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를 뚫는 햇살(손진길 소설)

가지를 뚫는 햇살20(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4. 1. 30. 10:03

가지를 뚫는 햇살20(손진길 소설)

 

7. 청와대 비서실을 떠나는 서운갑 박사

 

서운갑 박사가 청와대에서 안보특보로 일하기 시작한 시점이 1981410일이다. 그런데 그 시기가 참으로 묘하다. 왜냐하면, 33일에 한국의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이 한달 후에 서박사를 안보특보로 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서운갑은 작년 19808월에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국보위 전두환 상임위원장이 한국의 제11대 대통령이 된 이후에 국내외적으로 처하고 있었던 두가지의 위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하나는, 신군부의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이 이제는 유신헌법에 의거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기에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에 있어서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또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한국경제가 추락하고 있다. 경제를 회생시키지 못하면 그는 신군부 출신의 대통령으로서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그 타개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는 이듬해 곧 19811월말 2월초에 미국을 방문하여 갓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난 것이다. 비록 미국의 수도인 동부의 워싱턴 DC로 바로 가지 못하고 서부의 LA에 들린 다음에 백악관으로 가는 수모를 당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기에 일단 대외적인 정통성은 마련된 셈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요구는 이제 유신시대를 마감하고 문민정부로 가는 토대를 확실하게 마련하라는 것이다. 그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전두환 대통령은 귀국하자 마자 유신헌법을 대체하는 5공화국 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정하고 새로운 헌법에 의거하여 장충체육관에서 7년 단임으로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 것이다;

그와 같이 헌법상 유신시대를 끝내고 198133일에 한국의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은 이제 추락한 경제를 회복하기 위하여 그 방안을 모색하기에 바쁘다. 그는 4월에 안보특보를 임명하고 곧 이어 김재익(金在) 경제수석과 서석준(徐錫) 상공부장관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6월 하순에 아세안 5개국 순방에 나선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태국, 필리핀, 싱가폴 등 아세안 5개국은 한국경제가 회생하기 위하여 2가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안정적인 천연자원의 공급기지가 될 수 있다. 또 하나는, 수출시장의 다변화를 통하여 획기적으로 한국의 수출을 증대할 수 있는 주요 대상국인 것이다.

그리고 필리핀 외의 4개국은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한국이 경제적으로 크게 진출하는 것이 안보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 점을 익히 알고 있는 서운갑 안보특보이기에 그는 대통령의 아세안 5개국 순방계획에 적극 찬성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1923년생인 서운갑 박사는 자신보다 15년이나 연하인 김수석과 서장관에 대하여 굉장히 호의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동기동창인 두 사람 곧 1938년생 김재익 수석과 서석준 장관의 경제적 외교적인 한국의 진로모색이 안보적 측면에서도 매우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운갑 특보는 1981년이 저물기 전에 두사람에게 제안한다; “대통령님이 금년에 아세안을 순방하여 좋은 성과를 얻었으니 내년에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캐나다를 방문하여 경제적 안보적 이익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일찍이 서울대학교에서 외교학을 전공한 바가 있기에 두사람은 서박사의 의견이 무슨 의미인지 금방 알아듣고 있다. 자원외교를 위하여 아프리카 주요국과 캐나다 순방이 유익하다. 더구나 한국의 수출을 다원화하고 북한과의 외교전쟁에서 우위를 점하자면 아프리카 주요국을 방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결과 19828 17일부터 그 달 말일까지 케냐, 나이지리아, 가봉, 세네갈 등 아프리카 4개국 북아메리카의 캐나다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방문하게 된다;

 그와 같이 한국경제를 되살리기 위하여 진인사(盡人事)의 노력을 한 결과 외생적인 3저 현상이라는 대천명(待天)의 도움이 나타나서 한국의 경제는 1982년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기록하게 된다.

그와 같이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자 한국은 북한에 대하여 완전하게 외교적 경제적 우위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를 느끼면서 이듬해 1983년에 들어서자 서운갑은 이제는 자신이 청와대 비서실에서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안보문제가 잘 풀릴 것으로 보고 있다. 더구나 12월이 되면 자신의 나이도 어느 사이에 만으로 60살이 된다.

이제는 남은 활동기간이 있다고 하면 한번 달리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만약 청와대를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가 공직을 선호하게 되면 두가지 길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임명직인 장관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선출직인 국회의원이라는 선거에 나서는 것이다.

과연 그 두가지 외에 다른 길이 없을 것인가?’ 서운갑 박사의 생각이 거기에 미치고 있다. 1983년 봄에 깊은 생각을 거듭한 결과 서운갑은 비서실장을 통하여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한다. 그저 일신상의 사정이라고 적은 그 사직서가 다행히 수리가 된다.

서운갑은 나이 60세를 앞두고 관직을 벗어난다. ‘그 다음에 그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1983년 가을에 그 옛날 1954년부터 3년간 그가 공부했던 호주 시드니로 아내 황옥주와 함께 떠난 것이다;

그 옛날에는 서운갑이 처자식을 한국에 두고서 혼자 호주로 가서 시드니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랑하는 아내 황옥주와 함께 호주 시드니로 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과연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한편, 호주에서 의사생활을 오래하고 있는 (Paul)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서운갑이 부인과 함께 시드니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받게 되자 굉장히 기뻐한다. 그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시드니대학병원에서 서울의 서운갑 박사로부터 전화연락을 받았다. 이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라고 리셉션에서 말하기에 무심코 전화기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26년전에 헤어진 서운갑의 음성이 전화기에서 울려 나오고 있는 것이다; “How are you Paul? This is your old friend Ungap Suh. Long time no see! Your parents Pastor Peter and Sarah, they still live in Sydney?... “.

1957년 봄에 시드니에서 서울로 떠난 서운갑 박사의 음성이기에 이 너무나 반가워서 금방 대답한다; “안녕하세요? Dr. Suh, this is Paul. Me and my parents miss you so much. How is it going?... “.

그날 전화상으로 서운갑피터(Peter Clark)목사 부부가 여전히 시드니 그 하숙집에 살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시드니대학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Paul Clark) 부부도 그 인근에 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따라서 서운갑은 부인과 함께 며칠 후에 시드니를 방문할 때에 어른들의 집에 들리겠다고 에게 말한다.

198310월초에 서운갑 부부가 시드니를 방문하고 시티의 인너서클(inner circle)에 있는 피터 목사의 집에 들린다. 나이 60세가 다 되어가는 서운갑을 만나자 80세의 노인 피터 목사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박사도 이제 나이가 들었어. 하기야 내가 벌써 80살이니까! 그동안 서울에서 잘 지냈어요? 참으로 반가워요!... “.

피터 옆에 앉아 있는 사라서운갑은 물론 황옥주를 한참 바라보다가 드디어 말한다; “운갑, 정말 잘 왔어요. 그래 옆의 레이디는 부인인가요?... “. 그 말을 듣자 황옥주가 일어나서 한국말로 자기소개를 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지만 남편으로부터 진작에 옛날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도 서박사는 계속 사라 부인에 대하여 말했어요. 만나 뵙게 되어 정말로 기쁩니다!... “.

피터 목사 부부는 아직도 한국말이 유창하다. 참으로 외국어에 능통한 부부이다. 그래서 그날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그 집에서 이야기 꽃을 피운다. 그리고 서운갑이 몇 달간 신세를 지자고 말했더니 쾌히 승낙한다. 피터 목사의 말이 익살스럽다; “그런데 서박사, 하숙비는 선불이야. 게다가 오래 머물게 되면 할인혜택도 있어요. 하하하… “.

그날 저녁에는 시드니대학병원에서 근무를 마친 이 부인과 함께 부모님의 집을 방문한다. 그의 첫마디가 다음과 같다; “Hi, Ungap, how did you find my work phone? More than 25 years passed since you left Sydney!... “.

그 말에 서운갑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Paul, you studied at medical school in Sydney University at that time so I guess that you work at the Sydney Hospital. And I found that you are a famous specialist and professor in Sydney University and Hospital. Nice to see you again, Paul! This is my wife Mrs. Hwang”.

그 말을 듣자 이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 황옥주에게 인사를 하면서 자신의 아내 수지(Susie)를 소개한다. 그러자 사라 부인이 나서서 황옥주수지 사이의 대화를 통역해준다. 참으로 자상하면서도 친절한 부인이 피터목사의 아내 사라인 것이다.

서운갑 부부는 시드니에서 3달간 지낸다. 피터 부부와 함께 생활하고 있기에 별로 불편하지가 아니하다. 그 옛날에 그들 부부의 집에서 3년이나 유학생활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시드니를 둘러보고 이웃도시 캔버라를 방문하고 보니 호주의 변화가 눈에 뜨이고 있다;

많은 이민자들이 호주의 시드니로 몰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동행하고 있는 피터목사가 말한다; “운갑, 지난 1975년에 월남전쟁이 끝나자 그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사람들이 호주로 많이 들어왔어요. 그들이 주로 이곳 시드니에 자리를 잡았지요. 우리 호주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함께 참전한 국가의 베테랑들을 우대하고 있어요. 따라서 우리나라의 재향군인회인 RSL에서 한국군 출신에게 동일한 대접을 하고 있지요.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요”.

서운갑은 정치학자이다. 따라서 전후에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가 미군이 참전하고 있는 전장에 언제나 함께 참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덕분에 호주와 뉴질랜드를 이웃 강대국들이 무력으로 침략하고자 하는 생각을 아예 접고 있다. 오세아니아를 침범하면 그것은 미국을 침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특히 호주의 북방에는 인구가 대단히 많은 서남아의 강대국과 남태평양의 큰 나라가 버티고 있다. 그들은 호주에 자국민을 많이 이주시키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호주는 전통적으로 서양백인들의 국가라는 정체성을 잃지 아니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러므로 호주는 같은 영국태생의 신대륙국가인 미국을 군사적으로 크게 의지하고 있으며 미국이 가는 전선에서는 언제나 강력한 우방으로 그 한쪽 팔이 되고 있는 것이다. 뉴질랜드의 군사적인 입장도 호주와 같다.

따라서 호주군과 뉴질랜드군은 일종의 합동군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이름하여 안자크 군대(Anzac, Australia New Zealand Army Corps)인 것이다;

 다만 하나의 차이점은 호주가 시민권자에게 많은 특혜를 주면서 국가를 지키는 근간으로 삼고 있는 반면에 뉴질랜드는 선출직 피선거권을 제외한 모든 특혜를 영주권자에게도 시민권자와 동일하게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차이가 어째서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호주의 시드니에 3개월간 머물면서 서운갑 박사는 그 점에 관하여 자료조사를 좀 했다. 그 결과 그는 호주와 뉴질랜드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새삼 발견하고 있다;

(1) 첫째로, 영국정부와 왕실이 남반부에 있는 호주대륙과 뉴질랜드 섬을 탐험하고서 뉴질랜드를 더욱 선호했다. 그 이유는 호주는 대부분이 사막으로 되어 있고 해안 쪽에만 쓸만한 땅이 존재하고 있는 대체로 메마른 지역이지만 뉴질랜드는 마치 유럽의 섬인 영국처럼 기후도 좋고 산천이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1)   특히 남섬의 일부는 영국의 여왕이 별장을 두고서 살아도 좋을 정도로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 이름이 퀸스타운(Queenstown)이다. 따라서 개척초기에 호주의 뉴 사우스 웨일즈 주지사가 뉴질랜드를 호주에 달라고 청원했을 때에 그것을 불허하고 만 것이다;

2)   그리고 호주에는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영국의 대도시에 모여 살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불온한 죄수들을 끌고가서 신대륙을 개척하게 했다. 자연히 호주의 처음 개척자들은 영국의 죄수 아니면 간수라고 하는 이야기가 생겨나고 있다.

3)   그러나 뉴질랜드에서는 그것이 아니다. 영국정부가 온건한 성향의 스코틀랜드 농민출신인 도시빈민들을 주로 뉴질랜드로 보낸 것이다. 그에 따라 영국국왕에 대한 충성심과 영국인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은 뉴질랜드 이민자에게서 왕성하다.

4)   그 반면에 호주에서는 가능하면 영국국왕을 법적으로 완전히 버리고 명실상부한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여론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호주정부는 미국을 좋아하고 그 제도운영을 호주에 이식하기를 선호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호주의 복지제도가 미국을 따라갈 공산이 큰 것이다.  

(2) 둘째로, 영국정부에서는 호주대륙을 정복할 때에 원주민 어보리진을 학살하고 살아남은 자를 모조리 아주 메마른 지역 북서쪽으로 내쫓았다. 그것은 미국이 원주민 인디안을 학살하고 소수만 남겨놓은 것과 같다. 그러나 뉴질랜드에서는 그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영국군이 상륙하여 원주민 마오리들과 전쟁을 벌였지만 중간에 철수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마오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용감한 전사(Once were Warrior)들이었기 때문이다.

1)   그 결과 1842년에 와이탕이에서 영국정부는 선교사들을 내세워서 뉴질랜드 섬인 아오테아로아(Aotearoa)백인을 다스리는 자치정부를 수립한다는데 있어서 마오리의 추장들과 합의했다. 그것이 마오리 말을 라틴어 철자로 옮겨 놓은 오리지널 마오리 버전’(Maori Version)의 주요내용이다;

2)   그러나 당시 영국선교사들이 영어로 만들어 놓은 영어버전’(English Version)의 내용은 그와 다르다. 한마디로, 마오리족장들은 연명으로 서명하면서 영국의 국왕에게 주권(Sovereign)을 양도한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

3)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영국의 국왕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 받고 있다고 하는 뉴질랜드 정부에서는 어디까지나 영어버전이 옳다고 전제하고서 헌법과 법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그리고 영국에서와 같은 훌륭한 복지제도를 운영하면서 원주민인 마오리들에게 그 혜택을 줌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사전에 잠재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다만 하나의 문제점은 모국인 영국에서 뉴질랜드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영국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언젠가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여 뉴질랜드의 시민권을 신청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실정이므로 뉴질랜드정부에서는 영주권자에게도 시민권에 준하는 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5)   예를 들면, 65세 이상이 되면 시민권자가 아닌 영주권자에게도 연금(Superannuation)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생에게 지급하고 있는 학생수당(Student Allowance) 역시 시민권자 뿐만 아니라 영주권자에게도 주고 있다.

그와 같은 구체적인 차이를 파악하고서 서운갑 박사는 고개를 크게 끄떡이고 있다. 먼 훗날 호주와 뉴질랜드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계속 미국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유럽식 국가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아시아의 국가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인가?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 그러한 이슈까지 생각해보는 나름대로 행복한 서운갑 박사이다. 그 다음에 그는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