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를 뚫는 햇살(손진길 소설)

가지를 뚫는 햇살18(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4. 1. 24. 15:35

가지를 뚫는 햇살18(손진길 소설)

 

197719일 일요일에 고명딸 서민경이 남편 유태삼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결혼하여 젊은 부부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기에 부모인 서운갑황옥주는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딸이 무사히 박사학위를 받아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공항에서 딸을 떠나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옥주는 마음이 울적하여 차안에서 남편 서운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보, 나는 딸 민경이 서울을 떠나버리고 나자 마치 한쪽 가슴이 텅 빈 것만 같아요. 내가 그동안 똑똑한 딸을 마치 친한 동무처럼 의지하고 온갖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이제 어떻게 하지요?... “.

그 말을 듣자 서운갑이 대답한다; “허허허, 별 소리를 다 들어봅니다. 당신에게는 마포집에 맏며느리가 있지 않습니까? 며느리 최영미가 시누인 민경이 못지않게 심성이 착하고 똑똑합니다. 그러니 당신은 금년에 2돌 반이 지난 손주 장석이를 더 자주 돌보면서 며느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잘 지내시면 됩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 사이에 민경이가 우리 곁에 돌아올 것입니다, 허허허“.

그 말에 황옥주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한다; “여보, 당신 말이 맞아요. 우리 곁에는 맏며느리 최영미가 있고 또 장손인 서장석(徐長錫)이 잘 자라고 있지요. 그리고 장남 경일이가 사법고시 발표를 목전에 두고 있고요. 며느리 최영미가 지금 둘째아이 해산을 앞두고 있으니 내가 집에서 장석이를 더 많이 돌보아주어야 하겠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서운갑황옥주 부부가 마포집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자 며느리 최영미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마당으로 나와서 시부모에게 인사를 한다; “공항에 잘 다녀오셨습니까? 아가씨는 미국으로 잘 떠났습니까?... “.

황옥주서운갑이 웃으면서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며느리가 무거운 배를 두 손으로 잡으면서 급히 말한다; “그런데그런데지금 진통이 막 시작되고 있어요. 아파요. 빨리 병원으로 가고 싶어요. 아버님, 방에서 자고 있는 장석이를 좀 돌보아주세요!”.

그 말을 듣자 서운갑이 급히 대문 바깥으로 나가서 차를 골목에 세워 두고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운전기사 장씨에게 말한다; “우리집 며느리가 마침 산기가 있으니 미안하지만 운전을 좀 해주세요. 내 집사람이 며느리를 데리고 인근 산부인과에 가야 하니까요!”.

잠시 후에 황옥주가 몸이 무거운 며느리 최영미를 부축하여 문밖으로 나온다. 서운갑이 기다리고 있다가 뒷좌석 차문을 활짝 열어준다. 두사람은 남편의 차를 타고서 급히 가까운 산부인과로 출발한다. 그것을 보고서 서운갑은 며느리 방으로 들어가서 손자 서장석이 곤히 자고 있는 모습을 살핀다.

얼마 지나지 아니하여 장남 서경일이 집으로 돌아온다. 서운갑이 아들에게 장석의 에미가 산통이 시작되어 인근 산부인과로 갔다고 알려준다. 서경일은 아내가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고 있는 산부인과 의원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부친에게 자고 있는 장석이를 부탁하고서 급히 산부인과를 찾아간다.

잘 자고 있던 손자가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운갑이 오래간만에 손주를 품에 안아본다. 3살이 되어가는 손주이므로 제법 무게감이 있다. 그런데 2시간이 지나자 아내 황옥주가 혼자서 귀가를 한다.

경과가 궁금하여 그녀에게 서운갑이 묻는다; “며느리는 어떻게 하고 혼자서 오나요?”. 별로 급하지 않게 황옥주의 천천히 웃으면서 대답한다; “거참, 신기하게도 산부인과에 도착하니 산모의 산통이 줄어들었어요. 게다가 나중에 자기 남편이 오니까 최영미는 하나도 아픈 것 같지 않았어요. 그러니 나는 당신을 보려고 얼른 집으로 왔지요, 호호호“.

그렇지만 그날 일찍 산부인과에 입원을 시킨 것이 다행이다. 산모가 크게 고통을 느끼지 아니하고 다음날 오전에 남아를 순산했기 때문이다. 110일은 월요일이라 서운갑이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집에서 전화가 온다. 대뜸 아내 황옥주가 말한다; “여보, 우리 둘째 손자는 몸무게가 3.8킬로그램이나 나가네요. 아기도 산모도 모두 건강해요. 그리 아시고 근무 잘하고 오세요”;

그날 근무를 마치고 귀가한 서운갑이 아내 황옥주에게 말한다; “여보, 며느리가 순산을 했다고 하니 내가 기분이 좋구려. 그래 둘째 손자 이름을 무엇으로 지어주면 좋겠어요? 당신 생각을 말씀해보세요”. 그 말을 듣자 황옥주가 대답한다; “새삼스럽게 제게 왜 물으세요. 당신이 작명에는 소질이 있잖아요. 그러니 이번에도 이름을 잘 지어주세요!”.

그 다음날 서운갑이 아무 언급이 없이 출근을 한다. 그런데 그날 아들 서경일이 모친 황옥주에게 말한다; “어머니, 아버지께서 오늘 출근하시기 전에 제게 아기 이름을 지어 주셨어요. 서장석(徐長錫)의 동생이니 서차석(徐次錫)으로 부르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도 그 이름이 좋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듣자 황옥주가 웃으면서 말한다; “호호호, 경일아, 너의 아버지도 이제는 늙으셨는가 보다. 젊은 날에는 항상 일등, 장원급제를 하려고 무던히 애를 쓰시더니 이제는 차석으로 급제를 하더라도 좋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구나. 그래 그것도 나쁘지가 않구나. 한세상 살아가면서 꼭 일등만 할 필요는 없지 않겠니? 차석만 해도 충분한 것을 말이다, 호호호… “.

그렇게 여유롭게 둘째 손자의 이름을 지어서 그런지 4일이 지나자 사법고시 합격자 발표가 나는데 서경일의 이름이 들어 있다. 그 소식을 듣고서 가장 기뻐한 사람은 물론 당사자인 서경일이다. 그 다음은 그의 아내 최영미이다. 그들 부부의 기쁨에 부모들이 편승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날 소식을 듣고서 저녁에 사돈 최병화 교수가 먼저 서운갑에게 전화를 내고 있다; “사돈, 축하합니다. 집안에서 장남이 사시에 합격하였으니 경사입니다. 한턱 내십시오, 하하하… “. 그 말에 서운갑이 웃으며 대답한다; “좋은 따님을 우리집에 며느리로 주셔서 이러한 광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제가 깎듯이 대접을 하겠습니다, 하하하… “.

장남 서경일은 사시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교육을 전부 받은 다음에는 군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군의 장교가 아니라 법무관이다. 보직이 변경이 된 것이다. 그런데 3년이 지나자 1981년초에 서경일은 전역을 하고서 법무법인 법촌’(法村)에 변호사로 취업을 한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서경일의 아내 최영미7살이 되어가는 장남 서장석4살이 지난 차남 서차석을 집에 두고서 다시 대학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지 9년이 지나서 다시 다른 과목을 전공하고자 모교로 돌아간 것이다.

졸지에 2손자를 전적으로 돌보게 된 시어머니 황옥주1981년 봄 어느 날 저녁에 남편 서운갑에게 말한다; “여보, 내가 며느리 최영미를 다시 봤어요. 어떻게 이렇게 어린 아들을 둘이나 떼어놓고서 자신도 법공부를 하겠다고 모교에 학사편입을 할 수가 있나요? 거참, 알고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군요!”;

그 말을 듣자 서운갑이 허허라고 웃으면서 대답한다; “허허허, 여보,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그들 부부는 아직 젊어요. 그러니 며느리가 제 앞길을 개척하겠다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공부하고 있으니 우리가 도와주어야지요. 게다가 3년전부터 내가 백수가 되어 집에서 계속 지내고 있으니 당신 일이 절반으로 줄어들지 않소, 허허허… “.

그 말에 황옥주가 남편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말한다; “여보, 서운갑 박사님, 당신은 3년전에 어째서 청와대 수석 자리에서 그렇게 물러난 것입니까? 당신이 청와대를 떠나고 나자 이듬해에 박정희 대통령이 죽임을 당하고 유신시대가 끝났지요. 그리고 이제는 신군부가 정권을 잡고 전두환 대통령의 시대가 되어 있지요. 그러니“;

서운갑은 아내 황옥주가 묻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내심 짐작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대답할 수는 없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자신이 처리한 일들이 조국의 현대의 정치사와 직결되어 있는 민감한 사안들이라 함부로 입 밖에 낼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웃으며 답변 아닌 답변을 한다; “허허허, 내후년이면 내가 만나이로 60살이 됩니다. 그러니 높은 관직에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좋지요. 만약 내가 욕심을 내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선다고 하면 당선확률이 잘해야 반반이지요. 그렇게 되면 말입니다… “.

잠시 아내의 얼굴을 쳐다본 다음에 서운갑이 이어서 말한다; “당선이 되든지 아니되든지 간에 많지 않은 우리집 재산이 거의 날라가 버리겠지요. 그러니 그러한 모험을 할 필요가 없어요. 그 대신에 정치학박사이면서 청와대에서 오래 근무한 내가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는 분야가 따로 있을 거예요, 허허허… “.

그때 황옥주는 남편 서운갑 박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지를 못했다. 그런데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그것이 아니다. 서운갑 박사의 신상에 이상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한편, 1978년초에 미국 본토로 유학을 떠난 바 있는 서한국은 텍사스의 주립대학교 공과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끝내고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공장자동화를 위한 로봇개발에 관하여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동료 가운데 한국사람이 3명이나 더 있다. 강치성(姜治成)연규희(延奎姬) 그리고 지현옥(池賢玉)이 그들이다;

강치성서한국과 동갑이다. 그들은 1980년에 31살이다. 그런데 연규희지현옥28살 동갑인 여성이다. 그녀들도 로봇개발에 열심이다. 다만 여성들이라 한국에서 군대를 다녀오지 아니했기에 나이가 적을 따름이다. 모두가 한국의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였기에 미국의 대학원에서도 호흡이 척척 맞다.

진작부터 강치성연규희와 사귀고 있다. 그 모습을 부러운 듯이 보다가 하루는 두사람만 있는 자리에서 지현옥서한국에게 개인적으로 말한다; “한국이 형은 연애도 안합니까? 30살이 넘은 총각이 아직 아무도 사귀고 있지 않으니 거참 이상해요?... “.

그 말을 하고 있는 지현옥의 얼굴을 한참 서한국이 바라본다. 그리고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자 지현옥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고 있다. 그 모습을 보더니 서한국이 딱 한마디를 한다; “현옥씨,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 그래요, 나도 연애를 하고 이곳 미국에서 결혼하여 일가를 이루고 싶어요. 하지만… “.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지현옥이 얼굴을 들면서 서한국을 똑바로 쳐다본다. 그녀의 시선을 따갑게 느끼면서 서한국이 말을 맺는다; “우선은 박사학위를 취득해야 하니 그럴 시간과 여유가 없을 따름이지요. 이렇게 모든 것이 불완전한 진행형인데 어떻게 나같은 사람에게 교제를 하자고 말할 여성이 있겠습니까?... “.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나서 지현옥이 당돌하게 말한다; “여기에 한사람이 있지요. 금년에 내가 28살이 되고 한국이 형이 31살이 되지요. 그러니 우리 두 사람 여기서 살림을 차리고 살아요. 결혼식은 한국이 형 말 그대로 박사학위를 받고 취직을 하면 올리기로 하고요. 연규희강치성은 벌써 그렇게 살고 있어요. 우리도 그렇게 해요!”.

아무리 미국에 와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혼인 처녀가 그와 같이 말한다고 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특히 두 사람은 벌써 3년째 같은 대학원에서 같은 전공으로 공부하면서 함께 연구하고 있는 처지인지라 서로 알만큼은 알고 있는 사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제안을 여자가 먼저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에 들고 신뢰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서한국의 입장에서도 지현옥이 싫지가 않다. 자립심이 강하고 굉장히 똑똑한 여성이다. 심성이 착하고 별로 말이 없는 그녀가 모처럼 큰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면서 서한국이 조용하게 한마디를 한다; “현옥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좋습니다. 우리 그렇게 합시다. 우리 두 사람 냉수 한그릇을 떠놓고 약혼을 하고 동거생활(living together before marriage)에 들어갑시다. 그리고 “.

서한국이 다가와서 지현옥을 포옹한다. 천천히 말을 맺는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에서 취직을 합시다. 그리고 결혼식을 올리고 자녀를 생산하도록 하지요. 나는 그대와 함께 이곳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싶어요. 기회가 생기면 한국에도 출장을 나가서 살 수가 있겠지요!... “.

서한국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다. 지현옥이 갑자기 키스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상의 변화가 미국의 텍사스에서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지만 한국에 있는 양가의 어른들은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때부터 서한국지현옥은 미국에서 더 이상 외롭지가 아니하다. 두 사람은 신혼을 즐기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에 열심일 따름이다. 박사과정에서 연구생활을 같이하고 있는 다른 동료 곧 강치성연규희가 벌써부터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 네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한국의 부모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하고 있다.

그런데 1981년 늦은 봄에 57세가 지난 서운갑 박사는 서울에서 어떠한 일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