딸 밖에 없다고 하는데… 오늘 우리집에서 재우면 되지 않겠나…”.
김종민의 처가 펄쩍 뛴다; “아무리 농담이래도 그런 소리 마세요. 남녀가 유별한데 과부가 있는 집에서 어떻게 홀아비를 함께 재운단 말이에요. 그런 소리 마시고 잠을 깨도록 해서 일찍 내남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아무리 급해도 일에는 다 순서가 있답니다…”. 뒤끝을 흐리고 있는 아내 정해옥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시누이 김옥심과 선비 이덕화를 짝 지어주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지만 그래도 예의를 지켜서 흠이 없게 재혼을 시키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리가 분명한 아내 정해옥이를 남편 김종민이는 참으로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 뿐인 아들 김춘엽을 결혼시키고 일찍 고향인 서배 마을로 분가를 해주자고 했을 때에도 김종민은 찬성을 했다.
그들 부부는 평생 모친과 함께 경주 웃시장에서 돼지국밥 집을 운영하면서 벌어 놓은 재산이 상당하다. 경주 읍내에 좋은 집도 샀고 경주에서 멀지 아니한 외동 서배 마을에는 경작지도 많이 사서 소작을 주고 있다. 그 고향의 논밭을 친척들에게 소작을 주면서 관리를 잘 하라고 아들 내외를 그곳에 분가를 시켜준 것이다.
아들 김춘엽과 며느리 이가연이 서배 마을에서 살고 싶어하는 이유는 따로 두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그 서배 마을에 경주 김씨와 인주 이씨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친척들이다. 여러 성씨가 각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경주 읍내보다는 친척들로 이루어진 고향 시골의 인심이 한결 훈훈하고 정겨운 것이다. 또 하나는, 이가연의 친정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김종민의 사돈이 바로 훈장 이덕화의 일가 형님인 선비 이종흠인 것이다.
나이 50줄에 들어선 서배 마을의 선비 이종흠이 교리 최부자 집에서 오래 문객으로 지내고 있다. 그가 지주 손성규와 교리 최부자의 가주인 최만희 앞에서 훈장 이덕화에 대하여 신원보증을 한 인물이다. 이덕화의 일가인 그는 개인적으로 이덕흠의 죽마고우인 김종민의 사돈이기도 하니 참으로 예나 지금이나 세상사람들은 그렇게 서로 얽혀서 정답게 한 세상을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인가보다.
그러한 입장에서 차제에 김종민 부부의 딸인 김경화의 이야기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김종민의 아내인 정해옥은 친정 마을인 동래의 봉천마을을 방문할 때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친척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 가운데 먼 일가인 젊은이 정진평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정해옥이 봉천의 일가들 가운데 젊은이를 유심히 살피는 이유는 딸 김경화의 혼처를 정하기 위한 것이다.
정진평의 부모와 이야기를 하고 그 생각을 물었더니 먼 친척이기 때문에 김경화와 정진평을 결혼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들은 신라 왕족 출신인 경주 김씨의 후손 김경화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것이 동래 정씨의 양반체면에 조금도 흠이 없는 혼사라고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래서 딸 김경화는 동래 봉천으로 시집을 가서 잘 살고 있다. 훗날 정진평 부부의 딸이 훈장 이덕화의 딸 이채령 부부의 며느리가 된다. 당장은 모르지만 그렇게 사람의 인연은 서로 얽히게 되어 있는가 보다.
그와 같이 김종민과 정해옥은 벌써 자식들을 시집 장가 보내고 특히 아들 내외에게는 고향에서 살 기반까지 확실하게 마련을 해준 야무진 사람들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홀로 살고 있는 시누이 김옥심만 좋은 자리를 찾아 재가를 시키면 된다. 때마침 좋은 상대로 선비 이덕화가 나타났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취한 선비 이덕화에게 그냥 하룻밤 자신의 집에 재우면서 시누이를 떠다 안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은 무조건 술을 깨도록 하여 선비 이덕화를 안전하게 내남으로 그 딸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무탈하게 돌려 보내야 한다. 그리하여야 서로 믿고서 뒷날을 도모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김옥심이도 오빠의 친구인 선비 이덕화가 별로 싫지 아니한 모양이다. 그 옛날 자신이 서배 마을에서 7살쯤 되었을 때에 12살이 된 오빠의 동무 이덕화가 자신을 예쁘다고 귀여워해 준 생각이 불현듯 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접에 막걸리를 채워주면서도 아주 취하지 아니하도록 천천히 속도조절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는지 선비 이덕화는 자꾸만 술에 취하고자 한다. 어째서 그런가? 홀아비로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덕화가 왜 그러한지 자꾸만 궁금해지고 있는 김옥심이다. 사람의 마음이 그런 것인가? 자신이 자식이 없이 과부가 되어 고생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길어서 그런지 이덕화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닌 것만 같다. 은연중에 이덕화의 마음만큼 김옥심의 마음도 아리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 오후 늦게야 훈장 이덕화가 그 식당에서 정신을 차리고 있다. 그는 내남 양삼마을에서 애비를 기다리고 있을 딸 채령이 생각이 든다. 그래서 주섬주섬 일어선다. 김종민이와 모친이 더 있다가 술이 완전히 깨면 길을 나서라고 권유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제 반년만 지나면 보기가 쉽지 아니한 외동딸이다. 혼사를 앞두고 있는 그 딸에게 경주 읍내에서 외박이나 하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저녁 해거름에 집에 돌아온 이덕화의 입에서는 여전히 막걸리 냄새가 풍기고 있다. 아버지의 옷을 받아 걸고 저녁 진지상을 들고 들어오면서 이채령은 도대체 어쩐 영문인지 몰라서 안절부절이다. 10년간 줄곧 보아온 부친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자신은 좋아하는 손상훈의 아내가 되는 꽃길이 기다리고 있지만 아버지는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하나 뿐인 딸자식을 시집보내고 나면 어떻게 살아가야만 할지 막막하신 모습이다.
그래서 저녁상을 물리러 들어온 이채령은 조용히 부친에게 말을 건넨다; “아버지 제가 너무 무심했습니다. 홀로 저를 키우시면서 10년을 살아오신 아버지를 혼자 두고 제가 제 욕심껏 좋은 곳에 시집을 가는 꿈에 부풀어 있었는가 봅니다. 용서해주세요”. 그 말을 들으면서 선비 이덕화는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딸에게 말한다; “이 애비는 채령이 네가 이렇게 잘 커준 것이 대견스럽다. 지난 10년간 집에서 살림을 살고 애비를 위하여 삼시 세끼를 빠지지 않고 챙겨 주었으니 이 애비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 좋은 배필을 만나 농한기가 되면 혼사를 치르게 되었으니 한시름을 덜게 된다. 부디 애비 걱정을 하지를 말고 시집을 가서 시부모의 귀여움을 받고 잘 살아주면 그것으로 나는 행복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완전한 위로가 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갑자기 딸 채령이 ‘흑’ 하고 눈물을 터뜨린다. 그리고 울먹이면서 말을 한다; “저는 좋지만 홀로 계신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내남 상신 너븐들과 안심의 양삼 마을이 거랑 하나를 사이에 둔 지척이라고는 하지만 새 며느리가 되면 어떻게 친정나들이가 제마음대로 쉽겠습니까? 아버지의 조석과 빨래 등이 걱정이 됩니다”. 그 말을 듣고 훈장 이덕화가 허허라고 웃는다; “애끼 이놈아, 그렇다고 네가 그 집에 시집을 가지 않겠다는 말이냐? 손상훈이를 내심 그렇게 좋아하면서 이 애비 걱정은 뒤늦게 많이도 하는구나. 걱정하지 말아라. 차제에 이 애비도 새 장가를 가서 보란듯이 잘 살 터이니…”.
호기롭게 말씀하시는 부친의 말을 듣고서 이채령이도 울먹임을 멈춘다. 그리고 야무지게 한마디를 한다; “아버지 부디 그렇게 해주세요. 제가 새 엄마가 들어오면 잘해 드릴께요. 못다한 효도를 곱절로 해드릴 테니 꼭 그렇게 하셔야만 해요”. 10년전에 돌아가신 생모의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산 사람은 다시 행복하게 살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도 이제는 바라시는 바라고 생각하기에 이채령이는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서 드리고 있는 말씀이다.
딸의 그 말을 듣고서 그날 늦게 잠자리에 든 훈장 이덕화는 죽마고우 김종민의 여동생 김옥심의 생각을 하고 있다. 서로 처지가 비슷하니 오빠 집에 얹혀서 살아가고 있는 과부 김옥심의 사정은 홀아비인 자신이 알 것만 같다. 딸 채령이만 시집을 보내고 나면 청상인 김옥심이나 자기나 혼자 몸들이다. 서로 살림을 합쳐서 남은 세월을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이웃에게 흉허물이 될 리는 없다. 그리하면 딸 채령이도 애비에 대한 걱정을 덜 수가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다음 경주의 오일장부터는 지주 손성규와 일찍 탁배기를 나누고 헤어져서 홀로 김종민의 식당을 다시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딸 채령이 시집을 갈 때까지 반년이 남아 있으니 그때까지 김옥심 본인의 생각을 물어보고 서로가 같은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장차 딸 부부에게도 짐이 되지를 않고 도움이 되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깊은 생각을 하면서 어느정도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훈장 이덕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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