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하 주석

역대하 제35장 주석(요약자; 양인국)

손진길 2024. 2. 18. 16:08

역대하 제35장 주석(요약자; 양인국)

 

역대하35
 
35:1-6. “1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께 유월절을 지켜 첫째 달 열넷째 날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니라 2 왕이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직분을 맡기고 격려하여 여호와의 전에서 직무를 수행하게 하고 3 또 여호와 앞에 구별되어서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에게 이르되 거룩한 궤를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전 가운데 두고 다시는 너희 어깨에 메지 말고 마땅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섬길 것이라 4 너희는 이스라엘 왕 다윗의 글과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글을 준행하여 너희 족속대로 반열을 따라 스스로 준비하고 5 너희 형제 모든 백성의 족속의 서열대로 또는 레위 족속의 서열대로 성소에 서서 6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너희 형제들을 위하여 준비하되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전하신 말씀을 따라 행할지니라

요시야는 우상을 제거하고 성전을 정화 한 후 유월절 절기를 회복했다. 이처럼 요시야가 유월절을 회복시켰던 것은 그것이야 말로 이스라엘을 신앙의 공동체로 회복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갖는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출애굽 시 어린양의 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들이 구원 받은 날을 기념하여 이스라엘에게 영원히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하시고, 유월절이 있는 그 달을 그 해의 첫 달로 삼으라고 명하셨다. 이것은 유월절이 이스라엘의 모든 절기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임을 말해 준다. 유월절이 이토록 중요했던 것은 유월절은 구속받은 이스라엘이 일생동안 간직해야 할 신앙의 고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월절에는 하나님의 능하심과 자기 백성을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고 노예됨으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신 것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있다. 그러므로 유다 가운데 유월절 절기가 회복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신앙의 공동체로 회복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각각의 직분을 맡기고 그 직분에 따라 직무를 행하도록 했다. “또 여호와 앞에 구별되어서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에게 이르되 거룩한 궤를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전 가운데 두고 다시는 너희 어깨에 메지 말고 마땅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섬길 것이라(35:3)” 특별히 왕은 레위인들을 부를 때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이라고 불렀다(35:3). 이것은 당시 레위인들의 직임이 변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전까지 레위인들의 직무들 가운데 하나는 성막을 옮길 때마다 지성소 안에 모셔있는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옮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 한 후부터 성막을 옮기는 일이 자주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직무는 점점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로 변한 듯하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 한 후에는 레위인들에게 언약궤를 메어 옮기는 일은 더 이상 요청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요시야가 레위인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상기 시키며 “마땅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섬길 것이라”고 말함으로 자신들의 직무에 충실할 것을 권고한 것이다. 특별히 레위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반열에 따라 스스로를 성결라게 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것이었다.

35:7-9. “7 요시야가 그 모인 모든 이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 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삼만 마리와 수소 삼천 마리를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 8 방백들도 즐거이 희생을 드려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주었고 하나님의 전을 주장하는 자 힐기야와 스가랴와 여히엘은 제사장들에게 양 이천육백 마리와 수소 삼백 마리를 유월절 제물로 주었고 9 또 레위 사람들의 우두머리들 곧 고나냐와 그의 형제 스마야와 느다넬과 또 하사뱌와 여이엘과 요사밧은 양 오천 마리와 수소 오백 마리를 레위 사람들에게 유월절 제물로 주었더라

왕과 제사장 그리고 방백들과 레위인 두목들이 백성들에게 유월절 회생을 기증했다. 왕은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삼만과 수소 삼천을 주었고, 제사장들(힐기야, 스가랴, 여히엘)은 양 이천 육백과 수소 삼백을 주었고, 레위 두목들 곧 고나냐와 그 형제 스마야와 느다넬과 또 하사뱌와 여이엘과 유사밧은 양 오천과 수소 오백을 레위 사람들에게 유월절 제물로 주었다. 이처럼 그들이 유월절 희생을 기증한 것은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서 또는 미처 예물을 준비해 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 일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 유월절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축제가 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배려는 모두를 위한 축제가 되게 한다.

35:10-15. “10 이와 같이 섬길 일이 구비되매 왕의 명령을 따라 제사장들은 그들의 처소에 서고 레위 사람들은 그들의 반열대로 서고 11 유월절 양을 잡으니 제사장들은 그들의 손에서 피를 받아 뿌리고 또 레위 사람들은 잡은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12 그 번제물을 옮겨 족속의 서열대로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소도 그와 같이 하고 13 이에 규례대로 유월절 양을 불에 굽고 그 나머지 성물은 솥과 가마와 냄비에 삶아 모든 백성에게 속히 분배하고 14 그 후에 자기와 제사장들을 위하여 준비하니 이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번제와 기름을 저녁까지 드리므로 레위 사람들이 자기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을 위하여 준비함이더라 15 아삽의 자손 노래하는 자들은 다윗과 아삽과 헤만과 왕의 선견자 여두둔이 명령한 대로 자기 처소에 있고 문지기들은 각 문에 있고 그 직무에서 떠날 것이 없었으니 이는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그들을 위하여 준비하였음이더라

여기 “이같이 섬기는 일이 구비하매”라는 말은 유월절은 준비함으로 지킬 수 있는 절기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제사장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을 할 때, 그리고 레위인들이 자기의 직무가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행할 때, 마찬가지로 백성들이 서 있어야 할 위치에 서 있을 때 비로소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에 따라 지킬 수 있었다. 물론 유월절뿐만 아니라 평소 성전에서 드리는 모든 제사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양을 잡는 일과 백성에게 나누어주어 여호와께 드리게 하는 일 그리고 유월절 양을 불에 굽거나 삶아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일 등, 모든 일을 각각 맡은 직임에 따라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행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예배는 준비함으로 드릴 수 있는 것이라는 영적 원리를 교훈해 준다.

35:16-19. “16 이와 같이 당일에 여호와를 섬길 일이 다 준비되매 요시야 왕의 명령대로 유월절을 지키며 번제를 여호와의 제단에 드렸으며 17 그 때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이 유월절을 지키고 이어서 무교절을 칠 일 동안 지켰으니 18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19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지 열여덟째 해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그들은 유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한 후에 정한 날짜에 유월절과 연이어 무교절을 지켰다. 18절은 이때 유월절을 지킨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요시야는 이처럼 유월절을 성대히 지킴으로 반신앙적인 문화(우상들과 그 제단들)를 제거한 후 그 자리에 신앙적인 문화(유월절)를 채웠다. 제거하는 일만 하고 그것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을 창조하지 못한다면 바른 신앙의 정착은 어려울 것이다. 요시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왕권을 가지고 이처럼 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했다. 특별히 요시야가 다른 어떤 절기보다도 유월절을 이처럼 지켰던 것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반드시 고백해야할 신앙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통하여 이 신앙의 고백을 회복할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전히 설 수 있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 볼 때 이런 이유로 인하여 유월절은 언제나 이스라엘의 영적 생활을 풍요롭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영적 침체 가운데 있을 때에는 회복의 은혜를 가져다주었음을 알 수 있다. 실례로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장 필요로 할 때 가나안이 바라보이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수5:10), 유다가 부패하여 영적 회복을 필요로 했을 때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예루살렘으로 초청하여 유월절을 지켰다(대하30:1-27). 유월절이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생활에 어떤 형태로든 새롭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절기의 내용이 구속의 은혜를 계시해 주고 있고 절기를 지키는 기간이 칠일이므로 세속적인 일로부터 벗어나서 충분히 영적 축제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유월절이 무교절과 함께 팔일 동안의 특별집회로 볼 때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영적 생활의 진보 또는 영적 침체로부터 회복의 은혜를 가져오기 위하여 요청되는 특별 집회를 갖고자 할 때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영적 원리를 교훈 받을 수 있다.

첫째, 특별 집회는 참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하심과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월절 절기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구원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속의 은혜를 보게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갖고자하는 특별집회의 내용이 참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하심을 보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임하는 은혜가 무엇인지 보게 한다면 이런 특별 집회는 참여자 모두에게 영적인 풍성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둘째, 특별 집회는 참여자로 하여금 세속으로부터 자유 하여 영적인 일에 관심을 집중할 만큼 충분한 기간이 주어져야한다. 우리가 드리는 공적 예배와 특별 예배 사이에 나타나는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기간이다. 예를 들면 주일 예배는 한 주일에 한번 정해진 날에 교회에 나와서 한 시간 정도 드리는 예배다. 그러나 주일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세속적인 관심으로부터 벗어나서 영적 관심에 집중하게 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특별집회는 이처럼 공적 예배가 가지고 있는 한계들로 인하여 오는 영적 빈곤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갖는다. 따라서 특별 집회가 자신의 목적을 충분히 이루고자 한다면 참여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일에 관심을 집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한다.

셋째, 특별 집회는 준비함으로 이루어질 때 은혜가 된다. 요시야왕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배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그들의 직무에 충실할 것을 명했고 또한 자신의 짐승들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줌으로 그들이 유월절 절기 예배에 나올 때 하나님께 드릴 번제물을 가져 올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따라서 본문은 “이와 같이 당일에 여호와를 섬길 일이 다 준비되매”라고 말함으로 유월절 절기 예배를 위하여 충분히 준비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은혜로운 예배는 예배자들의 준비로 인하여 이루어진다. 특별히 이 원칙을 오늘의 우리 가운데 적용한다면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예배 순서를 담당하고 있는 자들이 예배를 위하여 충분히 준비 되어야하고 또한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이 준비 되어야한다. 준비된 예배는 참여자 모두로 하여금 신령한 은혜를 가져다 주지만 준비 없이 드리는 예배는 은혜를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준비 없이 예배를 드리면서 은혜 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일뿐이다.

이 유월절은 요시야가 왕위에 있은 십팔 년에 지켰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십 사세였다. 이 나이는 그가 한 나라의 왕으로서 충분히 자신의 왕권을 행사할 나이였다. 그러므로 그는 영적인 지도를 받을 때에도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스스로 독립적일 때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외했다.

35:20-27. “20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왔으므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21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23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 24 그 부하들이 그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그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그가 죽으니 그의 조상들의 묘실에 장사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25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26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한 모든 선한 일과 27 그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행적은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여기 “이 모든 일 후”란 요시야가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한 후를 말한다. 이때 애굽의 느고가 유브라데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왔다. 느고가 갈그미스를 치러 가기 위해서는 유다를 통과해야 했다. 느고는 요시야에게 자신이 유다로 올라 온 것은 그를 치기 위함이 아니고 갈그미스를 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하며 요시야에게 양해를 구하였으나 요시야는 듣지 않았다. 22절은 보면 느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은 요시야의 실수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 말씀은 요시야가 애굽과 싸우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가 애굽과 싸우려고 했던 것은 그가 이 전쟁에 나갈 때 먼저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윗은 언제나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께 물어 보았다. 그리고 믿음의 왕들이 전쟁에 나갈 때에도 이 원칙은 지켜졌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선지자들을 보내주신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왕들로 하여금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요시야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 전쟁에 나갈 때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그가 어째서 이와 같은 원칙을 지키지 않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이 원칙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하여 그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요시야는 느고를 저지하기 위하여 므싯도로 나갔다. 느고는 요시야와 싸우기를 원치 않았지만, 요시야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결국 적병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당하였다. 그는 신하들에 의하여 급히 예루살렘으로 후송 되었으나 결국은 죽었다.

우리는 요시야 이후의 유다 역사를 통하여 그의 죽음이 유다에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다주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이후 모든 왕들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다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요시야의 죽음은 당시 그를 통해 유다의 회복을 바라던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큰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