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하나님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히브리서 저자의 설명”(히13: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6. 10. 01:55

제목; “하나님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히브리서 저자의 설명”(13:1-3)

설교일; 주후 2024 6 16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6 10일 월요일 작성)

 

성도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떠한 차이점과 또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그 차이점을 살펴보면, 한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신본주의(神本主義)를 말하고 있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인본주의(人本主義)입니다;

신본주의가 무엇인지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정의가 되어 있습니다;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29:13) 하시고”(15:5-9).

약간의 풀이를 더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면 그만이라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신본주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2)  둘째, 그와 같이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은 십계명의 정신(20:3-17)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3)  셋째, 창조주 여호와를 올바르게 섬기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돌보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셨듯이 모든 피조물에게도 똑같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4)  넷째, 그러므로 창조주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여호와를 섬기듯이 그렇게 사랑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이란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지 아니하고 있으면서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우선순위로 말하자면 신본주의가 먼저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인본주의로 발현이 되고 있다는 큰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공통점입니다.

요컨대,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는 하나님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말씀을 드리자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두가지 개념을 하나로 통일시켜 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이시며(4:6, 1:14) 태초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주관하고 계신다고 하겠습니다(11:27, 1:1-4).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통일성에 관하여 예수님이 마태복음 제22장에서 바리새인 율법선생에게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고로 그 구절을 옮겨서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2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綱領, 그물을 당기는 그물코처럼 그 요체가 되는 명령)이니라”(22:36-40).

 좀더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하나의 비유를 들어보자면 그것은 마치 부모님의 내리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다 같은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부모의 입장에서는 못나 보이고 돌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 자식이 가장 가슴이 아픈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를 한다고 하면 그 자식이 된 사람은 사회적으로 뒤쳐져 있으며 생계의 위협에 처해 있는 그러한 형제 곧 주님의 작은 자들을 자신같이 돌보는 것이 바로 부모를 사랑하는 방법인 것입니다(25:40).

그와 같은 맥락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의 삶의 모습에 대하여 오늘의 본문 히브리서 제13장 제1-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문에 들어오기 전에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진작에 그 앞부분 곧 히브리서 제12장 말미에서 벌써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12: 28-29). 그 대목을 우선 알기 쉽게 풀이를 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세상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결코 변하지 아니하는 영생의 나라를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성도들에게 주시기로 이미 결정하셨으며(12:28a) 그 사실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거듭 확인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22:28-30, 14:1-3, 17:24-26).

(2)  둘째, 그 약속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희생하신 예수님을 3일만에 영생의 몸으로 부활시키시고 40일 후에 감람산에서 스스로 승천하는 장면을 성도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24:44-53, 2:36, 1:16-17). 그리고 하나님의 영을 성령님으로 성도들에게 보내어 그들의 심령속에서 영원히 내주 역사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사실을 믿고 영적인 삶을 끝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고 있습니다(14:16-20, 26-29, 1:8, 2:1-4, 31-33, 8:1-2, 고전6:19).

(3)  셋째, 그와 같은 영생의 은혜를 받고 이제는 성령님과 함께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므로(12:28b) 성도들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22:12) 예수님을 본받는 사도들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을(12:1-2)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12:28c). 만약 그러한 신실한 믿음의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2:29).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렇게 이론적인 이야기를 마쳤으므로 이제 마지막 장인 제13장에 들어와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성도들의 실천적인 섬기는 삶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세가지를 시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첫째, 형제사랑하기를 계속해야 합니다(13:1).

(2)  둘째,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13:2).

(3)  셋째, 갇힌 자와 학대 받는 자에게 마음을 같이하여 그들을 돌보아 주라는 것입니다(13:3).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말씀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1. 형제사랑하기를 계속하고”(13:1); 두가지 질문을 가지고 본문말씀의 뜻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초대교회에서 형제사랑이 강조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사랑이 형제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초대교회 내에서도 형제사랑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    12사도 가운데 막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사도 요한이 그의 서신서에서 성도 간의 형제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요일2:10, 3:10-11, 14, 4:7, 16-21, 5:16, 요이1:6, 요삼1:6). 그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드시면서 그 자리에서 이른바 세족식(洗足式, 제자들의 발을 스승이신 예수님이 스스로 종이 되어 씻겨 주심으로 섬기는 리더십을 가르쳐준 것임)의 모범을 몸소 보이신 후에 친히 당부하신 내용이라고 그의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35).

2)    히브리서의 저자도 본문에서 형제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 내에서 성도들이 형제사랑에 있어서 실패하고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가르치셨는데(12:30-31) 그것이 성도들 사이에서도 실천이 되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2)  둘째, 초창기 뜨겁던 형제사랑이 식어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그 이유는 사사기 시대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발생한 일에 대한 결론을 맺고 있는 사사기 말미의 기록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25.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왕으로 모시고 그 말씀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함께 행동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들의 마음속에 각기 다른 왕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지파가 바로 자신들이 추구하고 있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각기 지파별로 이기적으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지파에 이익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형제 지파를 돌보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2)    초대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2사도를 파벌의 영수로 삼아 성도들이 편가르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초창기에는 오순절에 성령님의 강림과 임재의 역사가 크게 발생하여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중심으로 성도들이 한마음으로 뭉쳐서 공동체생활의 모범을 보였습니다(2:38-47, 3:1-10, 4:32-35). 그런데 그것이 얼마가지를 못하고 경제적인 문제로 본토 유대인 성도들과 교포출신인 헬라파 유대인 성도들 사이에 분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6:1). 그 위기를 사도들이 합심하여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헬라파 집사 7명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헬라파 유대인 성도들을 돕도록 조치하고 사도들은 말씀전파와 기도생활에 전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6:2-7).

3)    그런데 그 다음에는 더 큰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내에서 성도들이 자신들의 취향과 성격에 더 맞는 사도들을 선호하여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 옛날 12지파의 사사시대와 비슷합니다. 그와 같은 분열의 근본요인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이 명쾌하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2-3). 분열의 위기를 극복하고 교회의 통합을 이룩하자면 주님을 다시 자신들의 왕으로 삼고 그 말씀의 뜻을 쫓아 자신들의 의로움과 주의주장을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형제사랑을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13:1).

둘째로,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13:2);

(1)  구약인 히브리정경을 참조하면 생계의 위험에 처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그네를 도와주고 대접을 잘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관련구절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22:21-23). 선민들에게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셈족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함족의 제국 애굽에서 이방 나그네가 되어 당한 노예생활의 비참함을 생각하고서 너희들은 그렇게 이방 나그네에게 핍박을 행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2)    모세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웃사랑의 기본정신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10:17-19). 정의(正義,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는 자기 집단 내에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사회에서는 생계가 어려운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집단을 넘어서는 경우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집단 이기적인 정의(justice)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것이 바로 온 우주의 만인과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公義, righteousness, 모든 차별과 구별을 넘어서는 옳고 바른 도리)의 정신입니다. 그것을 인간세상에서 우선 국제적으로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방 나그네를 사랑하고 인간 대접을 해주는 것입니다.

(2)  생계의 어려움에 처하고 있는 자들이 고아와 과부들입니다. 때로는 생계가 어려운 레위인들도 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돌보고 먹고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이웃사랑이며 사회정의의 실현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관심은 선민이나 성도들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어떻게 잘 실천하고 있는가에 더 집중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초대교회에 선민 유대인 출신 성도 뿐만 아니라 이방인 출신 성도들이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자 그 문제가 부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당장 절실한 문제는 이방 나그네를 사랑하고 인간 대접을 해주듯이 그렇게 손님으로 알고서 대접을 잘하라는 것입니다(13:2).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렇게 하는 경우 이 세상에서 자신들도 구원을 얻게 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옛날 의 가족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을 잘 대접하였기에 천사들에 의하여 소돔 성의 심판 전에 구출이 된 사건이 창세기에 적혀져 있기 때문입니다(19:1-29).

셋째로,3. 너희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13:3);

(1)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은 금식기도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2번이나 금식하고 있으며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18: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금식기도라고 하는 방법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그 목적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40일 동안 금식을 하신 후에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면서 금식기도의 목적을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여호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뜻대로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모든 경건생활과 고행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4:1-11).

(2)  그와 같은 입장은 이미 선지자 이사야가 지적하고 있는 내용을 다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58:6-9).

(3)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와 같은 가르침에 대하여 더 깊이 묵상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본문에서 적고 있습니다; “3. 너희도 함께 갇힌 것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13:3);

1)    창조주의 공의를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모두 자식과 같으며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죄성(罪性, 죄의 속성, 7:17-24)을 가진 육신을 지니고 유한한 삶을 살고 있으므로 모두가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4:26).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아 회개하고서 거듭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은 아직 불신앙의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복음을 전해주고 그들을 돌보아 주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갇힌 자들과 학대 받는 자들이 바로 같은 육신을 가진 형제들이며 동일한 하나님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견해는 예수님께서 일찍이 가르쳐 주신 하나님사랑을 깨달아 이웃사랑을 실천하라”(12:30-31 의역)는 말씀과 그대로 맥을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실제로 자신이 갇힌 것처럼 마음을 같이 하여 돌보아 주며 사회적으로 학대를 받고 있는 백성들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그들의 멍에를 풀어주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가 온세상에 나아가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제자를 양육하는 것이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28:18-20, 24:45-49, 1:7-8). 그렇다면 그 일을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도들 사이에 그리고 성도가 아닌 사람들에 대하여 어떠한 신앙적인 자세를 견지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한마디로, 내부적으로는 형제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외부적으로는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며 특히 갇힌 자와 학대 받는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의 신앙 자세입니다;

그와 같이 실천하는 성도들이 영생의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견해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과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일치하고 있음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복음전파와 더불어 그와 같은 형제사랑과 이웃사랑에 더욱 힘쓰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