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희망성취사역(막 13:1-13)(조동호 목사의 글)
종말의 특징
기독교 종말의 특징들 가운데 첫 번째는 종말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희망과 보상이 성취되는 시점이란 점이고, 두 번째는 그 종말이 ‘이미 여기’에서 시작되었고 맛보아지고 있다는 점이며, 세 번째는 그 종말이 지복(至福)의 시작점이란 점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종말이 재앙과 저주를 받는 불행의 시작점이란 점이고, 그 재앙과 저주가 이미 여기에서 시작되었고 맛보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말을 두려워한다.
성서는 아주 분명하게 환난과 재난과 재앙을 구별한다. 환난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형태로 겪어왔고, 때로는 극심한 박해와 탄압, 곧 대환난(계 7:14)에 직면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환난은 믿음의 사람들이 희망성취와 보상을 받기 위한 연단이지 재앙이나 저주가 아니다.
재난은 모든 피조물이 공통으로 당하는 재해이다. 재난은 환난과 재앙 모두에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형태로 직면한다. 재난은 교통사고, 화재, 테러, 전쟁처럼 사람에 의한 재해일수도 있고, 태풍, 홍수, 지진, 화산폭발, 가뭄처럼 자연재해일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징계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만일 하나님의 징계에 의한 재난이라면, 그리스도인은 당하지 않아야 옳다. 징계 받아야할 잘못이 없는데도 재난을 당했다면, 그 재난은 인재(人災)나 자연재해로써 피조물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삶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면서 재난도 겪고, 믿음 때문에 환난과 박해도 받지만, 재앙과 저주는 받지 않는다.
재앙은 형벌과 저주에 해당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상과 축복의 대상이라면, 악한 사람들은 형벌과 저주의 대상이다. 주님의 재림은 악한 사람들에게 재앙이 최종적으로 이뤄지는 완결시점이다. 이뿐 아니라, 악한 사람들에게 재앙은 이미 여기에서 시작되었고 맛보아지며 경험되어진다.
성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끝까지 견디고 이길 것을 권면하면서 희망성취와 보상을 약속하고 있다. 그 약속이 바로 예언에 속한다. 대표적인 예언이 주님의 재림이다. 주님의 재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성취와 보상이 최종적으로 이뤄지는 완결시점이다.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성취와 보상은 이미 여기에서 시작되었고 맛보아지며 경험되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이 늘 깨어 기도하고 근신해야할 이유는 환난을 견디고 이겨야하기 때문이요, 무서운 재난과 재앙을 당하지 말아야하기 때문이다.
예언의 목적(1)
마가복음 13장의 예언은 가까운 미래로부터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시공간에서 이뤄질 사건들, 곧 그리스도의 나라의 출범, 기독교박해, 예루살렘의 멸망, 주의 재림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뒤섞이고 압축된 권면이다. 그것은 마치 지리산노고단에 선 사람이 광활한 산맥의 수많은 산봉우리들을 한 눈에 보는 것과 같아서 아주 멀리 있는 산봉우리조차 가깝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출범(주후 30년)과 네로의 박해(주후 64년)와 예루살렘의 멸망(주후 70년) 그리고 주의 재림이 임박한 미래처럼 예언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예언의 목적은 먼 미래에 성취될 시기를 밝히는데 있지 않고,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슨 결단을 내려야하는지를 권면하는데 있다.
성서의 기록목적과 성서에서의 예언의 목적은 지금 여기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개와 권면 및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미래보다는 현재를 더 중시하였다.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에서 떠나 재난이나 재앙을 겪고 있거나 혹은 겪게 될 당신의 백성에게 회개운동을 펼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근거로 미래에 성취될 희망을 예언함으로써 회복운동을 펼쳤다. 또 믿음 때문에 환난을 겪거나 혹은 겪게 될 당신의 백성이 미래에 받을 보상을 예언함으로써 위로하였고, 끝까지 믿음을 잃지 말고 반드시 이기라고 권면하였으며, 믿음을 이미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그들에게 닥칠 재앙을 예언함으로써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경고하였다.
이 같은 맥락에서 마가복음 13장의 예언은 그 목적이 미래에 있을 사건들에 있지 않고, 제자들의 훈련, 곧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깨어 기도하고 근신해야할 것을 권면하거나 경고하는데 있다. 그 증거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9절), “너희는 삼가라”(23절), “이 세대가 지나기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30절),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33절)는 말씀들이다. 유비무환이란 말이 있듯이, 미래에 닥칠 재난을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는 일은 쓸데없는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는 기우(杞憂)가 아니라,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쓰였다. 성서내용의 수신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구약성서는 유대교인들을 위해서, 신약성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쓰였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회개와 권면 및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의 예언활동은 회개운동이었고, 회복운동이었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회복하실 뿐 아니라, 더 크고 원대한 계획까지 갖고 계시다는 것이 구약과 신약 모두의 예언이다.
예언의 목적(2)
예언의 또 다른 목적은 옛 질서를 새 질서로 바꾸기 위한 것이었다. 바벨론유배를 전후하여 활동했던 예언자들의 예언의 핵심은 제2모세, 곧 그리스도의 오심과 유다왕국의 회복에 관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이들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지만, 실상은 옛 언약에 기초한 유다왕국 대신에 새 언약에 기초하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들어설 것에 관한 예언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 행하신 사역과 말씀들은 모두 옛 질서를 새 질서로 바꾸시는 것들이었다. 그 첫 번째 일이 주후 30년 4월 3일 월요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말라죽게 하신 것이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구약(율법)에 기초한 유대교를 상징한 것이었고, 그것은 이제 죽고, 그 대신에 열매 많은 무화과나무로 교체되어야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열매 많은 무화과나무는 신약(복음)에 기초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한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일이 같은 날인 월요일에 예루살렘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서 이뤄지고 있던 부정한 상행위들을 몰아내고 이방인의 뜰을 기도하는 장소로 돌려놓으신 것이었다. 성전에서의 기도는 미문 안쪽 여성의 뜰이나 이스라엘의 뜰에서 ‘베라코트’(berakhot)라 불리는 기도문들을 낭송하는 것이었다. 또 제사장의 뜰에서 바쳐지는 희생제사도 짐승의 피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들은 머지않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신령과 진실로 드리는 기독교예배로 교체되어야할 것들이었다.
예수님께서 월요일에 이어 화요일에도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신 것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어야하는 이유처럼, 율법인 옛 언약의 또 다른 상징인 “이 산”이 바다로 사라지고, 복음인 새 언약이 사라진 자리를 새것으로 채워야했기 때문일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새것을 “더 좋은 언약”이라고 하였고, 예수님을 “더 좋은 언약의 보증”(히 7:22) 또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히 8:6)라고 하였다. 누가는 예수님이 더 좋은 언약의 보증과 증보가 되시기 위해서 성령 충만하시고 늘 기도하셨음을 피력하였다.
포도원 소작농부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못된 소작농부들은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을 돌려서 말씀하신 것이다. 12장 9-10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겼던 정치와 종교의 청지기역할을 빼앗아 다른 이들, 곧 그리스도의 일군들에게 넘기겠다는 뜻이다. 건축자들은 예루살렘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이요, 버림당한 돌은 예수님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셨다(엡 2:2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새 언약, 곧 신약성서에 기초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힘써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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