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누가복음 강해 제237강(눅24:50-5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4. 5. 22. 05:38

누가복음 강해 237(24:50-5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 12 31()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고 성령님의 능력을 기다리게 되는 성도들에 대하여(24:50-53);

 

의사 누가가 저술한 복음서는 그후 세대에 의하여 24개의 장으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구분은 시간적 흐름에 더하여 주제별 차이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24 장의 내용을 더욱 세분하여 이슈별로 강해를 하다가 보니까 237강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28 장에 이르고 있는 마태복음에 대한 강해를 전체 210강으로 마무리한 전과 비교하게 되면 상세한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째서 누가복음에 대한 강해가 마태복음의 경우보다 길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저의 생각으로는 의사 누가가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체계적으로 배열하면서 주제와 이슈를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제가 나누어서 설명을 하고 강해를 해야만 하는 대목이 더욱 많아진 결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실 의사 누가는 그의 속에 수많은 질문을 숨겨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답을 독자들이 스스로 찾아볼 있도록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의도적으로 재구성하여 깊은 묵상의 과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에 대한 논리적인 탐구와 학문적인 분석에 흥미가 크신 성도님들은 의사 누가의 글을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누가복음의 대미(大尾, 마지막 꼬리부분) 장식하고 있는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내용은 40 전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1:3) 예루살렘에서 3km정도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조용한 교외마을 베다니의(11:18) 동구(洞口, 동네의 입구) 감람원으로 오셔서(19:29, 21:37, 1:12) 사도들과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조용하게 승천하시는 이야기입니다. 하필이면 베다니 감람산에서 승천하시는 것일까요?(24:50-51) 옛날 선지자 엘리야는 요단 강가에서 승천을 했는데(왕하2:7-14) 예수님께서는 베다니 동구 앞에서 승천을 하시고 있습니다(24:50-51, 1:8-12).

그리고 선지자 엘리야의 승천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엘리야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승천을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을 하고 계십니다. 한번 차이를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본 사도와 제자들이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서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의사 누가가 적고 있는데(24:52-53)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을 배척하고 처형했던 대제사장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관리하고 있는 성전입니다. 안에서 사도와 제자들이 과연 둥지를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 역시 연구과제입니다.

이상과 같은 질문에 대하여 답을 구해보는 심정으로 본문의 말씀을 구절씩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24:50-51); 다음과 같이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24:51a); 예수님의 승천의 현장까지 따라간 사도와 제자들은 전부 명이나 되는 것일까요?

1)      그들 사도와 제자들은 지난 40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천국복음을 다시 깊이 있게 배우고 세계선교에 대한 훈련까지 받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1:3). 그렇지만 언제 예수님께서 승천을 하시고 또한 언제 또다른 보혜사 성령님께서 강림을 하셔서 자신들과 여러 성도님들에게 임재하실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장소도 사전에 알고 있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난 40일이 되는 그들 모두를 데리고 예루살렘의 교외지역으로 나가실 때에도 목적지와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다만 여기서 있는 사실이 두가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과 함께 동행한 성도의 전체 수가 500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성도의 수가 전부 500 정도라고 훗날 사도 바울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15:8). 둘째, 승천하신 그날이 안식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의사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1장에서 점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1:12).

3)      그렇다면 의사 누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 그날 저녁이 아니라 다음날인 월요일에 사도와 제자들이 모여 있는 마가의 다락방에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24:36). 반면에 사도 요한은 부활하신 주일날 저녁에 그곳에 나타나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20:19). 그러한 차이를 따져보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 누가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 제자들과 40일간 함께 지내시고(1:3) 안식일에 승천하셨으며(1:11-12)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다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2:1-4).

4)      그렇다면, 월요일부터 계산하여 40일이 되면 토요일 안식일이 됩니다. 그리고 오순절(五旬節, 처음의 초실절을 포함하여 50일째가 되는 두번째 초실절 날인데 그날은 처음 초실절 다음날부터 세어서 칠칠절이 되는 날임) 첫번째 초실절(初實節, 처음 익은 열매나 곡식을 하나님의 전에 드리는 절기) 주일을 포함하여 50일째가 되는 두번째 초실절인 주일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토요일 안식일 8일이 지나서 다음 주일이 되자 오순절이 찾아오게 되며 그날에 성령님의 강림이 있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때 성령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기도하고 있던 120명의 성도님들에게(1:15) 강림을 하시고 내주 역사하시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2:1-4).

5)      참고로, 처음 초실절에는 보리수확의 열매를 바치고 두번째 초실절에는 주곡(主穀, 주식이 되고 있는 곡식) 밀의 열매를 바치게 됩니다(9:31-32). 따라서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죽으심과 3일후 무덤 부활이 처음 초실절이라고 한다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만민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나라에 모두 함께 들어가게 되는 것이 복음의 가장 결실인 메인 하베스트’(main harvest)로서 두번째 초실절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2)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24:51b); 어째서 안식일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사도와 제자들을 이끌고 행차를 하시고 있는 것일까요?

1)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을 넘어 아래 베다니 동네가 보이는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먼저 사도와 제자들을 둘러보십니다. 그리고 아래에 펼쳐지고 있는 정다운 베다니 동네를 내려다 보십니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이 살고 있습니다(11:1-3, 11, 33-44). 그리고 공생애 기간 중에 집에서 여러 제자들과 함께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습은 마치 옛날 모세가 모압 느보 산에 올라가서 요단 서편 가나안 땅을 북에서 남에 이르기까지 전부 내려다보고 또한 멀리 지중해 연안까지 살펴본 후에 여호와께 감사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맡겨드린 마지막 모습을 생각나게 해주고 있습니다(34:1-7).

2)      모세는 평생의 소원이 출애굽한 동족들을 이끌고 약속의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원이 이루어지지를 못합니다(20:12, 34:4).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화가 난다고 하여 바위를 지팡이로 치고서 물을 내었기 때문입니다(20:7-11). 하나님께서는 온순하게 그저 바위에게 명령하여 샘물이 솟아나게 하라고 했는데 지시를 어긴 것입니다(20:8, 11).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백성들에게 진노하는 영적인 지도자를 하나님께서는 동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인도자로 이상 사용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3)      대신에 모세에게 새로운 인생의 소원과 목적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십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시는 천국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곳에 성도들과 모세의 거처를 만들어주고자 승천을 하십니다(14:1-3). 히브리서저자는 영원한 거처가 바로 모세가 훗날 메시아를 만나서 하나님의 놀라운 상급을 얻기를 그토록 원하였는데 소원이 이루어진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11:26). 그리고 모세가 얻은 축복을 모든 믿음의 열조들이 얻기 위하여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나그네로 살아갔다고 이른 믿음의 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1:13-16).

(3)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24:51c);

1)      베다니 감람원에서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손을 들어 사도와 제자들에게 축복을 하십니다. 그것은 훗날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축도(祝禱, benediction) 하는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고후13:13). 소급하여 생각을 해본다고 하면, 이삭이 아들에게(27:27-29) 그리고 야곱이 요셉의 아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을 해주는 모습을 연상하게 해주고 있습니다(48:14-22).

2)      그렇다면,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 사도와 제자들에게 해주신 축복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대강의 내용을 짐작할 있도록 의사 누가가 사도행전 1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1:4-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1:8-9).

(4)   축복하실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24:51); 괄호안에 들어 있는 글귀는 어떤 사본에는 빠져 있으므로 그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내용을 포함하여 아래와 같이 살펴봅니다;

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승천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은 옛날 선지자 엘리야의 승천의 모습과 어떻게 다를까요? 차이는 조용한 승천과 요란한 승천으로 구별이 됩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참으로 조용한 승천입니다. 사도와 제자들에게 손을 들어 축복의 말씀을 남기시면서 그대로 서서히 하늘로 올려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24:51).  

2)      반면에 엘리야의 경우에는 상당히 요란한 승천입니다; “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왕하2:11). 마디로, 엘리야가 불수레와 바람을 의지하여 타력(他力, 남의 ) 의하여 승천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프로펠러가 거센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데 헬리콥터를 타고서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모습과 비슷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늘로 올려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아무런 장치의 도움이 없이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3)      하나 생각해볼 점은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음을 통과하시고 부활하셔서 영생의 몸을 입고 계십니다. 따라서 승천은 사역의 장소를 땅에서 하늘나라로 변경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6:20). 그러나 엘리야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마치 옛날의 에녹처럼 휴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5:24). 그러므로 에녹이나 엘리야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그리스도를 만나서 함께 들어가야만 하는 과정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겠습니다(23:43, 5:24-29, 11:26). 그러한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 바로 변화산상의 엘리야와 모세라고 하겠습니다(9:29-31).

둘째로,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기쁨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24:52-53);

(1)   500명의 성도들이 감람원에서 승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공생애 당시에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섬겼지만 경배한 적이 없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승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제 달리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자신의 몸을 만민의 속죄를 위한 산제물로 바치신 메시아이십니다(1:29). 그리고 3일후 무덤 속에서 부활하여 영생의 몸을 가지시고 천하의 권세를 얻으십니다(28:18). 이제는 아무런 장비의 도움도 없이 부활의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십니다(24:50-51).

2)      둘째, 마침내 옛날 선지자 이사야와 다윗대왕이 신앙고백한 그대로 승천하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시는 주님이 되십니다(52:13, 53:10, 110:1, 2:33, 36).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과 함께 성자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의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되신 것입니다(5:13-14).

(2)   사도와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자 마음속에 기쁨이 샘솟고 있습니다(24:52a). 이유는 두가지라고 하겠습니다;

1)      첫째, 예수님께서 먼저 승천하신 이유는 성도들의 거처를 하나님나라에서 마련하시기 위함입니다(14:1-3). 그러므로 성도들이 복음을 세상에 전하고 생을 마치게 되면 자연히 영원한 거처에 들어갈 수가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2)      둘째,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이미 약속하신 대로(14:16-17) 아버지 하나님께 말씀을 드려서 또다른 보혜사를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시겠다고 확인하셨기 때문입니다(24:49, 4-5, 8-9). 그러므로 이제는 예루살렘에 모여서 모두가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24:52b). 마디로, 모두가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3)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24:53); 흔히 예수님께서 승천을 하시자 사도와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에 전념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1:14). 그것은 오순절날 그들이 모여서 기도한 장소가 그곳으로 보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습니다(2:1). 그렇지만 의사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마무리하면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24:53) 달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미가 무엇일까요? 두가지로 짐작이 됩니다;

1)      첫째, 500명이나 되는 사도와 제자들이 모두 모여서 함께 기도를 드릴 있는 공간이 성전이 아니고는 예루살렘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 가운데 나사렛 예수님을 선지자이며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메시아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를 비롯하여(23:50:51, 19:39-40) 소위 유대인 나사렛파 불리고 있는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 가운데 유대교의 개혁과 개방을 부르짖고 있는 힐렐학파와 헬라파 유대인들도 예수님에 대하여 호의적입니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초창기 역사에 있어서는 사도와 제자들이 성전과 회당을 방문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많이 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3:1, 4:1, 5:12, 9:20, 13:14).

2)      둘째, 그러나 소위 나사렛 예수파가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떠드는 모습을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오래 그곳에서 계속 모이지를 못하고 기도하는 성도들의 수가 120 정도로 줄어들게 되자 자연히 마가의 다락방을 빌려서 그곳에서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며 또한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조직을 정비하기 위한 회의도 것으로 보입니다(1:13-26).

결론적으로, 선지자 엘리사의 경우에는 스승이신 엘리야의 승천을 요단 강가 언덕에서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갑절의 영감을 얻게 됩니다(왕하2:9-14). 깊은 이유는 스승 엘리야가 승천한 것처럼 자신도 선지자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게 되면 넉넉하게 승천할 수가 있다고 하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에 영적으로 세상을 이길 있는 힘이 배가가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감람원에서 바라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는 사도들과 제자들의 마음도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전부 목격한 행운아들입니다. 자신들의 눈으로 그것을 직접 보고 또한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를 지낸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온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끝까지 사역만 감당하면 영생구원과 하나님나라는 그들의 것입니다(22:28-30).

그와 같은 동일한 기쁨과 깨달음 그리고 소망을 가질 있도록 오늘날 성령님께서 성도들의 속사람으로 자리를 잡고서 역사하고 계십니다(6:4-14, 고전6:19-20).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게 되면 진리의 성령님께서 뜻을 깨닫도록 도와 주십니다(14:26, 16:13-14). 그리고 성도의 거듭난 삶을 끝까지 돌보시고 복음전파의 일꾼으로 사용하십니다(16:6-10, 8:34-39).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끝까지 복음전파와 성화의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의사 누가의 복음서 끝부분에서 배울 있는 이른바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축복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