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배 할배(손진길 소설)

서배 할배19(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9. 16. 13:39

서배 할배19(작성자; 손진길)

 

5. 너븐들의 큰 잔치와 간소한 혼례식

 

내남 상신을 예로부터 광석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산기슭에 넓은 고인돌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 선사시대에 그러한 고인돌이 생겨났다고 하니 참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부락이 광석마을이다. 그 광석마을의 인근 안심에는 암각화가 새겨진 고대인들의 큰 바위가 역시 자리를 잡고 있어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이 얼마나 오래된 자연 부락인지를 증거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고인돌의 용도가 주로 고대인들의 지도자인 권력자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자연부락 공동체의 지도자가 죽게 되면 그 무덤을 만들기 위하여 부락민들이 일체 단결하여 산에서 그 큰 바위를 굴려서 들판으로 옮겨온 것으로 풀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소수의 학자들은 고대인들이 부락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그 큰 바위를 옮겨오는 것으로 하늘과 조상들에게 자신들의 지극한 정성을 보인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 큰 고인돌이란 그곳에 살던 고대인들이 단결하여 만들어 낸 것으로 별다른 기록이 없는 그들의 삶의 족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자연 부락민들의 단합된 삶이 문자가 생기고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시대에도 면면히 계속이 되고 있다. 다만 그들은 큰 돌을 산에서 옮겨 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반대로 행동하고 있다. 산에서 떠내려온 거랑가의 돌을 모아 그것으로 밭두렁과 논두렁을 쌓으며 자꾸만 경작지를 넓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돌밭을 넓은 논과 밭으로 만드는 사람들의 눈물겨운 삶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광석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동네 이름을 넓은 돌마을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지를 않는다. 그 대신에 그들이 선호하고 있는 마을의 이름은 넓은 들판을 가진 풍요로운 마을이다. 그러한 의미를 담아 순수한 조선말로 너븐들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때로는 그러한 삶의 애환을 모르고 너븐도리마을이라고 곧이곧대로 기록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고쳐 생각해보면 그것도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넓은 개천 유역의 돌들을 수없이 골라내어 버리고 마침내 옥토을 이룬 대단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븐도리마을이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그 뜻만 잘 새긴다면 그곳에서 평생을 살다가 사라진 조상들에게 크게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상신과 안심과 박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지긋지긋한 돌밭을 개간하여 경작지로 삼고 있다. 그들은 거랑가의 돌밭을 벼와 보리가 자랄 수 있는 옥토로 바꾼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인생은 돌과의 사투이다. 그런데 한번 논을 개간했다고 하여 그것이 끝이 아니다. 여름 장대비가 계속되어 홍수라도 나게 되면 논은 다시 돌밭으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다시 돌을 골라내고 개간을 해야만 하는 그들의 삶은 고단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러한 어려움이 있기에 어떤 사람들은 차라리 산기슭에 천수답을 만드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계단식 논을 만들고 있다. 그야 말로 하늘에서 내리는 빗소리만을 기다리며 초여름이 되면 그 계단식 논에 모내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모작으로 보리까지 심는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천수답을 산기슭에 만드는 그들의 마음은 하나같이 거랑가의 논이란 돌과의 사투이므로 지긋지긋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석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동네를 넓은 돌마을이라고 결코 부르고 싶지가 않다. 마을이름만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오곡백화가 자라는 넓은 들판을 가진 마을이라고 짓고 싶다. 그러한 소원이 담겨 있는 고유한 마을이름이 사실은 너븐들인데 그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그 너븐들 마을에 3대에 걸쳐서 100년간 줄기차게 거랑가의 돌밭을 개간하여 천석꾼을 이루었다는 전설을 가진 집안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집의 가주가 지주 손성규인 것이다. 그러므로 광석과 안심 그리고 박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손성규 집안처럼 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그 집의 논과 밭은 소작하고 있다.  

그런데 늦은 봄부터 그 집안에 대한 소문 하나가 간간이 소작인들에게 들려오고 있다. 천석꾼 지주 손성규의 외아들 손상훈이 경주에서 내남으로 오는 길에 양삼마을의 서당 훈장인 이덕화의 딸 이채령과 함께 걸어서 오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내기 철이 끝난 초여름에는 더 구체적인 소문이 들려온다. 24살의 노총각인 손상훈이 19세의 노처녀인 이채령과 혼담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작인들은 천석꾼을 이룬 의지의 사나이 손성규를 존경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집에 대한 소문에 관심이 크다. 그 점을 알고서 지주 손성규가 8월이 되자 일가들을 모아 놓고 아예 공표를 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아들 손상훈을 훈장의 딸 이채령이와 결혼시킬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소문은 잠잠해졌다. 그 대신에 모두들 추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추수가 끝나자 마자 부락민들이 양삼마을 훈장인 이덕화의 집을 방문하고 있다. 그들은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달걀이나 곡식 등을 조금씩 가지고 온다. 그것을 사양하는 훈장 이덕화에게 자신들의 아들들에게 한자를 가르쳐준 스승의 은혜를 뒤늦게서야 고맙게 생각해서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을 하니 안 받을 수도 없다. 시골 인심이란 본래 인정상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표나게 말을 안해서 그렇지 하나같이 천석꾼 지주 손성규의 사돈이 되는 훈장 이덕화가 부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것이 없다고 하는 순박한 생각이다. 그러한 사실을 넉넉하게 짐작하고 있는 훈장 이덕화가 경주 오일장에서 지주 손성규를 만나서 고민을 상담한다. 그 말을 듣고 손성규도 그 처리 방안을 두고서 고심을 한다.

두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한 결과 두가지 원칙을 세운다; 첫째, 혼례는 간소하게 하되 일가와 소작인들이 살고 있는 광석과 안심 그리고 박달 마을에는 3일간 배불리 먹일 수 있도록 잔치를 크게 한다는 것이다. 둘째, 부주를 받아서 잔치를 하는 관행을 이번 한번만은 거절한다는 방침을 미리 선포하고 주지시키자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두 사람 사이에 내부적으로 하나의 방안을 더 합의하고 있다. 그것은 손상훈이와 이채령의 혼사가 끝나면 그 삼일에 기습적으로 훈장 이덕화와 김종민의 여동생 김옥심과의 혼례를 간소하게 치룬다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삼일 동안 세 마을의 주민들에게 배불리 먹고 마시게 하자는 것이다. 훈장 이덕화가 눈물이 나게 사돈이 되는 손성규에게 감사한다. 재혼이라고 하면 그저 조용히 살림을 합치고 그냥 살 수도 있는데 그래도 정식으로 혼례식을 마련해주겠다고 하니 그것이 고마운 것이다.

10월달에 들어서자 15일에 너븐들의 지주인 손성규의 집에서 큰 경사가 발생하고 있다. 천석꾼의 외아들인 손상훈이 양삼마을의 서당 훈장인 이덕화의 딸 이채령을 신부로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신부가 살고 있는 양삼마을에서는 간단하게 혼례식만 거행하고 나머지 일정은 모두 신랑의 집에서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골 양반 내남 월성 손씨 문중의 가주인 손성규가 아들의 혼사에 있어서만은 너무 유교적인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고 융통성이 있게 혼례를 치룬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디까지나 훈장 이덕화에게 부담을 크게 주지 아니하려는 그의 배려 때문이다.

그렇지만 혼례식날 하객들과 동네사람들을 대접하고자 하는 그의 정성은 지극하다. 돼지를 여러 마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소도 그의 소작인이 살고 있는 마을마다 한 마리씩 잡도록 했다. 혼례 행사에 참석하거나 못하거나 상관없이 그의 소작인들이 살고 있는 모든 마을에서 3일간 충분히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양삼마을 훈장 이덕화의 집에서 간소하게 치러지는 혼례도 나름대로 볼만한다. 동네 어린아이들의 말처럼 신랑 신부의 꼬꼬 재배가 있고 마주 절을 하고 있는 그 상 위에는 퍼드득 거리는 닭을 억지로 보자기에 싼 채 놓아 두고 있다. 그리고 나무로 깎아 만든 원앙 한 쌍도 놓여 있다. 신랑과 신부가 생전 처음 치르는 결혼식이라 약간의 실수를 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하객들이 그렇게 즐거워한다.

혼례를 마친 신랑신부는 본래 신부의 집에서 첫날밤을 맞이해야 하지만 혼주인 손성규와 이덕화의 사전합의에 따라 신방을 너븐들의 손성규의 집에 마련했다. 자연히 신부집에서 첫날밤을 지낸 신랑을 하루 종일 처가의 젊은 친척들이 모여서 골탕을 먹이는 그 관례도 생략이 되고 있다.

신랑을 자신들의 집안의 딸을 채어간 도둑이라고 몰아서 그 발을 빨래방망이로 두드리면서 장모에게 술과 음식을 계속 내오라고 소리치는 행사가 볼거리인데 그것이 생략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대신에 3일 동안 푸짐하게 여러 마을의 주민들이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조치를 하고 있다.

그렇게 전통에 억매이는 것보다는 실제적으로 함께 먹고 살며 즐거움을 나누는 잔치가 되도록 신경을 쓰고 있는 인물이 지주 손성규이다. 그의 사돈이 된 훈장 이덕화의 생각도 그러하다. 그러한 두 사람의 생각이 앞으로 다가오는 개화의 시대에 앞서가는 선각자들의 생각과 비슷한 것인데 그 점을 자신들은 알지도 못한 채 그렇게 내남에서 조금은 이상한 혼례와 잔치가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일 째 잔치 음식이 여전히 각 동네에 돌고 있을 때에 기습적으로 지주 손성규의 집에서 하나의 혼례가 더 있게 된다. 훈장인 42세의 이덕화와 37세의 김옥심이 재혼을 하는 날이다. 동네 어르신들을 모아 놓고서 먼저 이덕화와 김옥심이 절부터 드린다. 그 다음에 혼례상 좌우편에 갈라서서 유교식으로 신랑과 신부의 맞절을 하는 것이다.

초혼인 젊은이들의 혼례만 보다가 나이가 든 신랑 신부의 재혼의 혼례도 보게 되니 동네 사람들은 그것도 구경거리라고 즐거워한다. 그날 김종민 내외와 그 모친이 하루 식당일을 접고 그 혼례와 잔치에 매어 달렸다. 그리고 딸 자식 김옥심과 사위 이덕화가 남은 인생을 이제는 우여곡절이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그들은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렇게 10월달 농한기에 상신과 안심 그리고 박달 지역에 떠들썩하게 두번의 혼례가 있고 난 후 그해 1874년은 평화롭게 한해를 마무리하게 된다. 그렇지만 고종이 민비 일가와 개화파의 도움을 받아 나라의 문을 여는 방안을 깊숙하게 논의하고 있는 시대이므로 바야흐로 내남의 시골 양반들도 예전에 보지 못하던 큰 파도를 미구에 경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