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하 주석

역대하 제36장 주석(요약자; 양인국)

손진길 2024. 2. 18. 16:09

역대하 제36장 주석(요약자; 양인국)

 

역대하36
 
36:1-4. “1 그 땅의 백성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세워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삼으니 2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삼 세더라 그가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지 석 달에 3 애굽 왕이 예루살렘에서 그의 왕위를 폐하고 또 그 나라에 은 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며 4 애굽 왕 느고가 또 그의 형제 엘리아김을 세워 유다와 예루살렘 왕으로 삼고 그의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그의 형제 여호아하스를 애굽으로 잡아갔더라

여호아하스는 유다의 왕이 되어 불과 석 달 동안 치리하였다
(36:2). 애굽왕 느고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그의 위를 폐하고 그의 형제 엘리아김을 왕으로 세우고 이름을 여호야김이라고 하였다. 애굽의 바로 느고는 전쟁의 배상으로 유다로부터 은 일백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취하여 갔고 또한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잡아갔다.

36:5-8. “5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6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그를 치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7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더라 8 여호야김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가증한 일들과 그에게 발견된 악행이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호야김은 십일 년을 통치했지만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다
. 다만 그에 대한 평가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가 있을 뿐이다. 그의 통치 중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치러 올라왔을 때 패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이때 성전의 기구들이 바벨론에게 약탈당했다. 그들은 성전에서 약탈한 기구들을 자신들의 신당에 두었다.
요시야의 두 아들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은 모두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자였다
(왕하23:32, 대하36:5).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유다 역사 가운데 전무후무(前無後無)하게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요시야의 아들인 그들이 어떻게 이처럼 여호와 앞에 악한 자가 될 수 있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부친이 유다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일을 보며 자란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요시야는 39세에 죽었는데 여호야김이 25세에 왕이 되었다는 것은 요시야가 그를 14세에 낳았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십 팔세부터라고 할 때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이 종교개혁 하는 모든 것을 보며 자랐다는 것을 말해 준다. 물론 성경은 그들이 어째서 부친의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는지 말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만 상상할 뿐이다. 우리가 이 물음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보는 것과 교육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친이 행하는 일을 보았다. 그러나 그를 본받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선한 일들을 보면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보는 것 자체가 교육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교육은 보는 것 이상이다. 교육은 가치관을 세워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육을 받은 사람은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 금해야 할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일을 행하고 금하여야 할 이유를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킨 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보아왔지만 그것에 대하여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째서 여호와를 경외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유산이 대대로 물려지기 위해서는 자녀들에게 합당한 신앙의 교육을 해야 하는 것이다.

36:9,10. “9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 열흘 동안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10 그 해에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여호와의 전의 귀한 그릇들도 함께 가져가고 그의 숙부 시드기야를 세워 유다와 예루살렘 왕으로 삼았더라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잡혀간 후 그를 대신하여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팔세에 유다의 왕이 되어 석달 열흘을 치리하였다
. 여호야긴이 이처럼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그토록 짧은 치리 기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라고 말한 것은 여호야긴을 섭정한 자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비록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그와 함께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던 자들이 유다를 계속 이끌어 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여호야긴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고 이때에 또 한 번 성전의 기구들이 약탈당했다.

36:11-21. “11 시드기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 동안 다스리며 12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으며 13 또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그의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였으나 그가 왕을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14 모든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하여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따라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룩하게 두신 그의 전을 더럽게 하였으며 15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16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여호야긴을 이어 유다 왕이 된 사람은 그의 숙부 시드기야다
. 그는 이십 일세에 왕이 되어 십 일 년 동안 유다를 치리했다. 그와 그의 시대는 하나님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12,13절은 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 앞에서 겸손하지 아니하였으며 13 또한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그의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게 하였으나 그가 왕을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이처럼 시드기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기회를 버리고 끝까지 거역하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복을 받는데 그는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고 권고의 말씀이 임했을 때 회개해야 회복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을 강퍅케 하여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권고의 말씀을 거역했고 또한 느브갓네살과 맺은 언약조차 배반함으로 끝까지 악을 행하였다.

이 시대는 왕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총체적으로 부패했다
. 14∼16절은 이 시대의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해 주고 있다. “모든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하여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따라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룩하게 두신 그의 전을 더럽게 하였으며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여기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 백성을 사랑하셨는지 말해 준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부패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선지자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으로 표현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다. 결국 그들은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라는 말의 의미다.

36:17-21. “17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그들을 다 넘기시매 그가 와서 그들의 성전에서 칼로 청년들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병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18 또 하나님의 전의 대소 그릇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9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며 그들의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들의 모든 귀한 그릇들을 부수고 20 칼에서 살아 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의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르니라 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22 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3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유다가 그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자기 길을 갔던 것이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함이었을까
? 만일 유다가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거역하였다면 그들이야 말로 무지한 자요 어리석은 자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유다가 범한 이와 같은 어리석음은 모든 시대 계속 반복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보다 더 좋은 것을 얻고자 하여 하나님을 떠났을 때 기다리는 것은 철저한 황폐함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의 원천이다. 원천을 떠나서는 메마름 외에 아무 것도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바벨론의 칼에 넘어졌고 칼을 피한 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심으로 그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실 때까지 그곳에서 노예로 살아야만 했다.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36:21)”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칠십년에 귀환할 것을 말씀해 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심이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가를 통하여 이와 같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렇게 말했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1-33)”

유다의 마지막 역사에 등장한 네 왕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들 모두는 하나님 앞에 악한 자였다는 것이고 또한 모두 외국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것이다
. 따라서 그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교훈 해 준다. 첫째, 사람은 범죄 할수록 자유를 상실하고 속박되어 살게 된다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는 자였으나 더 큰 향락을 얻고자 하여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함으로 범죄 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모든 자유를 상실했다. 그 때의 고통스런 삶의 모습에 대하여 시편은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32:4)”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죄의 길로 행하는 것은 죄의 길에서 더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사48:22)”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죄의 길을 택한다면 이로 인하여 우리는 더 많은 것들로부터 속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네 왕은 모두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모두 외국의 왕들에게 포로로 붙잡혀 갔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된다. 둘째, 이 역사는 우리에게 죄의 결과는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 물론 이것은 생물학적 유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문화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다. 실례로서 한 세대가 진리에서 떠나 세속적으로 살았다면 그들이 형성해 놓은 세속적인 문화는 다음 세대로 전달되고 이로 인하여 다음 세대도 세속적인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특별한 영적 각성(회개운동)이 없다면 세대가 더해갈수록 더욱 신앙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다의 마지막 역사는 유다의 역사 가운데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 유다의 역사 가운데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는 왕들(네 명의 왕)이 이처럼 연속적으로 통치한 경우는 없다. 오히려 한 왕이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였다면 그 다음은 경건한 왕이 나와서 유다를 다시 정화 했다. 이처럼 유다는 부패함 가운데서도 회개를 통해 회복의 은혜를 가져왔기 때문에 역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네 왕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악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로 인하여 형성된 세속화는 더욱 심화되어 결국 유다는 스스로 경건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게 됨으로 멸망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만일 네 명의 왕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경건한 왕이 있었다면 유다는 멸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6)” 그러므로 우리는 유다의 마지막 역사를 통하여 현 세대는 다음 세대를 위한 책임적 존재라는 것을 교훈 받는다.
 
역대하를 마치면서

이스라엘의 
600년의 역사(B.C1024∼586)를 통하여 주시는 계시의 말씀을 묵상하며 특별히 은혜 된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역대기를 통하여 주신 말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통하여 입증된 말씀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600년의 역사를 통하여 모든 시대 자기 백성들에게 무엇이 형통의 길이며 무엇이 패배의 길인지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역대기를 통해 주신 교훈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은 복된 삶을 위하여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둘째
, 역대기는 지도자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역대기는 우리에게 “0하나님의 역사는 지도자의 역사”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 따라서 어느 시대든지 합당한 지도자가 세워지면 그 시대는 복된 시대가 되고 합당하지 못한 자가 지도자로 세워지면 고통스런 시대가 된다. 유다의 역사를 볼 때, 경건한 왕이 통치하는 시대는 국가적인 부흥이 있었고 악한 왕이 통치 할 때에는 국가적인 시련이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기도해야 할 것을 말해 준다. 하나는 우리는 우리 시대에 합당한 지도자가 세워지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지도자라면 자신을 통하여 우리 세대가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 역대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언제나 기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역대기를 통하여 악한 왕일지라도 스스로 겸비하여 하나님께 나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심으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유다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메시지들 가운데 하나는 대하 7:14절의 말씀일 것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넷째
, 역대기는 형통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은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일을 기회로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사울왕으로부터 히드시야까지의 역사는 대력 600년이다. 통일왕국시대에 속한 세 명의 왕과 남쪽 유다 왕국에 속한 왕 이십 명 그리고 북쪽 이스라엘에 속한 왕 열아홉 명 총 마흔네 명의 왕들 가운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형통한 길을 걸었던 왕은 오직 한 사람 다윗과 요시아 뿐이었다. 물론 솔로몬,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히스기야 등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특출했던 인물들이 있었지만 시종여일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형통했지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강해졌을 때에는 하나님을 멀리했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축복도 중단 되었다. 그러나 다윗과 요시야만은 시종여일하게 하나님을 경외했다. 특별히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련의 때를 기회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형통할 때에도 그것을 기회로 만들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처럼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모든 일을 삶의 기회로 만들 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시간이 더해 갈수록 더욱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었고 자신을 경건한 사람으로 더욱 온전하게 세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