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6년 설교문(손진길 목사)

“로마제국의 수도에 있는 로마교회를 방문하고 싶어하는 사도 바울이 자기소개를 하며 누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다”(롬1:1-3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5. 3. 29. 12:29

제목; “로마제국의 수도에 있는 로마교회를 방문하고 싶어하는 사도 바울이 자기소개를 하며 누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다”(1:1-32)

설교일; 주후 2025 12 28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25329일 토요일 작성)

 

사도 바울이 이방인선교를 수행하고 있던 시대의 로마제국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토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동쪽으로는 그 이전시대 헬라제국이 차지하고 있던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땅을 전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그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까지 뻗어 있으며 북쪽으로는 유럽대륙을 떠돌고 있는 유목민들의 땅을 상당히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거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로마제국은 두가지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수많은 속국의 백성들을 동일하게 다루기 위하여 만민법 성격을 지니고 있는 로마법을 제정하여 실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변방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하여 로마의 군대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군용도로를 정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국의 수도인 로마시에서부터 출발하여 속국의 대도시를 연결하고 있는 로마의 도로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는 말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 길을 이용하여 사도 바울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서방세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은 서방선교를 빨리 끝내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15:23). 그 이유는 주님의 재림이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당시의 초대교회에 만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계시록 말미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입니다;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22:20-21). 요컨대, 이 세상의 종말과 주님의 재림이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사도로 살아가고 있는 사도 바울의 발걸음도 바쁘기 그지 없습니다. 거대한 영토를 가진 로마제국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다고 하더라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그는 로마제국이 건설한 신작로를 이용하여 대도시를 차례로 방문하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선교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나름대로 하나의 선교원칙을 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기독교지도자들이 선교한 지역에는 자신이 들어가서 전도하지 아니하겠다는 것입니다”(15:20).

그런데 로마서 제1장 본문을 살펴보게 되면 사도 바울이 그 원칙을 스스로 어기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의 수도에 자생적인 초대교회가 성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사도 바울이 방문하여 만든 교회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그가 그 교회를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지켜온 선교원칙을 어기면서도 그가 로마제국의 수도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로마서 제1장과 제15장에 두가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  하나는,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그곳 성도들에게 제공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1:11-17).

(2)  또 하나는, 서방선교의 끝인 서바나(Σπανίαν, 스페인에 대한 헬라식 지명, 15:23. 한자로는 서반아(西班牙)로 표기가 되고 있음) 곧 스페인에 대한 선교를 이루기 위해서는 로마교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15:23-24);

사도 바울은 아직 제국의 수도인 로마시를 방문한 적이 없습니다. 자생적인 로마교회가 설립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통하여 진작에 듣고 있지만(18:1-4, 1:8) 그곳 성도들에게 자신을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15:22, 16:3-5). 그러므로 로마서를 작성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소개를 스스로 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에 대해서는 말씀에 대한 구절풀이에서 자세하게 알아보고자 합니다.

로마제국의 수도가 로마시(the City of Rome)이기 때문에 로마교회에는 제국의 권력자들과 부자들이 많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대한 제국의 영토를 다스림에 있어서 로마제국의 안과 바깥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의 선을 긋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에 속하고 있는 지역은 헬라세계의 문명과 로마의 실용적인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선진지역이지만 그 바깥의 세상은 미개한 야만인이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후진지역입니다. 그것은 그리스철학과 학문을 받아들인 문명인 곧 헬라인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그러하지 못한 야만인들이 살고 있는 바깥세계로 나누어지고 있다는 헬라시대의 세계관이 로마제국시대에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사도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1:14)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헬라인들의 사고에 물들어 있는 자신의 생각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 스스로 수정하고 있으며 그 점을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지평선과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세상을 선진지역과 후진지역으로 나누는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모르고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이신 하나님을 그 말씀에 의지하여 예배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문명인이거나 야만인이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유일한 구별은 창조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냐? 아니냐?의 차이만이 있을 뿐입니다”(1:16-17, 18-25).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에 대한 구절풀이에 들어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아울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히브리경전을 율법으로 선민 유대인들에게 가르치던 여호와의 종 랍비 사울이 이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천국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온세상에 전파하는 주님의 종인 사도가 되었다는 의미를 담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이방인, 2:8)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9:15, 13:4-5) 하나님의 복음(1:9,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에서 비롯됨, 4:34, 5:19-30)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9:3-6),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24:44-45, 사도 바울의 주치의로서 그로부터 3 9개월간 집중적으로 성경말씀을 배운 의사 누가가 부활하신 주님이 40일간 제자들을 재교육하신 내용의 핵심을 말한 대목임).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단지 다윗의 호적에 요셉의 장자로 등재가 되고 있을 뿐임, 2:1-7, 22, 1:6, 16, 그러므로 혈통적으로 다윗의 후손인 목수 요셉의 친아들인 그들 곧 예수의 동생들이 부친의 혈통이 아닌 형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아니하고 있음, 7:5), 4. 성결의 영으로는(8:11)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24:36-43)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24:46-51, 28:18, 16:19)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2:32-36, 4:12).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성령안에서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사명자로 세움을 받고 온세상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성하는 것을 말하고 있음, 28:18-20, 1:8, 2:1-4, 30-42, 9:15, 고전15:8),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그리스도인의 의미임, 11:26)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사도 바울처럼 육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예언의 말씀임, 고전15:8, 11:1, 9:3-9. 그리고 부르심을 받은 것은 Calling Out’의 의미임).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24:49, 보내심을 받은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창조주 여호와의) 은혜(1:17,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대속의 은혜를 말함)평강(24:36, 28:18-20,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주님이 되시고 성도들에게 영원히 함께하심, 16:6-7) 있기를 원하노라(고후13:13, 축원의 의미임)”(1:1-7); 질의답변형식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본문의 뜻을 풀이하여 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질문입니다; “유대교의 랍비였던 사울이 회심을 하고서 기독교인이 되어 그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가 로마의 교인들에게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가요?(1:1-2, 5-6, 9:1-22);

먼저 유대교의 율법선생인 랍비 시절 사울이 믿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그 점부터 살펴봅니다(6:8-15, 8:1-5, 9:1-2, 22:3-5, 3:5-6);

(2)  소아시아의 길리기아 다소 성 출신인 유대인 교포 사울은 십대시절에 일찍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바리새인의 큰 스승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과 히브리의 경전(미크라) 전승(미쉬나) 그리고 주석(미드라쉬) 등을 배워서 나이 30(4:3, 3:23) 랍비가 된 인물입니다(22:3). 그는 선민만의 구원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메시아가 나타나 현세적으로 이스라엘의 해방과 구원을 실현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3:5). 더구나 랍비 사울은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유대교리의 파수를 위하여 이단사상을 퍼뜨리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서 처형하여야 한다고 하는 소위 과격한 샴마이 학파의 추종자로 보이는 것입니다(3:6, 8:1-3, 9:1-2).  

1)    집사 스데반의 순교와 관련하여 생각을 해보면, 랍비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감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유대교인들에게 전파하고 있는 헬라파 기독교인인 집사 스테반과 대 논쟁을 벌인 것으로 보입니다(6:9, 22:3). 집사 스데반이 율법을 거스르고 있으며 성전을 헐고 규례를 고치겠다고 말하였기에 랍비 사울은 그를 산헤드린 대공회에 고발하고(6:11-14) 율법에 따라 기드론 골짜기로 끌고가서 돌로 쳐죽이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8:1, 22:20).

2)    그러한 기록을 참조하면, 랍비 사울은 소위, ①율법 지상주의, ②예루살렘성전 지상주의, ③예수의 부활 불가능 사상에 깊이 빠져 있던 인물입니다. 분설(分說, 나누어서 설명함)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바리새인이며 유대교의 랍비인 사울은 율법 지상주의에 푹 빠져 있습니다; 그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믿고서 율법의 의를 이루고자 전력투구하고 있는 율법 선생입니다(10:3, 5). 따라서 랍비 사울은 바리새인과 유대교인들이 보기에 모세의 율법과 장로들의 규례를 철저하게 지키고(7:8-9) 십일조 생활과 금식기도에 모범이 되고 있는 인물인 것입니다(18:11-12).  

3)    둘째,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의 신앙의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이며 그곳에서만 여호와께서 임재를 하신다고 랍비 사울이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 옛날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시면서 지성소 언약궤와 그 뚜껑인 속죄소에 임재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25:20-22).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게 되면 항상 솔로몬의 예루살렘성전에 계신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왕상8:1-11, 9:3-9). 

4)    솔로몬 성전이 불탄 다음에는 다시 건축이 된 제2성전에 임재하여 계신다고 선민 유대인들이 믿고 있습니다(6:15-18, 4:20). 그러므로 유대교의 선생인 사울도 앞장을 서서 민족종교인 유대교의 권위가 여호와께서 유일하게 임재하여 계시는 예루살렘성전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예루살렘성전의 권위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자는 누구라도 이단이라고 하는 생각을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26:61-62, 6:14).

5)    셋째, 선지자인 나사렛 예수의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랍비 사울이 믿고 있습니다; 그 옛날 큰 선지자인 엘리야와 엘리사가 죽은 자를 살린 경우가 각각 있습니다(왕상17:9, 17-24, 엘리야가 시돈에 속한 사르밧의 과부의 아들을 살림, 왕하4:8, 20-22, 32-37,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림).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 이래로 죽은 선지자가 무덤에서 되살아난 경우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했다고 전하고 있는 그 제자들의 주장을 랍비 사울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을 속이고 있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이므로 탄압하고 근절을 시키는 것이 옳다고 랍비 사울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8:1-3, 9:1-2, 22:3-5, 19-20).

6)    참고로, 율법선생인 랍비들은 바리새인들이므로 당연히 부활사상을 지니고 있으며(23:8) 그것을 선민 유대인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핵심내용을 베다니의 마르다의 신앙고백에서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있게 되면 모두가 부활하여 여호와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11:24). 그러므로 그것은 종말론적인 부활사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르다는 살아 생전에 그리스도 예수를 대속의 주요 생명의 구원주로 믿게 되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얻게 된다고 하는 예수님의 부활사상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11:25-26).

(3)  둘째 질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다메섹 도상의 영적 체험이 사울에게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가요?”(9:3-22, 22:6-21); 첫째, 대낮의 태양빛보다 더 강한 빛이 갑자기 나타나 다메섹 도상에서 랍비 사울을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9:3). 그 강한 빛에 노출이 된 사울의 눈은 그 자리에서 당장 멀어져 버린 것입니다(9:8). 눈은 멀어졌지만 히브리정경에 밝은 랍비 사울은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인 태양의 빛보다 더 강렬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자신에게 임재했다는 것입니다(21:23-27, 22:4-5). 그러므로 여호와의 음성을 직접 듣게 되면 자신은 랍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은 선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6:1-9)”.

1)   둘째, 그 강한 빛 가운데 사람의 음성이 들리고 있습니다(9:4). 그러므로 랍비 사울은 그 사람의 음성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고 있습니다(19:19). 이제 자신이 말라기 선지자의 뒤를 잇는 귀중한 선지자가 되고 있다고 느끼면서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음성으로 여호와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9:4).  너무나 의외의 말씀에 사울이 크게 당황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9:5a). 그 대답의 음성이 사울을 거듭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5b);

2)   셋째, 창조주 여호와의 영광을 태양 빛보다 강한 빛으로 직면한 사울은 여호와의 음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이 세상에 나사렛 예수로 오신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인 체험과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각성은 오로지 랍비 사울에게만 한정이 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사울이 당시 동행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사울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대화하는 이야기만 들었지 그 강력한 영적인 빛을 보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9:7). 당연히 그들의 눈은 멀쩡한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직면한 사울의 눈만 사흘동안 멀어 있는 것입니다(9:8-9).

3)   넷째, 랍비 사울은 자신이 체험한 영적인 사건을 사도행전에서 두차례나 간증하고 있지만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 백성들이 별로 없습니다(9:3-22, 22:6-23). 그러나 사울은 그 놀라운 영적인 체험으로 말미암아 그의 유대교적인 신념체계가 한순간에 전부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박해하고 있던 나사렛 예수가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분신이었다는 사실이 여호와의 영광과 음성으로 증거가 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신론(神論)의 재정립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그것은 산술적인 유대교의 유일신론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라는 신비로운 삼위일체 하나님 이론으로 그의 신론이 옮겨가는 계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4)   또 하나 지적을 해야만 하는 것은 그의 구원론의 변화와 이방인 사도로서의 사명의 부여인 것입니다; 자신은 백성들 앞에서 모범적인 율법생활을 한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의인이며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여겼던 사울의 생각이 깨어져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유대교지도자들처럼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말았으니 그 죄가 너무나 큰 것입니다(딤전1:15). 그러므로 그의 고백은 이제 사람들 앞에서 율법생활을 잘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리스도의 대속의 구원론이 옳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죄인들이 그 사실을 믿고서 회개를 함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간주가 되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과 같이 회개한 성도들은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세상에 전하는 사도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4)  셋째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이방인 사도가 되어서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3:3-16);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3:10-16); 간략하게 설명을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사도 바울은 예수님처럼 복음전파의 공생애를 살아감으로써 그 고난의 공생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 곧 부활을 얻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면서 복음전파에 전력질주를 하고 있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시험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그 영생의 부활을 얻기까지 이방인 사도로 끝까지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셋째, 사도 바울은 자신만이 이방인 사도이며 복음의 전파자라고 결코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영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복음사역을 계승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사도적인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얻으신 그 부활을 자신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5)  로마의 교인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사도 바울 자신의 정체성이 다음과 같습니다(1:1-2, 5-6);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1:1-2),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1:5-6); 정체성은 신분과 사명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바울은 자신의 신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1:1a);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여 지금은 성령님과 함께 영적으로 바울 자신에게 임재하여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는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16:6-7). 그러므로 바울에게 물으면 그의 멘토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시키시는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그의 종인 바울의 사명인 것입니다.

2)    둘째, 바울은 예수님의 종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1b-2); ①먼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와 목적이 히브리정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1:2).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르면 메시아는 이 세상을 구원하고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의 죄짐을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신다는 것입니다(53, 1:29).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인 것입니다(1:1b-2). ②이제 그리스도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의 소식을 온세상에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의 사명인 것입니다(24:44-48). 그것은 그 옛날 하나님의 복음을 예언으로 전했던 선지자들의 뒤를 잇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큰 차이는 사도들은 선지자들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성취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온세상에 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24:44-45).

3)    셋째, 그러한 신분과 사명은 바울 자신만이 아니라 이 편지를 받아서 읽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1:5-6); 결국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도 자신처럼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복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온세상에 전하는 사도적인 삶을 살아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6)  넷째 질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1:3-6, 16:25) 구세주를 보내신다는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1:1-3);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1:1b-3); 그 의미를 간략하게 풀이하여 봅니다;

1)   첫째, 하나님의 복음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2)   둘째, 그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성취인 것입니다.

(7)  하나님의 복음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1:4-6);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1:4-6); 조금 풀이를 해봅니다;

1)    첫째,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 복음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 사실을 믿고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2)    둘째,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의 영으로 무덤에서 살려 내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제는 모든 믿는 자들의 주인이 되시며 세상의 권세를 능력으로 장악하셨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28:18-20).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3)    셋째,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며 그리스도가 얻은 그것을 자신들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나의 복음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음;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16:25-26a).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예정이 된 자신의 삶이 바로 사도 바울에게는 나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모든 성도들도 나의 복음과 같은 신앙고백이 있기를 그가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사도 바울이 작성한 서신서 로마서가 로마시에 있는 자생적인 교회에 보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사본이 널리 초대교회에 회람이 되고 있음)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이라고 넓게 보는 것보다는 여기서는 로마교회에 한정하여 그들을 칭찬하는 것으로 보임. 그들 로마교인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통하여 이미 이야기를 듣고 있기 때문임). 9. 내가 (창조주 여호와)아들(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함, 5:19)복음 안에서(여호와의 복음이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타나고 있음.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그 아들 그리스도의 복음이 동일한 진리임을 증거하는 분이 바로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심, 14:16-17, 16:13-15)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사도 바울은 자신의 심령속에 성령님이 성전을 삼고 계시며 그 안에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임재하여 함께 내주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있음. 그러므로 31체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은 영생의 천국에 이미 영적으로 들어간 자임, 5:24, 11:26, 14:16-20, 고전6:19-20, 8:1-4, 16-18, 37-39)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로서 그들을 만나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임),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아직까지 로마시를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임).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성령세례와 충만을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임)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구약인 히브리정경에서 예언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뿌리부터 체계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성도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것임, 1:4. 사도 바울에게서 체계적인 복음을 배운 의사 누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임),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말씀의 뿌리가 확실한 체계적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사도 바울이 로마시를 방문하지 못했지만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지역에 벌써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많이 세웠음을 설명하고 있음, 16-20)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교육도시 다소성에서 태어난 유대인 교포 출신 사도 바울이기에  그는 헬라 학문과 철학을 배운 헬라인들이 문명인이고 그러하지 못한 바깥세계의 사람들은 미개한 야만인이라고 하는 재래적인 이분법에 익숙한 것임)내가 (대속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빚 곧 그들에게 만민구원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는)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체계적으로)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사도 바울이 과거 유대교인이었던 랍비 사울 시절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기독교인들을 대적하였음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음, 8:1, 22:3-4, 딤전1:15),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영적으로 만난 이후 31체 여호와의 내주 역사하심을 깨닫고 보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성립되었기에)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시리아 안디옥교회가 설립되고 그곳에서 사도 바울이 이방인선교사로 파송이 되어 서방선교에 나서고 있으므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5: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세상적인 이치와 상식을 믿은 것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었기에 그것이 의로 여긴 바 된 것임. 신학적으로 이신칭의, 以信稱義임) 함과 같으니라(그 복음을 로마의 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은 것임, 28:16, 30-31)”(1:8-17); 사도 바울이 자생적인 초대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로마시에 들어가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는 체계적인 복음의 일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2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사도 바울이 작성한 서신서 로마서가 로마시에 있는 자생적인 교회에 보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사본이 널리 초대교회에 회람이 되고 있음)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초대교회의 모든 성도들이라고 넓게 보는 것보다는 여기서는 로마교회에 한정하여 그들을 칭찬하는 것으로 보임. 그들 로마교인들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통하여 이미 이야기를 듣고 있기 때문임). 9. 내가 (창조주 여호와)아들(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함, 5:19)복음 안에서(여호와의 복음이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타나고 있음.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과 그 아들 그리스도의 복음이 동일한 진리임을 증거하는 분이 바로 진리의 보혜사 성령님이심, 14:16-17, 16:13-15)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사도 바울은 자신의 심령속에 성령님이 성전을 삼고 계시며 그 안에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임재하여 함께 내주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있음. 그러므로 31체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은 영생의 천국에 이미 영적으로 들어간 자임, 5:24, 11:26, 14:16-20, 고전6:19-20, 8:1-4, 16-18, 37-39)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로서 그들을 만나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임),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아직까지 로마시를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임).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성령세례와 충만을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임)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구약인 히브리정경에서 예언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뿌리부터 체계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성도들의 믿음을 확고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것임, 1:4. 사도 바울에게서 체계적인 복음을 배운 의사 누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임),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말씀의 뿌리가 확실한 체계적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사도 바울이 로마시를 방문하지 못했지만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지역에 벌써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많이 세웠음을 설명하고 있음, 16-20)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8-13); 

1)   다음 질문에 대하여 그 해답을 구해보는 형식으로 알기 쉽게 풀이하여 보고자 합니다;사도 바울은 로마시에 있는 초대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알고 있으며 그들을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1:7-13, 15:22-24, 19:21)” 먼저 사도 바울이 자생적인 로마교회에 대하여 알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봅니다(1:7-9, 18:1-4);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1:7-9)라는 구절에 대한 풀이를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2)   첫째, 로마시에는 사도들이 아직 복음전파를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교회를 개척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서신으로 문안을 한다는 것입니다(1:7).

3)   둘째, 로마시를 방문한 적이 없는 사도 바울이 로마시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생활에 대하여 전해 듣고 있는데(1:8) 그 이유는 그가 고린도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18:1-2a). 그때가 주후 50년대초인데 그들 부부는 로마시에 있는 교회에 출석을 하다가 주후 40년대 후반에 발생한 로마시에서의 유대인 축출조치에 따라 그리스의 고린도로 건너와서 천막제조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18:2b-4).

4)   셋째, 자생적인 로마시의 초대교회는 본래 유대인교포들과 로마시민들이 함께 세운 개척 교회로서 그 믿음이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그렇지만 글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축출령에 따라 로마인들만이 남아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 점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1:9).

5)   다음에는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를 방문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1:10-13, 15:22-24, 19:21);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10-13)라는 구절풀이에 해당합니다.

6)   첫째, 사도 바울은 로마시를 방문하여 그곳의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체계적인 지식을 전해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견고하게 되면 서유럽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교회의 역할을 능히 수행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1:10-12). 참고로, 사도 바울은 이방인 사도로서 헬라세계와 로마제국에 두루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동안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시작하여 소아시아와 데살로니가 그리고 그리스 반도에 이르기까지 대도시를 중심으로 거의 복음을 전파하였으므로 이제는 이태리의 로마시와 그 이서(以西)지역에 대하여 마지막 선교활동을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19:21, 15:22-24).

7)   둘째, 특히 로마시는 로마제국의 수도이며 제국의 권력과 부의 중심이기 때문에 그곳의 교회는 그 영향력이 큰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그곳을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깊이 있게 가르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스페인의 다시스에 이르는 서유럽 지역 전체에 대한 선교여행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아직 열리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9:21, 15:25-28). 따라서 그는 그 일을 위하여 미리 로마교회에 복음을 적은 이 서신서를 뵈뵈 편으로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1:10-13, 16:1-2).

(2)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교육도시 다소성에서 태어난 유대인 교포 출신 사도 바울이기에  그는 헬라 학문과 철학을 배운 헬라인들이 문명인이고 그러하지 못한 바깥세계의 사람들은 미개한 야만인이라고 하는 재래적인 이분법에 익숙한 것임)내가 (대속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빚 곧 그들에게 만민구원의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는)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체계적으로)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사도 바울이 과거 유대교인이었던 랍비 사울 시절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기독교인들을 대적하였음을 은연중에 밝히고 있음, 8:1, 22:3-4, 딤전1:15),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영적으로 만난 이후 31체 여호와의 내주 역사하심을 깨닫고 보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성립되었기에)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시리아 안디옥교회가 설립되고 그곳에서 사도 바울이 이방인선교사로 파송이 되어 서방선교에 나서고 있으므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5: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세상적인 이치와 상식을 믿은 것이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었기에 그것이 의로 여긴 바 된 것임. 신학적으로 이신칭의, 以信稱義임) 함과 같으니라(그 복음을 로마의 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은 것임, 28:16, 30-31)”(1:14-17);

1)   역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하여 그 해답을 구하는 것으로 알기 쉽게 풀이를 해보고자 합니다;사도 바울이 이방인 사도로 그리스도의 천국복음을 구원의 진리라고 굳게 믿고서 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요?”(1:14-17)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은 주님께 빚진 것을 이방인에게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1:14-15);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14-15). 조금 풀이를 해봅니다;

2)   첫째, 하나님의 복음을 모르고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했던 자신과 같은 죄인을 회개시키고 이방인 사도로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평생 갚을 길이 없는 엄청난 사랑과 구원의 빚을 지고 있다고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22:19-21). 둘째, 그 받은 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는 방법이 남은 인생을 다 바쳐서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면서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복음에 대하여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1:14). 셋째, 그 일을 더욱 힘차게 하기 위해서는 로마제국의 수도에 자리를 잡고 있는 로마교회를 방문하여 그곳 성도들을 복음으로 견고하게 하여 서유럽에 대한 선교의 기지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1:15).

3)   그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공의와 생명구원의 능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6-17);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6-17);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4)   첫째, 선민 이방인 상관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온세상에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풀이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옛날 랍비 사울이었을 때에 유대교리를 지나치게 신봉하여 선민만의 구원사상과 메시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의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이제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만물과 만민을 창조하셨기에 선민 이방인 구별하지 아니하고 회개하는 자들을 모두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구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일한 구원의 진리라고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둘째, 선민 이스라엘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들만이 성막과 성전 그리고 속죄의 제사에 관한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따라 선민들처럼 속죄의 제사를 번제단에서 드리지 아니하는 자들은 모두 죄 사함과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온전한 속죄의 제물로 스스로 희생하였기에 그 사실을 믿고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자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과 칭의의 은혜를 얻을 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성전제사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고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창조주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의로운 자와 그러하지 못한 자라는 새로운 이분법이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임을 말하고 있는 대목임, 22:12-18),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피조세계에는 창조주 여호와의 존재와 그 역사섭리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임).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불신자들에게도) 보이셨느니라(자연세계를 주관하며 운영하시는 여호와의 보이지 아니하는 손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할 때에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가 있다는 것임. 일종의 자연계시인 것임).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사람들의 영성과 이성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1:9-12, 3:16-21),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자연의 운행법칙을 생각하면 금방 여호와의 역사하심을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임, 38:31-38).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창조주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는 이기적인 욕심과 세속적인 소원성취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마침내 포악과 음행과 남색에 빠지게 되는 것임, 6:11-13, 19:4-9, 20:3-7, 32:1-6).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거짓의 아비 마귀의 말을 듣고 우상을 섬기며 음행에 빠지는 것임, 8:44, 25:1-2).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여호와께서 손을 떼시고 버려버리는 그것이 바로 영적인 죽음인 것임, 7:4, 11:31-32),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레즈비언의 사회),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게이의 사회)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패역함이 무엇인지 그들의 양심과 하나님의 심판이 증거하고 있음, 19:5, 24-25, 32:20).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여호와께서 손을 떼어버리신 그것이 멸망의 길임.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들려오지 아니하는 그곳이 암흑의 땅임, 9:1-2)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이상 10가지는 불의와 불법을 행하는 자이므로 사회적으로도 제거의 대상). 30. (그리스도를) 비방하는 자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그리스도를) 능욕하는 자요 (창조주 앞에 세상적인 지혜와 권력을 내세우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사람의 눈을 속이면 하나님이 눈도 속일 수가 있다고 믿고서) 악을 도모하는 자요 (5계명을 위반하여)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이상 6가지는 그리스도를 대적한 바리새인 곧 외식적인 신앙인들의 특징과 같음).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어리석은 백성들 4가지 행태임). 32.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패역한 자, 32:20)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부정한 일을 행하고 패악을 즐기는 그들 사이에서도 끼리끼리 문화가 성행하고 있는 것임)”(1:18-32); 사도 바울이 문명인과 야만인으로 구별하고 있는 세속적인 사고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창조주 여호와의 뜻을 저버리고 있는 자들이 더욱 근본문제라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하여 두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창조주를 부인하는 어리석음을 자연계시를 가지고 증거하며 또 하나는, 여호와가 제멋대로 살도록 버려버린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각각 살펴보고자 합니다.

(1)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창조주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의로운 자와 그러하지 못한 자라는 새로운 이분법이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임을 말하고 있는 대목임, 22:12-18),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피조세계에는 창조주 여호와의 존재와 그 역사섭리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임).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특히 불신자들에게도) 보이셨느니라(자연세계를 주관하며 운영하시는 여호와의 보이지 아니하는 손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할 때에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가 있다는 것임. 일종의 자연계시인 것임).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사람들의 영성과 이성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1:9-12, 3:16-21),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자연의 운행법칙을 생각하면 금방 여호와의 역사하심을 깨달을 수가 있다는 것임, 38:31-38).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창조주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는 이기적인 욕심과 세속적인 소원성취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마침내 포악과 음행과 남색에 빠지게 되는 것임, 6:11-13, 19:4-9, 20:3-7, 32:1-6).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거짓의 아비 마귀의 말을 듣고 우상을 섬기며 음행에 빠지는 것임, 8:44, 25:1-2).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1:18-25); 다음과 같이 문답형식을 빌려서 그 의미를 파악해봅니다;

1)   하나님께서 인생과 자연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그 역사를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 수가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요?(1:18-20)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두가지 방법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보고자 합니다(1:18-19);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1:18-19); 풀이를 해봅니다;

2)    첫째,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불의를 행하는 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역사적으로 심판을 하셨는데 그 근거의 하나는 그들 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본능적으로 이미 심어 두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18-19a). 여기서 사람들에게 선험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은 세가지입니다; ①첫째가 양심이고, ②둘째가 직관이며, ③셋째가 영적인 존재와의 교제의 능력인 것입니다. 

3)    둘째,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말씀으로 또는 음성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주셨는데 그 기록물이 히브리정경이며 또한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대한 전승들인 것입니다(1:19b). 그 가운데 사도 바울과 성도들의 관심은 어떻게 심판 가운데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관심에 답을 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진술하고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4)    다음으로는, 자연에 계시가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1:20) 그 점을 알아보겠습니다;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20);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5)    첫째, 피조물들이 창조주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는 계기는 자신들의 불완전함과 유한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인 것입니다(1:20a). 부모가 자식들에게 그리고 조상들이 자손들에게 완전한 인생과 무한한 생명력을 주고 싶어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창조주가 아니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제4장 말미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아담의 형상을 닮은 셋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mortal body’라는 의미를 가지는 에노스라고 부르면서 영생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부디 영생의 구원을 달라고 간구하였다는 것입니다(4:26).

6)    둘째, 유한한 인간이 절대권력자로 군림하면서 신과 같은 무한한 장수를 누리고 영원한 영광을 과시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이 허망한 역사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생을 구가하는 신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에 동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1:20b).

7)    그 다음에 나타나고 있는 큰 질문입니다;여호와 신앙을 버린 자와 무신론자들의 공통적인 타락상이 무엇이라고 사도 바울이 기록하고 있는가요?”(1:21-25) 먼저 사도 바울이 여호와 신앙을 버린 자의 비극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1:21-23, 20:1-6, 32:1-10);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1-23);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8)    첫째,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고 있지만 여호와신앙을 떠나고 있다는 것입니다(1:21). 그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는 제멋대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세상적인 복락을 누리는 것이 훨씬 나은 인생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9)    둘째, 그렇게 여호와신앙을 버리게 되면 다음과 같은 비극을 경험하게 됩니다; ①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추구한 결과가 허망하게 됩니다. ②세상적인 지혜를 추구한 결과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영적인 안목과 분별력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③만만한 우상을 만들어 섬기면서 소원성취와 성공을 구복신앙으로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십계명의 정신을 잊어버리고(20:1-6)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축제를 벌이면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잘못 섬긴 우상문화의 비극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32:1-10).

10)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창조주를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는 무신론자들의 비극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1:24-25);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1:24-25); 풀이를 해봅니다; 먼저 무신론자들의 특징과 그들이 직면하는 비극이 다음과 같습니다;

11)  첫째, 무신론자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진리를 부인하고 사람의 진리로 대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자연은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로 섭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과 사람들의 지혜로 경영이 된다고 하는 교만한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12)  둘째, 하나님이 주신 영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한 결과 사람의 가치를 물질적인 측면에서 계량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육체적인 향락을 추구하고 비윤리적인 성행위가 만연하고 마는 것입니다.

13)  셋째, 물질적인 세상과 육신적인 세상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서 세상적인 성공에 도취가 되어 살아가고 있으므로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긴 무신론자들의 죄를 만물의 주인이시며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결코 용서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2)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여호와께서 손을 떼시고 버려버리는 그것이 바로 영적인 죽음인 것임, 7:4, 11:31-32),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레즈비언의 사회),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게이의 사회)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패역함이 무엇인지 그들의 양심과 하나님의 심판이 증거하고 있음, 19:5, 24-25, 32:20).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여호와께서 손을 떼어버리신 그것이 멸망의 길임.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들려오지 아니하는 그곳이 암흑의 땅임, 9:1-2)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이상 10가지는 불의와 불법을 행하는 자이므로 사회적으로도 제거의 대상). 30. (그리스도를) 비방하는 자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그리스도를) 능욕하는 자요 (창조주 앞에 세상적인 지혜와 권력을 내세우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사람의 눈을 속이면 하나님이 눈도 속일 수가 있다고 믿고서) 악을 도모하는 자요 (5계명을 위반하여)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이상 6가지는 그리스도를 대적한 바리새인 곧 외식적인 신앙인들의 특징과 같음).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어리석은 백성들 4가지 행태임). 32.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패역한 자, 32:20)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부정한 일을 행하고 패악을 즐기는 그들 사이에서도 끼리끼리 문화가 성행하고 있는 것임)”(1:26-32); 역시 문답형식을 빌려서 설명을 해봅니다;

1)    첫째 질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심판하고 계시는가?(1:26-28)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진리를 버린 그들을 ()진리대로 살아가도록 내어버려 두십니다(1:26-27);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1:26-27); 간략하게 풀이를 해봅니다;

2)    첫째, 어떤 남녀관계와 부부생활이 정상적이며 하나님의 진리인지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알기 쉽게 창세기 제2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결혼과 가정제도로 설명하십니다(2:20-25). 둘째, 그런데 여호와신앙을 버린 자들과 무신론자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자를 모두 아내로 취하게 되는 약육강식의 사회를 만들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일부일처제의 아름다운 가정제도가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6:2-5). 그 결과 노아 시대에 전면적인 홍수심판이 도래한 것입니다(6:7)

3)    셋째, 오늘날 성적인 타락과 가정의 파괴는 그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악하게 되어 육체적인 부끄러운 욕심이 남녀구분과 정상적인 성생활을 완전히 파괴하고 만 것입니다. 거짓인 비진리가 진리를 쫓아내듯이 비정상적인 남녀관계가 정상적인 남녀관계를 모두 뛰어넘고 말았으니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너무나 비극적인 퇴폐사회의 모습인 것입니다(1:26-27).

4)    그 다음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있는 무신론자들이 당하고 있는 개인적인 비극과(1:28) 사회적인 비극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습니다(1:29-32). 첫째,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라고 사도 바울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한마디로,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가 바로 무신론자(無神論者)입니다. 그렇게 그 마음속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상실하고서 제마음대로 자신의 탐욕과 정욕대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간 자로서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5)    둘째, 무신론자들이 만든 사회의 비극적인 모습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악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1:29-32).

6)    나름대로 분류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무신론자들의 마음속에 가득한 것이 다음과 같습니다; “불의, 추악, 탐욕, 악의 등입니다”(1:29a). ②사회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그들의 악행이 다음과 같습니다;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1:29b-30a). ③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1:30b);

7)    ④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버젓이 다음과 같은 악행을 일삼고 있습니다;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1:31). ⑤끝으로, 끼리끼리 문화가 성행하여 서로를 칭찬하며 의롭다고 인정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지 아니하며 집단적인 이익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설혹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1:32).

결론적으로,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에 불과하지만 코로 영적인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받아 들이고 호흡함으로써 살아 있는 영혼을 가진 인간이 되어(1:26-27, 2:7) 만물의 영장(靈長, 영적인 어른) 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청지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1:28-31, 2:15-17).

그러므로 사람이 만물의 영장으로 살아가며 계속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세상을 다스릴 있는 관건은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을 계속 받아들일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모세는 선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결을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으로 전하면서 그것을 요약하여 먼저 알기 쉽게 십계명으로 정리를 해주고 있습니다(20:1-17).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론으로서 2계명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20:4-6). 마디로, 육신적인 것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는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이방인인 로마시의 성도들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1:23). 다음에는 알아 듣기 쉽게 본문의 말씀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1:24-27). 대강은 사람의 육체를 하나님이 주신 영혼보다 사랑하는 자가 받게 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육신적인 것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는 사람의 육체를 탐하는 마음의 정욕이 발동하게 됩니다. 그에 따라 정욕적인 안목으로 다른 사람의 육체를 탐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1:24). 육체 안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이 주신 영혼의 고귀함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1:25).

(2)   둘째, 육신적인 탐욕에 눈이 멀게 되어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질서를 가정생활에서부터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깨어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남자들이 남색을 하게 되고 여자들이 여색을 밝히게 됩니다(1:26-27a). 그것이 하나님의 인과응보입니다(1:27b).

사도 바울은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시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전통적인 헬라인과 야만인이라고 하는 이분법이 아니라 이제는 창조주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과 그러하지 못한 사람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탐욕에 눈이 멀어 우상을 섬기며 쾌락에 탐닉하고 있는 인간들이라는 새로운 이분법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2천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21세기의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업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구별보다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와 그러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쾌락과 권력에 취하여 살아가는 자와의 구별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면 영생의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되지만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며 제멋대로 살아간 자는 영원한 멸망 가운데 들어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취지의 말씀을 서두로 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시의 성도들에게 대하여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교리서 중의 교리서로 불리고 있는 로마서의 내용을 공부하시면서 31 하나님과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고 천국에서의 영생을 바라보며 전진 전진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