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사도 바울의 종말론과 성도들의 신앙자세”(살전4:16-18, 5:16-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6. 4. 16:14

제목; “사도 바울의 종말론과 성도들의 신앙자세”(살전4:16-18, 5:16-18)

설교일; 주후 2024 6 9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King’s birthday 이튿날 6 4일 화요일 작성)

 

주후 49년경 예루살렘에서 총회가 열리게 됩니다. 그때 구브로와 소아시아에 대한 제1  선교를 마치고 모() 교회가 있는 시리아의 안디옥에 돌아와 있던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그 회의에 참석합니다. 총회에서 두 사람은 구브로와 소아시아 선교의 과정과 그 성공적인 결과를 먼저 보고합니다.

동시에 후속사도인 두사람은 이방인 선교의 활성화를 위하여 한가지를 건의합니다.  그것은 앞으로 헬라인과 로마인 성도에 대해서는 유대인들이 강조하고 있는 할례와 율법생활의 준수를 그들에게 강요하지 아니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제안을 적극 옹호한 사도가 총회장을 역임한 베드로입니다(15:7-11). 그는 개인적으로 수년 전에 가이사랴를 방문하여 이방인인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의 식솔에게 전도하게 된 일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다음 3가지 사실을 명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첫째, 주님께서 환상을 통하여 율법에서 불결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생물을 먹으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10:11-14). 그 의미는 이방인을 불결하게 보지 말고 그들에게도 그리스도의 만민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라는 획기적인 가르침입니다(10:15-20).

(2)  둘째,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자(10:34-43) 그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죄사함의 은혜를 깨닫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10:44-46). 그에 따라 베드로는 동역자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물세례를 베풀게 된 것입니다(10:47-48).  

(3)  셋째,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이방인들에게 벌써 칭의의 은혜를 주시고 성령의 세례까지 허락하셨으므로 교회지도자들은 그들에게 물세례를 주고 교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예루살렘 총회장을 지낸 사도 베드로가 믿고 있습니다(15:8-9). 그러므로 그들에게 옥상옥(屋上屋)으로 유대교에서 강조하고 있는 할례와 율법생활의 준수를 강요하는 것은 무거운 굴레를 덧씌우는 폐해를 말하고 있다고 사도 베드로가 총회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15:10-11);

사도 베드로와 견해를 같이하고 있는 자들이 그의 뒤를 이어 총회장을 지낸 장로 야고보와 그 뒤를 잇고 있는 장로 시므온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동생인 장로 유다와 그의 사촌동생인 장로 시므온 두 사람이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제안을 적극 수용하고자 하는 사도 베드로의 의견을 지지함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총회에서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중요한 사항을 하나 만장일치로 의결하게 됩니다(15:13-29).

그 내용을 사도행전의 저자인 의사 누가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24. 들은 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유대주의자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예루살렘교회의 정식파견을 받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26. 사람을 택하여(이제 예루살렘총회는 우리의 공식입장을 전달하고자 정식으로 파견자를 정하여)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7. 그리하여 (예루살렘 총회의 공식의견을 전달하는 일꾼으로) 유다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목매어 죽인 것음행을 멀리할 지니라. 이에 스스로(그 의미를 깨닫고) 삼가면(그대로 실천하면) 잘되리라. 평안함(헬라어 ερήνη 에이레네, 히브리어 שָׁלוֹם 살롬)을 원하노라 하였더라”(15:24-29).

그에 따라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유다와 실라를 데리고 먼저 자신들의 모교회인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얼마후에 두사람은 그들이 이미 선교한 이방지역 곧 구브로 섬과 소아시아 남해안의 여러 도시를 재차 방문하고자 계획합니다(15:36);

그런데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수행원의 선택을 두고서 의견대립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반대하지만 사도 바나바는 자신의 생질인 마가를 이번에 다시 데리고 가고자 합니다(15:37, 4:10). 바울은 전번 소아시아 선교 당시에 제멋대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버린 마가를 다시 수행원으로 선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계속 주장합니다(15:38, 13:5, 13, 12:12, 마가인 요한, 여기서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임). 끝내 두 사도는 의견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사도 바나바는 생질 마가를 데리고 그들의 고향인 구브로 섬을 먼저 방문하고자 떠나갑니다(15:39, 4:36-37). 그와 달리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교회 출신인 선지자 실라를 데리고 함께 소아시아 남부의 지역을 재차 방문하고자 합니다(15:32, 40-41). 그 시기가 주후 49년말 아니면 50년초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때 의사 누가가 사도 바울의 주치의로서 함께 선교여행에 나선 것으로 보입니다(4:14, 딤후4:11, 1:24). 하지만 의사 누가는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지 아니한 채 상세한 사도 바울의 서방선교일지를 적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두가지의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4복음서인 요한복음에서 그 저자인 사도 요한의 이름이 별로 등장하지 아니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이름을 가급적 드러내지 아니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저자들의 겸손의 미덕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선교일지의 기록에 있어서는 주요인물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16:19, 25, 17:10). 따라서 제2차 선교여행에 있어서 소아시아 루스드라에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선택하여 수행원으로 삼고 있지만(16:1-3) 의사 누가는 가급적 디모데의 이름을 자주 기록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의사 누가는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 속에 수행원인 자신과 디모데가 포함이 되고 있음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습니다(16:11, 13, 16). 그렇다고 하더라도 꼭 필요한 경우에는 저자인 의사 누가가 정확하게 디모데의 이름을 사도행전에 적고 있는 것입니다(17:14-15).

하지만 끝내 의사 누가의 이름이 선교의 일꾼으로 사도행전에서는 기록으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의사 누가가 유대 땅에 밀파되어 있는 로마제국의 고급 정보원이었기에 음지에서 활동하는데 있어서 너무 익숙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1:1-4, 1:1-2).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사 누가가 사도 바울의 주치의로 동행하고 있기에 유럽에 대한 바울의 선교내용이 아주 정확하게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역시 의사 누가의 정보수집 능력이 탁월하고 로마제국에 대한 역사 및 지리에 대하여 박식한 인물이었기에 초대교회의 역사서인 사도행전에 있어서 서방선교의 기록이 풍성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능력에 있어서는 사도 바울도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제2차 선교 당시 사도 바울이 주후 51년경 고린도에서 기록하여 디모데 편으로 북쪽의 데살로니가 초대교회에 전달하고 있는 그의 초창기 서신서 곧 데살로니가 전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렵지 아니하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과 의사 누가는 대도시 고린도와 데살로니가에 있는 초대교회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당시 그리스반도에 있는 가장 큰 규모의 항구도시가 고린도이며 북부지역 마케도니아에 있는 가장 큰 항구도시가 데살로니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헬라의 학문과 로마제국의 세계관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과 의사 누가의 인식이 그 정도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소아시아 길리기아 주 다소 출신인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성장배경에 비추어 이미 유럽문명의 진수가 그리스반도의 남부 에게해에 있으며 그것이 큰 항구도시 고린도를 통하여 당시에도 소아시아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린도의 지리적인 가치를 십분 이해하고 있으며 일부러 그곳에 오래 체류하면서 현지인을 선교일꾼으로 양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쁜 선교일정을 쪼개어 무려 1년 반이나 성경공부반을 운영하여 선교일꾼을 육성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고린도의 지정학적인 가치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18:11).

따라서 의사 누가는 물론 디모데와 실라도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의 진수를 체계적으로 배우기에 열심입니다(18:5). 또한 현지의 젊은 성도들도 그곳에서 선교일꾼으로 양성되고 있는데 그 중에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 여집사로 불리고 있는 뵈뵈(Phoebe)라고 하겠습니다.

그녀는 고린도에 가까운 자신의 고향 겐그레아에 초대교회를 세웁니다(16:1). 그리고 유럽의 서쪽 끝까지 선교하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열망을 실천하고자 그의 편지를 가지고 가서 로마의 초대교회에 전달하기도 합니다(16:2).

그런데 의사 누가는 본래 시리아 안디옥 출신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안디옥 남쪽에 있는 페니키아의 문명에 상당히 익숙한 인물입니다. 그가 역사적으로 이해하기로는 유럽의 문명은 에게해 문명에서 시작이 되고 있으며 그것은 페니키아인들이 대해를 항해하면서 그 옛날 그리스 반도 남부의 작은 성읍 테베(Thebes)에 전해준 문명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후발 문명권인 그곳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발생하고 마침내 그 세력이 동진하여 유럽과 중근동에 헬라의 세계를 만들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 문명을 흡수한 로마제국이 천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의식에서 의사 누가는 주전 334년경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원정에 나서는 출발점인 마케도니아 왕국의 옛날 수도 펠라(Pella)의 위치를 눈 여겨 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고로,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를 살펴보면 그곳은 데살로니가에서 약간 내륙으로 들어가 있는 펠라입니다. 그리고 펠라 이전의 고대수도가 아이가이인 오늘날의 베르기나인데 그곳에 인접하고 있는 해안이 사도 바울 당시의 큰 항구도시 데살로니가입니다.

역사적으로 헬라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대 영웅 알렉산더 대왕이 펠라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부친 마케도니아 왕 필립2세가 그리스 반도를 전부 통일하고 말았기에 약관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대군을 이끌고 자신은 미지의 세계인 동방원정에 나서게 됩니다.

주전 334년에 수도 펠라에서 출발한 알렉산더 대왕은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이어서 시리아와 이집트를 점령합니다. 페르시아제국이 사력을 다하여 알렉산더의 군대를 물리치고자 했으나 끝내 패배하고 지상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내친김에 인도를 정복하기 위하여 원정에 나섰지만 북부지역 일부를 점령하는데 그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가 그만 열병에 걸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천하의 대()영웅도 지친 몸에 열병을 이기지 못하여 주전 323년에 30대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고 맙니다. 그때부터 그의 심복인 대장군들이 천하를 사분오열하여 서로 차지하게 됩니다. 크게 보아 본국인 ①마케도니아와 그리스, ②동방진출의 교두보인 소아시아, ③그리고 시리아와 이집트입니다;

그 가운데 시리아와 이집트를 차지한 대장군이 프톨레미입니다. 그가 주전 305년에 이집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건설합니다. 그러자 그의 부장 셀루쿠스 장군은 자신이 통치하고 있던 시리아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주전 301년에 셀레우코스 왕조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전 170년경 시리아의 세력이 커지자 가나안 땅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맙니다. 그렇지만 그 즈음 로마의 세력이 점점 동방진출에 나서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왕은 헬레니즘으로 단결하여 로마의 동진을 막기에 열심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섬기고 있는 변방 유대민족이 말썽입니다. 그 결과 주전 167년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4세 곧 에피파네스라는 별명을 가진 그가 예루살렘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를 잡아 제물로 바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서 늙은 제사장 맛다니아가 범 같은 5아들과 함께 독립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그는 다음해에 죽고 20여년의 힘든 독립전쟁을 수행하느라고 아들 4명이 차례로 희생되고 맙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 시몬이 마침내 시리아 군대를 물리치고 가나안 땅에 하스모니안 왕조를 주전 142년에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전 64년경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로마제국에 의하여 멸망을 당할 때에 가나안의 하스모니안 왕조 역시 비틀거리게 됩니다. 당시 하스모니안 왕조에 의하여 남부 이두매를 통치하고 있던 장군 안티파테르1세의 아들 안티파테르2세가 주전 47년에 로마에 의하여 유다의 행정관으로 임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주전 37년에 그의 아들 헤롯이 로마군대의 도움으로 하스모니안 왕조의 유다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고 헤롯대왕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레위인의 왕조가 완전히 끝장이 나고 마침내 로마제국의 괴뢰정권인 이두매 출신의 헤롯왕가가 가나안 땅에서 유대인들을 통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후 28년경 유대 땅에서 400여년 만에 선지자 세례 요한나사렛 예수가 등장합니다. 그에 따라 그때까지의 헬라와 로마의 통치시대를 성경학자들은 알기 쉽게 여호와의 선지자 활동이 전혀 없던 소위 중간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둘째로, 데살로니가 초대교회의 중요성을 십분 이해하고 있는 의사 누가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그곳에 목회자로 세우고 급히 남하하여 아덴과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참으로 적절할 조치입니다.

더구나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이 1 6개월 동안 성경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의사 누가가 보기에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혼자서 서방선교에 나서고 있는 것은 대도시 위주이며 체류기간이 무척 짧습니다. 그러므로 후계자를 현지에서 양성하여 개척한 초대교회를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동안 마케도니아에서 사역하고 있던 디모데와 실라가 남하하여 합류하게 됩니다. 의사 누가 역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그리고 여집사 뵈뵈 등과 함께 고린도에서 성경공부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한 배움이 있었기에 주후 60년대를 전후하여 의사 누가가 복음서를 체계적으로 저술한 것으로 보입니다(1:1-4).

공부를 하면서 의사 누가가 한가지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소망 가운데 끝까지 믿음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바로 주님의 재림으로 인하여 자신의 부활과 영생이 확실하게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진리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확신하게 되는 그것입니다.

그 점을 사도 바울 역시 중시하고 있기에 성경공부반을 운영하는 도중에 데살로니가 초대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작성하여 디모데에게 주어 먼저 전달하게 합니다(살전3:2);

 따라서 그 서신의 후반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1)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6-18); 주님의 재림이 있게 되면 무덤이 열리고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여 주님 앞으로 인도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살아 남은 성도들이 휴거하여 주님 앞으로 인도가 됩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진리로 믿게 되면 성도들이 이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된다는 사도 바울의 설명입니다.

(2)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올바른 성도의 신앙자세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구절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그러한 신앙생활이 가능한 진짜 이유가 깊숙하게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 점을 파악하기 위하여 본문의 말씀을 이제부터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얻은 소중한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6-18); 다음과 같이 3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16. 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4:16);

1)    무덤에서 부활하여 영생의 몸으로 천국에 들어가신 하나님의 대제사장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십니다. 성육신하여 그리스도로 이세상에 오신 독생자의 초림(初臨, the first coming)과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후에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신 주님의 훗날의 재림(再臨, the second coming)은 그 의미가 상당히 다릅니다;

2)    구체적으로, 초림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자신의 공생애를 통하여 제자들과 세상사람들에게 전해주고 또한 믿는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을 어린양으로 희생하는 것이 주목적입니다(3:13-17). 그것이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베풀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밝히 드러낸 것입니다.

3)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어린양으로 오신 것이기에(1:29, 36) 세상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속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진심으로 고백하게 되면 누구나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4)    그러한 선택이 자신의 일생 가운데 이루어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재림사건은 그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것은 구원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 가운데 주님을 구원주로 영접하지 아니한 세상사람들에 대해서는 추호의 용서의 기회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12:31-32).

5)    단호하게 산 자를 처벌하거나 이미 죽은 자를 부활시켜 영벌에 처하고 마시는 것입니다(5:25-29). 그러므로 재림하시는 주님의 행차는 우렁차며 웅장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먼저 피조물의 눈으로 볼 수가 없는 천국(天國, the heaven)에서 피조세계인 우주의 보이는 하늘(穹蒼, the sky)로 들어오십니다;

6)    그 하늘 구름위에서 주님이 천사들에게 호령하십니다(16a). 주님의 재림이 임하고 있음을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 명령을 듣고 천사장들이 천사들에게 지시합니다(16b). 모든 피조물들이 들을 수 있도록 힘껏 나팔을 불라는 것입니다(16c). 마침내 주님께서 지상에 발을 디디게 되십니다(16d). 그와 동시에 모든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벌떡 일어납니다(16e, 27:51-54). 그것은 마치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본 그 모습 및 여호와의 말씀과 같습니다(37:4-14).

7)    부활한 자들이 2부류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영생의 부활을 얻었지만 여호와의 보좌 앞에 끌려가서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로 들어가게 되는 자들이 있습니다(25:46a). 그와 달리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면서 함께 여호와의 보좌 앞에서 영생(永生, eternal life)의 선물을 받게 되는 자들이 있습니다(25:46b). 그러한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되는 자들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특별히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8)    그 내용을 누가복음에서 옮겨서 적어봅니다;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 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2:28-30). 그와 같은 상급과 영광이 끝까지 시험을 이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기다리고 있으므로 주님의 재림은 참으로 감사하며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성도의 고난은 장차 얻게 되는 영생의 큰 영광과 비교하면 참으로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8:18).

(2)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

1)    주님의 재림은 언제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때가 궁금한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최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7. 이르시되, (계절의 흐름인 자연스러운) (크로누스, χρόνους)(특히 정해진 사건이 발생하는 하나님의 역사의) 시기(카이루스, καιροὺς)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7-8).

2)    한마디로, 창조주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극비 사항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맡겨두고서 성도들은 끝까지 소망 가운데 인내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삶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주님께서 재림하시게 된다면 그것은 엄청난 영광입니다. 그 이유는 곧바로 산 채로 휴거하여 구름안에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반갑게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17);

(3)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4:18);

1)    초대교회 로마당국의 압제와 핍박으로 성도들의 희생과 고통이 대단합니다. 주후 51년경 이 글을 작성하여 디모데를 전령으로 삼아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고 있는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15년의 세월이 지나면 로마황제 네로에 의하여 로마시에서 처형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시험이 첩첩산중(疊疊山中)이라고 하더라도 성도들은 결코 낙심하거나 침체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2)    그 이유는 한마디로,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는 주님의 말씀이 성도들에게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고 나자 예루살렘에 모여서 기도에 전념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열흘이 지나지 아니하여 오순절날에 보혜사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임재하십니다(2:1-4).

3)    진리의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심령속에 임재하여 성령의 전을 만들게 됨으로써(고전6:19) 다음 3가지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도들이 성령세례를 받아 방언을 말하며 예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2:1-4, 고전14:1-6). 둘째, 승천하신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성령의 전에 영적으로 임재하시어서 성도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고 그 앞길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14:16-20, 16:6-7). 셋째, 가장 고난이 심한 그때에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마4:1, 11, 24:22, 눅22:43, 요6:63, 행5:19).

4)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떻게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는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떠한 부활과 영생의 상급을 얻게 되셨는지를 성도들이 일말의 의혹도 없이 그대로 믿게 되는 소망과 확신이 임하게 됩니다. 그 은혜로 그리스도의 제자인 성도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서 이 세상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16:24, 8:37-39). 본문은 그와 같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경험을 서로 간증함으로써 믿음이 약한 자를 강하게 세워주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1)  세상살이를 하다가 보면 좋은 일과 좋지 아니한 일이 번갈아 찾아옵니다. 그것은 날씨가 변덕스러운 것과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추워도 겨울을 견딜 수 있도록 그 가운데 삼한사온(三寒四溫)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살다가 보면 비극의 연속인 것만은 아닙니다. 좋은 일이 안 좋은 일로 바뀌기도 하고 안 좋은 일이 좋은 일을 몰고오기도 하는 법입니다. 따라서 인생사가 새옹지마(塞翁之)라고 흔히들 말하고 있습니다.

(2)  그러한 인생의 달관자의 입장에서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본문의 내용은 그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생사가 그러하다고 하더라도 성도들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난과 핍박이 몰려오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대처하라고 권면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도대체 어떠한 경험을 하고 있기에 그러한 강력한 권면의 말씀을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주고 있는 것일까요?

(3)  그 근거를 사도 바울은 이미 데살로니가 전서 제4장 말미에서 성도들에게 전해준 바가 있습니다(살전4:16-18). 따라서 그는 본문에서,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 사도로 살아가고 있는 바울은 로마제국 그것도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에 있는 대도시를 건너 뛰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도들에게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4)  그의 설교를 듣고 있는 유대교인들의 반발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습니다. 그는 모진 박해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심령속에서 내주 역사하고 계시는 보혜사 성령님과 주님의 말씀과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그를 온전히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과 핍박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그의 고백 그대로 장차 주님처럼 부활 승천하여 그가 천국에서 누리게 될 그 상급과 영광은 너무나 찬란한 것이며 영원한 것입니다(8:18).

(5)  그와 같은 사실을 진리로써 그의 심령속에 자리잡고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적으로 깨우쳐 주고 있기에 그는 고난 가운데에서도 기뻐하며 박해를 당할 수록 쉬지 않고 기도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주님께서 바울 자신의 부활과 영생을 영적으로 이미 가지고 오셨기에 그것을 미리 보면서 범사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체험은 랍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인자의 형상으로 만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된 그의 간증에서 벌써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9:3-22).

  결론적으로, 본문에 기록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체험적인 권면은 한마디로, 랍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인자의 형상으로 만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된 그 순간에 벌써 큰 깨달음으로 그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은 아직 재림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안목으로 보면 그는 진작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그에게 재림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물리적으로는 아직(not yet)이지만 영적으로는 성령님의 은혜로 벌써(already) 재림하시는 주님을 사도 바울이 만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놀라운 영적인 체험이며 그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깨달음의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떠한 핍박과 고난 가운데에서도 능히 언제나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남은 인생을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듭난 자신의 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도 바울의 감격을 우리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이 시간이 되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생생한 메시지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살전5:18). 아무쪼록 사도 바울이 누리고 있는 그 큰 소망을 우리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 시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은혜가 믿음의 확신으로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