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18(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6. 08:39

서배 할배18(작성자; 손진길)

 

이 세상에 흘러가는 세월만큼 정확하고 공평한 것이 없다. 누구에게는 빨리 지나가고 누구에게는 천천히 지나가는 법이 없다. 그리고 사람이 의식하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상관이 없이 시간은 또박또박 정확한 발걸음으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그렇지만 훈장 이덕화와 그의 딸 채령이, 그리고 이덕화의 연인이 된 김옥심과 이채령의 신랑감인 손상훈의 경우는 다른 것 같다.

그들은 내남의 농부들이 한여름 뙤약볕 아래 논바닥에서 하루 해가 참으로 길다고 한숨을 내쉬면서 농사일에 정신이 없을 때에 그 반대로 하루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지나가고 있느냐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생의 황금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이가 든 연인이 훈장 이덕화와 김옥심이고 또한 젊은 연인이 손상훈과 이채령이다.

그들이 퍼뜩 정신이 들었을 때는 벼가 무르익어 추수기를 앞둔 시점이다. 이제 가을걷이가 끝나면 농한기가 시작이 되고 내남 너븐들의 유일한 천석꾼이며 그곳 손씨의 가주인 손성규의 집안에서 외아들을 장가보내는 큰 경사가 있게 될 것이다. 그 점을 깨닫고서 훈장 이덕화는 어떻게 딸의 혼례를 준비해야 할지 그리고 자신의 거취를 사돈이 되는 지주 손성규에게 어떻게 말씀 드려야 할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너무 시간을 지체하여 늦게 손성규에게 말씀을 드리면 낭패가 될 것 같다. 얼마 있지 아니하면 신랑감 손상훈의 사주단자가 올 것이고 신랑측의 예단이 그 뒤를 이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훈장 이덕화는 8월 초순에 경주 오일장에 가서 지주 손성규를 찾았다.

그날도 운이 좋게 경주 웃시장 포장마차에서 탁배기를 마시고 있는 지주 손성규를 쉽게 발견했다. 반가운 김에 이덕화가 인사부터 한다; “형님, 그동안 적조했습니다. 가내 두루 무탈하시지요?”. 지주 손성규도 반갑게 화답을 한다; “이 선비께서도 평안하십니까? 요즈음은 통 웃시장에서 뵙지를 못했습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인사가 대충 끝나자 지주 손성규는 훈장 이덕화에게 사발을 하나 건네면서 탁배기를 가득 부어준다. 마침 목이 마른 이덕화는 기분 좋게 단숨에 들이키고 빈 사발을 지주 손성규에게 건넨다. 그리고 술동이를 기울여서 한 사발 가득 부어 드린다. 손성규는 오늘따라 훈장 이덕화가 참으로 정성스럽게 탁배기 사발에 막걸리를 부어 자신에게 공손하게 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슨 부탁할 일이 있는 것인가? 지주 손성규의 직감이 번쩍인다.

아니나 다를까 나직한 목소리로 훈장 이덕화가 말을 하기 시작한다; “형님, 제가 이번 농한기에 딸을 형님 댁에 며느리로 드리고 나면 저도 새 장가를 가려고 합니다”. 탁배기 힘이라도 빌려서 훈장 이덕화가 어렵게 꺼내고 있는 말이다. 안 그래도 훈장 이덕화의 하나뿐인 혈육 이채령이를 손상훈의 짝으로 데리고 오면 홀아비인 이덕화의 장래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지주 손성규가 요즈음 아내인 이숙임과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덕화가 먼저 자신의 거취에 대하여 말을 꺼낸 것이다.

지주 손성규는 독신인 선비 이덕화가 재혼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에 반가움이 앞선다. 그래서 즉시 기뻐하며 묻는다;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미리 축하를 드립니다. 그런데 사돈같이 좋은 선비를 남편으로 맞이하는 행운을 얻은 분이 누구십니까?”. 참으로 궁금하여 묻는 말이다. 이덕화가 숨김 없이 답을 한다; “제게 과분한 여성이지요. 저의 죽마고우가 여기 시장골목에서 돼지국밥 집을 오래 경영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오빠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김옥심이라는 여자분입니다. 어릴 때 고향 서배 마을에서 저와 함께 자란 처자입니다”.

지주 손성규는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한다. 그러면서 혼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정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여보게 사돈, 오랜 세월 홀로 키운 어여쁜 딸을 우리 상훈이의 배필로 주니 내가 참으로 감사하이. 자신의 전부를 우리집에 내어주는 것과 같지 않나? 그러므로 내가 별로 힘은 없지만 두 가지로 그 보답을 하고 싶네. 이 말은 사돈에게 하는 말이기 이전에 사실은 그대를 나의 친 동기로 생각하고서 꺼내는 말이니 절대로 고깝게 듣지를 말게. 하나는, 자네의 혼사는 이채령이의 혼인이 끝난 다음에 하는 것이 어떻겠나?...”.

잠시 숨을 고른 다음에 지주 손성규가 말을 잇는다; “또 하나는, 자네의 딸을 우리집 며느리로 주면서 자네는 다른 기타 등등을 준비하려고 하지를 말게. 우리 부부가 동네사람들 보기에 흠이 되지 아니하도록 신부가 마련하는 예단이며 필요한 혼수를 전부 미리 장만해 주겠네. 나도 이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네. 왜냐하면, 사돈 간에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고 공연한 자격지심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일세. 하지만 자네가 진실로 나를 마음속으로 형으로 생각한다면 그냥 그렇게 해주게. 나는 자네가 사돈이기 이전에 정말 나의 좋은 아우와 같아서 드리는 말씀이네.”.

끝으로, 지주 손성규는 참으로 중요한 한마디를 보태고 있다;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남은 세월을 함께 살아가면 안되겠나? 나는 내가 훗날 세상을 먼저 떠나더라도 자네가 남아서 상훈이 부부를 돌보아 주면 좋겠는데…”. 참으로 앞날을 훤히 내다보면서 진심을 담아서 지주 손성규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있는 훈장 이덕화는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읊조린다; ‘참으로 딸 채령이가 좋은 집으로 시집을 가는구나! 시아버지가 이 정도로 남의 형편을 헤아려주고 진심으로 도와주고자 하니 그 복이 어디로 가겠는가?’.

그래서 훈장 이덕화가 울먹이는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님, 제게는 사돈이 아니라 형님이 맞습니다. 저의 형편과 처지를 먼저 헤아려서 필요한 말씀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형님 앞에서는 이 아우가 선비나 사돈의 체면을 내려 놓겠습니다. 제가 형님께 드릴 수 있는 저의 보답은 형님의 후계자로 부족하지 않도록 손상훈이를 돌보고 키우겠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조선사회가 어떻게 변하게 되더라도 형님이 일군 그 피와 땀의 결실을 상훈이 부부가 끝까지 지켜 나갈 수 있도록 제가 혼신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혼인은 당연히 채령이가 시집을 가고 난 다음에 할 것입니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그날 서로 간의 마음속의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참으로 즐겁게 탁배기를 몇 사발 더 나누어 마셨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갑자기 훈장 이덕화가 지주 손성규의 팔을 잡으며 말을 한다; “형님, 제가 오늘 말이 나온 김에 제 죽마고우 김종민과 그의 누이동생인 김옥심이를 소개하겠습니다”. 젊은 선비 이덕화가 막무가내로 지주 손성규의 팔을 잡아 끈다. 손성규도 훗날 안사돈이 될 여자분이 어떠한지 한번 보고 싶다. 따라서 못이기는 체하고 훈장 이덕화가 끄는 대로 식당가로 들어선다.

웃시장 안쪽에 있는 돼지국밥 골목을 한참 들어가더니 어느 식당 앞에서 훈장 이덕화가 호기롭게 소리를 친다; “여보게 종민이, 내가 오늘 우리 형님을 모시고 왔네. 어이쿠 어머님께서 오늘도 변함없이 돼지고기를 썰고 계시는 군요”. 식당 입구 한 켠에서 좌판의 돼지고기를 썰고 있던 김종민이의 모친이 먼저 지주 손성규를 쳐다본다. 외동인 이덕화가 자기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그가 도대체 누구인가? 의아한 표정이다.

이내 안쪽에서 김종민이 부부가 앞쪽으로 나온다. 그 뒤를 김옥심이도 따르고 있다. 누구보다도 훈장 이덕화를 반기는 그녀이지만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는 뒤로 자신을 물릴 줄도 아는 현명한 여인이다. 멀찍이 따라오는 김옥심이를 발견한 훈장 이덕화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그 얼굴 그대로 그들 모두에게 인사를 한다; “내 어릴 적 동무 김종민이그리고 형수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의 시선은 줄곧 뒤에 서있는 김옥심이를 향하고 있다.

그러한 기묘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지주 손성규가 앞으로 나선다; “훈장선생인 이덕화 선비를 통하여 저도 죽마고우 친구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먼저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내남 상신 너븐들 마을에 살고 있는 월성 손가 손성규라고 합니다. 시골의 농사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참으로 짧고도 겸손한 자기소개이다. 그 말을 들은 김종민이 역시 짧게 인사를 한다; “저는 이 선비의 고향친구 경주 김가 김종민입니다. 이쪽은 제 아내 동래 정씨이고 이쪽은 제 모친입니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제 누이동생입니다. 저희들은 보시다시피 이곳에서 오랫동안 식당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지주 손성규는 먼저 김종민의 노모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다. 그리고 김종민의 처에게도 인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김옥심을 유심히 보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김옥심으로서는 오늘 갑자기 이덕화가 손성규를 끌고 와서 자기 가족에게 인사를 시키는 것이 상당히 이상하다. 하지만 필시 어떤 연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예의에 어긋나지 아니하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그 이상한 소개와 인사를 보고서 훈장 이덕화가 보충설명을 한다; “사실은 저의 하나뿐인 딸 이채령이가 제가 형님으로 모시고 있는 이 어르신의 아들과 혼담이 있습니다. 10년 동안 타향살이를 하면서 시골에서 훈장일을 하고 있는 이 고리타분한 선비가 무슨 힘이 있으며 자랑거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게도 고향의 죽마고우가 경주 읍내에 의젓이 살고 있으니 한번 소개를 시켜 드리고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 왔습니다. 어머님, 제가 잘못한 것이 아니지요?”. 김종민의 모친이 고개를 끄떡이며 답을 한다; “잘 했네. 어릴 적부터 내 집이 자네 집이 아닌가? 잘 모시고 왔네. 누추하지만 자리에 앉으시지요…”.

지주 손성규는 그 모친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평소 그 집에서 훈장 이덕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것만 같다. 아들 김종민의 둘도 없는 친구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과부가 된 딸이 다시 만나게 된 좋은 인연으로 여기고 있다. 훈장 이덕화가 그 집에서 귀한 백년손님의 대접을 벌써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전후사정을 살피게 된 지주 손성규는 기분이 좋게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식당 주인인 김종민에게 말한다; “주인장께서도 많이 바쁘시지 않으면 합석을 하시지요. 이렇게 만난 것도 참 좋은 인연이지요. 제 술도 한잔 받으시고요”.

김종민이도 얼마 전에 이덕화로부터 내남 상신의 천석꾼인 손성규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이덕화가 스스로 형님처럼 의지하고 있으며 보기 드물게 진실한 어른이라고 말한 것이다. 친구인 선비 이덕화의 인품을 신뢰하고 있는 김종민이는 진중하게 손성규를 대하면서 자신도 형님을 모시듯이 막걸리를 한 사발 올린다. 그날 그들은 그 식당에서 참으로 좋은 시간을 하루 보내게 된다. 그리고 좋은 친교가 그때부터 오래 그들 사이에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