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년 설교문(손진길)

“누가복음 첫머리의 말씀을 다시 음미하다”(눅1:1-17)(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6. 17. 14:25

제목; “누가복음 첫머리의 말씀을 다시 음미하다”(1:1-17)

설교일; 주후 2024 6 23일 주일

작성자; 손진길 목사(6 17일 월요일 작성)

 

신약성경에는 복음서가 4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를 이야기체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복음서인데 그것이 4권이나 됩니다. 어째서 단 1권으로 권위있게 사람들에게 제시하지 아니하고 창조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4권에 담아서 각각 다른 측면에서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피조물인 사람이란 그 형상과 모양이 조금씩 달라서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취향이 각각 다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1:26-31). 그러므로 그 모든 취향의 차이를 반영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일단 동서남북 4방향에서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호와께서 판단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 알기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그것은 4명의 눈먼 사람이 각각 동서남북에서 코끼리라고 하는 큰 동물을 만지고 그것을 인식하는 경우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그에 관한 이야기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동쪽을 향하여 서있는 거대한 코끼리를 눈이 보이지 아니하는 사람이 그 손으로 동쪽에서 만지게 되면 그는 코끼리의 머리를 쓰다듬게 되고 그 긴 코를 코끼리의 특징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2)  둘째, 서쪽에서 코끼리를 만지고 있는 자는 둥그런 엉덩이와 짧은 꼬리가 바로 그 동물의 특징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돼지보다 더 큰 거대한 놈이 바로 코끼리라고 하는 발언입니다.

(3)  셋째, 남쪽과 북쪽에서 코끼리를 쓰다듬어본 2사람은 공통적으로 그 동물은 벽과 같이 생긴 이상한 놈이라고 규정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4명의 소경 가운데 2사람이 똑 같은 말을 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코끼리는 영락없이 거대한 벽과 같은 동물이라고 하는 다수설(多數說)을 얻게 됩니다.

(4)  넷째, 그렇지만 만약 그 4사람이 서로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자신들이 만져본 영역은 부분적인 것이며 코끼리의 앞과 뒤 그리고 나머지 중간부분 2곳에 불과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게 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들이 지혜롭게 4사람의 견해를 모두 종합하여 하나의 진리를 찾아낸다고 한다면 그 결론은 거대한 동물 코끼리의 실체에 보다 접근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4권의 복음서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어차피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사람이란 시공간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구체적으로 사람은 동서남북이라는 4방향에서 공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는 춘하추동이라는 계절의 변화를 자신의 육신으로 반복적으로 체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단순하지만 그것이 시공간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4권의 복음서를 그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좀더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실체에 사람들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4:24).

그와 같은 측면에서 마가, 마태, 누가, 요한이 각각 저술하고 있는 4권의 복음서를 살펴보자면 그 대체적인 특징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주후 60년대초에 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하는 시기적인 공통성과 가나안 유대인들의 초대교회에서 먼저 회람이 되고 읽히고 있다는 지역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와 달리 제4복음서로 불리게 되는 사도 요한의 복음서는 주후 70년 로마군단의 침입으로 가나안 땅을 떠나게 된 그가 스승이신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소아시아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20년 노년의 세월을 투자하여 헬라의 학문을 익히고 공부한 다음에 그가 기억하고 있는 스승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교훈을 나름대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기가 주후 90년대 초반으로 보이고 벌써 20년전에 예루살렘과 유대지역의 초대교회가 사라지고 말았기에 자연히 사도 요한이 기록한 제4복음서는 소아시아의 7교회를 위시하여 이방지역의 초대교회에 회람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둘째로, 그에 따라 단순하게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은 유대 땅 유대인들을 위하여 쓰인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이고 요한복음은 헬라세계 이방인 성도들을 위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가, 마태, 누가가 쓴 3개의 복음서는 유대인을 위하여 비슷한 시기에 공통적으로 히브리적인 시각에서 기록하였다고 하는 의미에서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만 제4복음서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헬라의 철학과 학문을 사용하여 뒤늦게 이방인인 헬라인과 로마인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로,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누가복음의 특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안이한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이유가 크게 보아 두가지입니다;

1)   하나는, 베드로의 영적인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는 마가가(벧전5:13) 주후 60년대에 발생하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두가지 어려움 곧 유대교인들의 공격과 로마인들의 핍박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고자 고난을 영적인 승리로 바꾸고 있는 예수님의 찬란한 생애와 교훈을 간단하게 모아서 헬라어로 가장 먼저 하나의 복음서를 집필한 것으로 보입니다.

2)   그것을 12사도 가운데 유일하게 헬라어를 알고 있었던 세관원 출신 마태가 보완하고 증보하여 마태복음을 저술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의사 누가는 서방선교에 진력한 후속사도 바울의 주치의입니다(4:14). 그와 함께 선교에 나서서 로마까지 들어가서 끝까지 그를 돌보며 생활하고 있는 동역자입니다(딤후4:11, 1:24). 그러므로 의사 누가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만민구원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고 싶어합니다.

3)   또 하나는, 의사 누가는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전해주고 있는 이야기만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는 인물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그 옛날 예수님의 복음사역지를 직접 방문하여 당시 증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증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자신의 복음서를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의사 누가는 발로 뛰면서 현지에서 자료를 수집하여 그것을 종합하여 자신의 복음서를 저술한 것입니다(1:1-4). 

(4)  넷째로, 그러한 특징 때문에 누가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특이성이 발견됩니다;

1)    첫째,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마가복음 및 마태복음과는 다른 시각에서 살피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의 내용을 보완하고 있는 마태복음이 이스라엘제국의 대왕 다윗의 자손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에서 그 기록이 시작되고 있다고 한다면(1:1-17)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대제사장 아론의 자손인 여성 마리아의 소생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1:26-42). 다윗의 자손인 목수 요셉은 그저 약혼녀 마리아를 사랑하여 그녀의 소생인 예수를 자신의 호적에 장남으로 올려준 고마운 의붓아버지에 불과한 것입니다(2:1-7).

2)    둘째, 나사렛 예수의 아버지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고 그는 유일하게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없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1:34-38). 그 점 때문에 예수는 창세기 제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여자의 후손에 해당하는 구원주입니다(3:15). 그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의사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근원을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의 복음서 제3장 말미에서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3:38). 그리고 자신은 복음의 근원을 살피고 거기서부터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진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1:3-4)

3)    셋째, 나사렛 예수의 관심은 선민의 제국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외세인 로마의 세력을 물리치고 그 옛날 다윗의 이스라엘제국을 재건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위적인 창조주의 능력이나 유대인들의 세력을 모아 물리력으로 외세를 몰아내고 선민의 나라를 회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 옛날 다윗의 제국이나 하스모니안 왕국처럼 분열이 되고 결국에는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사렛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선포하고 영생의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도록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민과 이방인에게 공히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나라를 수립하는 길입니다(12:28, 7:13-18).

4)    넷째, 그러므로 누가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이라고 하는 인위적인 구별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세상에서 억압을 받고 있으며 학대의 멍에를 쓰고 있는 가난한 자와 장애자 그리고 병자들을 치유하고 그들을 구원하여 영생의 천국에 함께 들어가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공생애와 대속의 십자가 희생 그리고 영생의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신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사실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누가복음이야 말로 3의 복음서라고 말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의 직업이 의사이듯이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과학자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의 발달에 심취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제3의 복음서인 누가복음에 대한 이해가 더욱 쉽게 다가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누가복음 제1장 제1절부터 제17절까지를 간략하게 한 구절 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을 나름대로 묵상하여 얻은 교훈과 메시지를 더불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1. 우리(공식적으로는 유대지방을 정탐하는 자들, 비공식적으로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들)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예수님의 제자들과 경험자들) 말씀의 일꾼 된 자들(사도들과 장로들) 전하여 그대로 내력을 저술(자신들의 경험과 지도자들의 이야기만을 듣고서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문서로 작성)하려고 붓을 사람이 많은 지라. 3. 모든 일을 근원부터(그리스도 복음의 원천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이 복음서의 저자) 데오빌로(일종의 별명임. 공식적으로 유대 땅에 파견한 정탐꾼의 보고서를 받게 되는 로마제국의 정보기관의 수장이기에 자신의 본명을 숨기기 위하여 별명을 사용함.  또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기록을 회람하고자 의사 누가가 그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데오빌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임) 각하에게 차례대로 보내는 좋은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확실하게 하려 (근원부터 따져서 체계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 말씀의 뜻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는 이점이 있다는 것임)이로라”(1:1-4); 3복음서의 저자를 의사 누가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자신의 실명(實名, real name)을 감춘 채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1). 사도행전 제16장에서의 기록이 특히 그러합니다;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나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장수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우리를 따라와 소리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16:10-17). 여기서 우리라고 하는 대명사에는 바울과 실라를 비롯하여 두사람을 수행하고 있는 디모데와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의사 누가가 포함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나 실라가 따로 행동을 하고 있는 경우에는 우리라는 표현 대신에 그들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6:9-10, 17-19, 25);

(2)   둘째, 나사렛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자가 이며 그 수신자가 데오빌로 각하로 되어 있습니다(3). 만약 의사 누가를 유대지역에 파견되어 있는 로마제국의 정탐꾼으로 보는 경우에는 그가 은밀하게 이 보고서를 작성하여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총독부의 정보책임자에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황제로부터 시리아총독은 하급기관인 유대 땅의 로마총독은 물론 그들의 괴뢰정권인 헤롯왕가까지 감찰하는 책무를 부여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사 누가는 공식적으로 데오빌로 각하에게 나사렛 예수의 사상을 현장에서 검토한 결과를 보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보기관의 수장은 직무상 자신의 실명을 비밀에 붙인 채 데오빌로라고 하는 별명으로 여기서 불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셋째, ‘라는 인물이 상급자인 데오빌로 각하에게 초대교회의 역사에 관하여 조사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도행전이며 그러한 언급이 사도행전 첫머리인 제1장 제1-8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와 그리스 그리고 로마선교의 주역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끝까지 동행하고 있는 인물이 주치의인 누가입니다(딤후4:11). 그와 같은 측면에서 사도행전과 제3복음서의 저자를 의사 누가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4)  넷째, 본문 제2-3절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실체를 근원부터 살필 것이며 그것을 원류에서부터 체계적으로 설명하게 되면 복음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설명하고 있는 인물이 초대교회에서는 사도 바울입니다(벧후3:15-16). 그러므로 의사 누가는 사도 바울과 선교여행을 같이하면서 그로부터 고린도에서 1 6개월 그리고 에베소에서 2 3개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배운 인물입니다(18:11, 19:8-10). 그 점 때문에 사도행전과 제3복음서의 저자는 의사 누가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5)  다섯째, 공관복음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제3복음서가 같은 시기 주후 60년대초에 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및 마태복음과 달리 이 복음서의 저자는 사도들의 이야기나 증언만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교훈과 생애를 기록하지 아니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2). 그는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복음의 의미를 근원부터 살피기 위하여 직접 현지를 방문하고 관련 증언과 증거를 수집하고자 합니다(3). 그것은 정보수집 훈련을 잘 받은 자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애써 수집한 자료를 합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복음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또한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과학자 또는 학문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복음서의 저자는 로마제국의 정탐꾼이며 의사라는 과학자로서의 직업을 가진 누가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면 그는 이 보고서를 데오빌로 각하만을 위하여 저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과 동행함으로써 그는 벌써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인물입니다. 따라서 의사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저술하여 모든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읽히게 하고 그들의 복음에 대한 지식체계를 확실하게 만들어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4).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의사 누가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데오빌로 각하라고 부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둘째로, 5. 유대 헤롯(대왕, 그는 로마의 실력자에 의하여 주전 47년 유대총독으로 임명이 된 이두매 출신 안티파테르2세의 차남임. 똑똑한 헤롯은 당시 로마의 실권자 안토니우스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임명을 받았으며 주전 37년에 시리아의 로마군단을 빌려서 유대 땅을 정복하고 로마제국의 괴뢰정권인 헤롯왕가를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세운 자임. 헤롯대왕은 주전 4년에 별세함) 때에 아비야 반열(대상24:10, 다윗왕이 24반차를 만들 때에 아비야 족장의 집안 제사장들이 제8반차가 됨. 그런데 제2성전 시대에 생계가 막막해진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살고 있는 지역이 갈릴리 서편 산지임, 느13:10, 30-31, 말2:9. 그 지명이 묘하게도 야비아와 가드헤벨로 보이는 것임, 수19:12-13) 제사장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남편과 같은 레위인 제사장 집안임)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두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그 앞에서 정직하게 행동하는 자임, 17:1)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그 옛날 믿음의 조상 사라처럼, 11:30, 18:11-12)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반열의 차례대로(당시 약 2만명의 제사장들이 24반차에 800명씩 소속되어 있음. 따라서 일년 중 전반기에 한번 후반기에 한번 씩 제비를 뽑아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사장 직분을 한주간 씩 행함. 한번에 10명이 제사장 역할을 담당한다고 보면 일년에 20명이 봉사하게 됨. 그러므로 전부가 제사장 직분을 행하자면 40년이 걸림. 그런데 현실적으로 30세에 제사장이 되면 길어야 20년 근무가 가능함, 4:3. 그 이유는 고대사회의 평균생존연령이 40세에 불과하기 때문임. 결국 제사장이라고 하더라도 평생 예루살렘성전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는 것은 확률이 5할에 불과한 것임)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지성소와 성소를 가르고 있는 성막 가장 가까이에 분향단이 자리를 잡고 있음. 그곳에서 분향하는 자가 대제사장임, 30:6-10. 그런데 그 일을 때로는 제사장이 대행하도록 하고 있는데 그 직분대행에 제비 뽑힐 확률이 10명 가운데 1사람이므로 1할에 불과함. 그러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제사장 사가랴가 그해에 얻고 있는 것임)하고, 10. 모든 백성은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 그에게 나타나(시공간을 초월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현신한 것임) 향단 우편에 (홀연히) 선지라”(1:5-11);

(1)  마태복음은 다윗의 족보에서부터 나사렛 예수의 나타나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1:1-16). 그와 달리 누가복음은 레위인 제사장 집안 아론의 후손인 사가랴로부터 세례 요한이 나타나고 또한 그 친척인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설명하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1:5-17). 그 차이는 하나의 사실을 극명하게 알게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계자로서 선민의 나라 곧 이스라엘제국을 재건하고자 이 세상에 나타난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혈통상 다윗의 자손이 아니며 레위인 아론의 후손인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그의 부친은 영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그 사실을 백성들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제사장 사가랴의 가문에서 세례 요한이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1:14-17, 3:21-2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선민의 다윗제국이 아니라 여호와를 지근거리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이 소망하고 있는 영생의 하나님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1:38)”.

(2)  세례 요한의 생물학적인 부친이 되고 있는 제사장 사가랴가 변방 갈릴리 서쪽 산지 야비아에 살고 있습니다(5b). 본래 레위인들은 그 옛날 여호수아 시대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기타 이스라엘 12지파로부터 평균하여 4개씩 합계 48개의 성읍을 자신들의 주거지로 배정받고 있습니다(21:41). 그런데 제사장의 후손들이 24개의 반차를 이루고 차례로 예루살렘성전에서 제사장 직무를 행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2만명 정도의 제사장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8번째 아비야 반차에 속하는 제사장들이 야비아와 가드헤벨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참고로 주전 8세기에 가드헤벨에서 선지자 요나가 동방의 이방인 성읍 니느웨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고자 출발하고 있습니다(1:1-2, 3:1-4, 왕하14:25). 그것이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 있어서 선민의 나라 바깥으로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가 된 첫번째 사례입니다;

만민구원을 원하시는 여호와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는 선민들이 모두 가드헤벨의 선지자 요나처럼 행동해야 합니다(창12:1-5, 18:20-33, 출19:4-6, 사9:1-2, 19:20-25). 그 점을 예수님이 매우 강조하고 계십니다(11:29, 12:39).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은 변방 갈릴리에서 먼저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9:1-2).

(4)  유다왕 헤롯대왕은 주전 4년에 별세하고 있습니다(5a). 그런데 누가복음 제3장 제1절을 참조하면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은 로마제국의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통치 15년입니다.

1)    로마에서는 주후 14년에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가 죽고 그해에 그의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다음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보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30세가 되어 각각 공생애를 시작하게 되는 그 해는 주후 28년경입니다(3:1, 23). 물론 두사람은 6개월 나이 차이가 있으므로(1:36-38) 그해 4월 유월절 무렵에 요단 강가에서 세례 요한이 등장하여 백성들에게 회개의 물세례를 주기 시작하고 10월경 초막절 시기에 나사렛 예수가 요단강 동쪽 물이 많은 마을 베다니에 등장하여 외가의 친척인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1:36-40, 3:21-22).

2)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따지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헤롯대왕 마지막 해인 주전 4년에 예루살렘성전에서 제사장 사가랴가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11). 그리고 세례 요한의 출생고지를 받게 됩니다. 그는 집에 도착하여 늙은 아내 엘리사벳과 합방하고 아들 요한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고 보면 주전 3년에 벌써 세례 요한이 탄생하고 있는데 어째서 그의 30세 공생애가 주후 28년에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적어도 1년의 오차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아무리 정확을 기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인 사실의 추적에는 그 정도의 오차가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이 사람이 추구하고 있는 학문의 한계라고 하겠습니다.

(5)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합방하여 아들 세례 요한을 낳게 되는 것은 창세기를 참조하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생산하는 것과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그 이유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당시 아브라함이 99세 늙은이이고 아내 사라는 89세의 노파입니다. 게다가 안방마님 사라는 평생 불임이었고 이제는 늙은 몸이 되고 만 것입니다(11:30, 18:11-12). 따라서, 세상적인 상식과 통념에 비추어보면 그 나이에 부부가 합방하여 아들을 낳을 확률은 제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하여 두 차례나 내년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17:19, 18:10-14).

2)    둘째,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하여 먼저 아내 사라의 몸이 가임 여성의 몸으로 바뀌고 있습니다(21:1a). 그리고 늙은 부부 아브라함과 사라가 회춘을 합니다(21:1b, 20:2). 그 결과 그랄 땅에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21:2).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이고 사라의 나이가 90세입니다(21:5).

3)    셋째, 그것은 기네스 북에 올라갈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록입니다. 그러한 비슷한 사례를 여기서 의사 누가가 현지 아비야를 방문하여 주민들로부터 청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탄생은 약속의 아들 이삭의 탄생에 버금가는 신기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의 발휘라고 하겠습니다(17:1, 15:6).

셋째로, 12. (생전 처음 경험하는 두려운 현상에)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공식적으로는 동족들을 위하여 기도함. 개인적으로는 제사장 집안의 대를 이어갈 아들을 달라고 기도함) 들린지라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이름을 요한(יהוחנן, 여호하난의 줄인 말임, 자비로우신 여호와를 의미함)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앞에 (큰 선지자를 말함, 7:16)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나실인을 말함, 6:3)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선지자 말라기 이후 지난 400년간 나타나지 아니한 선지자가 갑자기 유대 땅에 나타난다는 것임), 16.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4:5-6절 예언의 말씀의 뜻을 의사 누가가 정확하게 풀이하고 있는 대목임. 그는 세례 요한이란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 엘리야의 환생이 아니라 그와 같이 백성들의 마음을 우상에게서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고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새로운 큰 선지자임을 말하고 있는 것임)”(1:12-17);

(1)  여호와의 사자인 천사 역시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느끼고 있는 시공간의 개념을 진작에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는 순간이동으로 벽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성전 성소에서 분향단을 돌보고 있는 늙은 제사장 사가랴 앞에 나타나고 있습니다(11). 그것은 마치 훗날 무덤에서 영생의 몸으로 부활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벽을 통과하여 방안에 나타나는 장면과 같은 것입니다(20:19, 24:31).

(2)  피조물인 사람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면 마치 저승사자를 만난 것처럼 생사의 기로에 서고 있다는 엄청난 위기감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됩니다(12). 그에 따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가랴에게 천사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공식적으로는 동족들을 위하여 기도함. 개인적으로는 제사장 집안의 대를 이어갈 아들을 달라고 기도함) 들린지라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이름을 요한(יהוחנן, 여호하난의 줄인 말임, 자비로우신 여호와를 의미함)이라 하라”(1:13).

(3)  돌이켜보면, 늙은 제사장 사가랴가 이번에 예루살렘성전에 오게 되는 기회를 제비뽑기로 얻게 된 것이 평생에 얻을 수 있는 기회의 갑절의 은혜를 여호와로부터 얻은 것입니다. 더구나 대제사장을 대신하여 제비뽑기를 하여 분향단의 향불을 돌볼 수 있게 된 것이 또 10배의 은혜입니다. 그러한 절호의 기회를 만났기에 그는 지성소 바로 앞의 성막 분향단에서 개인적으로 제사장 가문을 이어갈 수 있는 아들을 창조주 여호와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달라고 간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기도가 놀랍게도 여호와의 긍정적인 응답을 받게 되었다고 천사가 사가랴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13).

(4)  그 전갈내용만 해도 사가랴는 너무나 기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전해주고 있는 예언의 말씀은 더욱 놀라운 것입니다; “세례 요한으로 불리게 될 너의 아들은 ①첫째,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해줄 것이다(14). 그 이유는 그가 그 옛날의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큰 선지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15a). ②둘째, 나실인이 되어 구별된 거룩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15b). ③셋째,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됨으로 말미암아 구약시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여년이 지나 처음으로 선민사회에 나타나는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15c)”.

(5)  그 다음에 천사가 제사장 사가랴에게 전해주는 여호와의 말씀은(16-17) 선지서 말라기 제4장 말미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4:5-6). 한마디로,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공생애를 시작하여 선지자인 자신에게 몰려드는 백성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오고 있으므로 부디 회개하고서 하나님의 아들을 구원주로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3:1-2).

(6)  그에 따라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먼저 물세례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3:6). 그리고 그리스도는 창조주 여호와의 능력을 지닌 자이며 자신은 그의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할 것입니다(3:11). 그러한 역할을 선지자 말라기는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다시 이 세상에 와서 수행하는 것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4:5-6). 그러나 의사 누가는 그것이 아니라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로지 세례 요한은 그 옛날 선지자 엘리야처럼 여호와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열심히 섬기고 있는 백성들에게 부디 선민만의 종교가 되어 버린 유대교를 버리고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되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부르짖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7)  그와 같이 동족 유대인들을 구원하고자 그 옛날 선지자 엘리야처럼 열과 성을 다할 인물이 바로 세례 요한인 것입니다. 그 점을 의사 누가는 정확하게 17. 그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앞에 먼저 와서”(17a)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세례 요한은 그 옛날 승천한 선지자 엘리야의(왕하2:11) 환생(reincarnation)이 아니라 그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또다른 선지자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선민 이스라엘의 사회에 나타난 선지자의 족보를 참조하면 구약시대 마지막 선지자가 주전 410년경의 선지자 말라기입니다. 그는 구원주 그리스도가 선민의 땅에 오시기 직전에 그 옛날 승천한 엘리야가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서 그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4:5-6).

말라기 이후 세례 요한이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주후 28년까지 유대 땅에서는 선지자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직접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그 말씀을 들은 바가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선지자 모세는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의 영을 받게 되기를 소망하였지만(11:29) 선민의 사회에서도 그 일은 중간기 400년 동안 무망한 것입니다.

물론 그와 같이 선지자가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는 공백기 곧 신구약의 중간시대 400여년에 있어서 다행스럽게도 주전 2세기 중반부터 바리새인들이 나타나서  그 역할을 어느 정도 대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제지간에 대를 이어가면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체계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읽을 수 있는 히브리정경인 미크라, 구전되고 있는 히브리경전 미쉬나를 열심히 공부하고 나름대로 주석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문서화하고 있는 소위 구전되고 있는 미쉬나가 훗날 탈무드로 집대성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주석이 바로 미드라쉬입니다.

바리새인 젊은이가 10수년간 랍비를 모시고 열심히 그 3가지를 공부하여 30세가 되면 소정의 시험을 통과하여 비로소 성경선생의 자격을 따게 됩니다. 그들이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랍비들입니다. 그들 가운데 출중한 자가 훗날 산헤드린 대공회에 서기관으로 들어가서 교법사의 일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 소수가 이름하여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여호와의 영광을 직접 만나거나 예언의 말씀을 위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지식체계와 이성으로 사제간에 열심히 공부하여 히브리경전의 내용을 백성들에게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영적인 한계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경 말씀이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3:16). 진리의 성령님께서 성도에게 임재하여 내주 역사하고 계시지 아니하고 있는 신구약의 교체기 곧 중간시대이기에 바리새인들이 나름대로 이성과 지성으로 열심히 히브리경전의 문자를 해석하고 그 뜻을 풀이한다고 하지만 그 열매가 부실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 창조주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산헤드린 대공회의 권위나 백성들의 신망에 좌우되는 외식적인 종교생활이 이루어지고 만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율법을 잘 지키고 거룩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속을 영적인 눈으로 들여다보면 추악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 점이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의 한계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토록 질타를 하고 있습니다(23:1-36). 그와 같은 인위적인 선민의 종교라는 유대교의 시대를 청산하는 청신호가 본문에서 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난 천사가 전해주고 있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뿌리라고 의사 누가가 제3복음서에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에 입각하여 이제부터 학문적인 입장에서 누가복음의 내용을 충실하게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주일 강해설교가 그러한 영적이며 지성적인 성경공부의 사기를 진작하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하게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