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斷想)-교회의 정치화를 우려하며-(양인국 목사의 글)
최근 몇 년동안 그리스도인들의 대형 집회의 수가 더해가고 있다. 물론 모든 집회가 동일한 목적으로 열리는 것은 아닐지라도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집회를 어떤 목적으로 여는지에 대하여 말해 주는 주제를 언급하고는 있지만, 주제 이상으로 힘을 주어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 집회에 참여자 수가 얼마인지이다. 집회의 주체자들이 수(數)를 강조하는 것은 또 하나의 힘에 대한 과시는 아닐는지?
세상의 특징을 말한다면 힘의 지배라고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힘을 추구하는 것이다. 만일 교회가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대형집회를 여는 것이라면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세상이든 교회든 힘이 지배하는 곳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알고 있다. 그것은 분열과 다툼이다. 왜냐하면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고자 하는 곳에는 이기고자 하는 자와 방어하고자 하는 자들 사이에 대결구도가 생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님은 누구보다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대적들을 멸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힘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셨다. 독일의 신학자 칼하임은 주님의 이와 같은 힘의 포기를 하나님 나라의 특징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힘의 대결이 있는 곳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을 수밖에 없고, 패자는 승자의 힘에 의하여 억압을 당할 수밖에 없지만 그 억압은 오히려 승자에 대한 내적 방항심을 불러 일으키고 그 반항심은 후에 자신이 더 큰 힘을 가졌을 때 자신이 승자로부터 받았던 것 이상으로 그를 억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힘이 재배하는 곳에서는 구조적으로 보복에서의 더 큰 보복으로의 악순환이 무한소급 되어 결국은 모두의 삶을 황폐하게 하고 결국은 모두를 넘어지게 한다. 칼 하임은 주님께서 힘을 포기하시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이와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모두에게 더불어 샬롬을 누리는 선순환의 구조를 열어 주신 행위이고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본질임을 말하였다.
최근 동성애 그리고 성차별금지법이 교계 안에 논란이 되고 있고 이것을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목수리가 높아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 비성경적이라고 반대할 수 있지만, 비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도 동일한 생각일까? 이와 같은 물음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세상은 그리스도인들만 사는 곳이 아니고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어느 한 편이 자신들의 생각만 주장하는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지만는가? 이처럼 세상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갈등은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보다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 갈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주신 길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만 주셨다는 것이다. 실례를 들면 하나님께서 동성애 금지의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주셨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째서 이렇게 하셨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율법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음으로 그들에게 율법을 줄지라도 지키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무지와 악행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변함없는 사랑을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계시의 수단으로 사용하심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믿음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이방인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와 어떠하심을 믿을 수 있도록 증거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실존을 믿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율법의 권위를 받아들일 것이고 또한 율법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신약에서 교회를 정의한 다음의 말씀에서도 동일한 사실을 찾을 수 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3)” 여기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을 지칭한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는 말은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을 세상에 계시하는 기관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즉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세상에 율법을 강요하거나 윤리적인 요구를 하기 위함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계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의 참 모습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힘을 과시하며 세상과 대립하는 것에서 드러나기보다는 오히려 의를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힘을 가지고 그 힘을 과시하며 세상을 지배하려고 한다면 교회는 세속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전자의 모습을 초대교회에서 볼 수 있고 후자의 모습을 중세 교회에서 볼 수 있다.
한 가지 부언하면 교회들이 대형 집회를 가질수록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교회가 세상에 요구하는 것을 스스로도 행하지 못하는 모순된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무엇을 강요하기 보다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묵묵히 실천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삶이라고 믿고 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정권이 바뀌고 환경이 변해도 계시의 말씀에 따라서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며 묵묵히 걸어간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교회로서 정체성을 갖게 될 것이고 또한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잠시 교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대형집회를 여는 모습을 보며 여기 단상(斷想)을 남겨놓는다.
2024. 10. 27. 서신교회 목사 양인국
[출처] 단상(斷想)-교회의 정치화를 우려하며-|작성자 good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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