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를 뚫는 햇살(손진길 소설)

가지를 뚫는 햇살10(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4. 1. 5. 16:21

가지를 뚫는 햇살10(손진길 소설)

 

서운갑3년간 호주 시드니대학교(University of Sydney)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19573월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항공편으로 시드니에서 일본의 동경까지 들어가고 선박편으로 부산으로 귀국하고 싶었지만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국교가 없어서 여객선이 운항되지 아니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운갑은 자신이 홈스테이(home stay)하고 있는 집의 주인 피터(Peter Clark) 선교사에게 부탁하여 일본 동경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항공편을 알아보았다;

 그랬더니 피터가 호주의 공군에서 근무하고 있는 장교 앤드류(Andrew)에게 연락을 취한다. 앤드류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기에 동경에서 한국으로 들어가는 미군의 항공편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앤드류가 주선하여 준 덕분에 서운갑은 동경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미군비행기를 탈 수가 있었다. 그는 서울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을 타고서 경주까지 간다. 그 다음에 역전에서 시발택시를 대절하여 포항의 집으로 들어간다;

집에 도착하니 33개월만에 남편을 만나게 되는 아내 황옥주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리고 집에는 이제 5살이 된 고명딸 서민경이 사진으로 본 아버지를 기억하고서 처음으로 수줍어하면서 인사를 한다.

장남 서경일은 벌써 12살이므로 국민학교 6학년 졸업반이다. 그리고 차남 서한국이 국민학교 2학년이다. 그들은 오후에 수업이 끝나야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따라서 서운갑은 얼른 자전거포로 가서 양부모님께 귀국인사를 드린다. 점포 안쪽에 마련되어 있는 내실에서 아들의 절을 받으면서 부친 서달호와 모친 장화련이 감격스러워 한다.

서운갑이 벌써 33살이 넘었다. 11살에 양자로 데려와서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어느 사이에 22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서달호는 서운갑의 생부인 3종제 서달수 부부가 고맙다. 그 점은 그의 아내인 장화련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서달호가 아들 서운갑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들아, 무사히 다녀왔으니 되었다. 먼 나라 호주에 가서 뒤늦게 대학공부를 하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 그리고 내일은 천북에 가서 생가에 들러 보도록 하려 무나. 모두들 너를 보고 싶어 하실 거야!”.

서운갑은 그 말씀이 고마워서 대답한다; “, 아버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연세가 있으신데 어머니와 함께 계속 자전거포에서 지내시니 건강에 무리가 될까 저는 걱정이 됩니다. 정말 괜찮으신지요?... “.

그 말을 듣자 서달호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허허허, 내가 환갑과 진갑을 벌써 지났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사지와 육신이 멀쩡하다. 칠순이 될 때까지는 점포일을 볼 생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냥 집에서 뒷방 늙은이로 지내는 것보다는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이 훨씬 좋아. 때로는 친구들이 나를 다 부러워하고 있어, 하하하“.

그 다음에는 장화련이 말한다; “우리는 운갑이 네가 무사히 집에 돌아왔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내일 천북에 갈 때에 내가 음식을 좀 만들어줄 터이니 가져다 드리도록 하려무나. 이따 저녁에 집에서 보자꾸나!”.

그날 저녁식사시간에는 온가족이 참으로 오래간만에 두개의 상에 둘러앉아서 즐겁게 식사를 한다. 서운갑이 양부 서달호와 겸상을 하고 다른 큰 상에서는 양모 장화련과 아내 황옥주21녀와 함께 식사를 한다. 장남 경일이는 내년이면 중학생이 될 것이다. 벌써 청소년의 티가 나고 있다;

차남 한국이가 여동생 민경이와 함께 재잘거리는 것을 보니 오누이 사이에 이야기거리가 많은 모양이다. 식사를 하면서 아내 황옥주가 때로 다른 상에서 식사하고 있는 남편 서운갑을 슬며시 본다. 서로 좋아해서 결혼을 해서 그런지 자꾸만 그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그 눈길을 느끼면서 서운갑도 같은 마음이다.

이튿날 서운갑은 양모 장화련이 마련해둔 음식보따리를 들고서 자전거를 타고 천북 생가를 방문한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친부모와 친형 서운석 부부를 만난다. 그는 먼저 친부 서달수와 친모 우연희에게 절을 올린다. 그 다음에 가형 서운석과 형수 김영주에게 절을 하자 그들이 맞절로 화답한다.

서달수가 차남의 큰 절을 받고 나서 서운갑에게 말한다; “멀리 호주까지 가서 3년간 공부하고 돌아왔구나. 참으로 장하다. 우리는 다 잘 지내고 있다. 그래 양부모님도 무고하시지? 너의 가족들도 잘 지내고 있고?... ”. 서운갑이 즉시 대답한다; “, 다들 평안합니다. 그리고 양어머니께서 이렇게 음식을 마련해 주셨어요”.

나중에 서운갑은 다른 방에서 따로 친형 서운석을 만난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하나의 큰 봉투를 꺼낸다. 그것을 형에게 내밀면서 말한다; “, 내가 3년간 장학금을 받아서 호주에서 공부했는데 그것을 아껴 쓰면서 조금씩 모았어. 그것을 환전하여 한국돈으로 바꾼 것이야. 그리 큰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개천가 논을 2마지기 정도 살 수는 있을 거야. 살림 밑천으로 삼았으면 좋겠어!... “.

그 돈을 받자 서운석이 동생의 눈을 보면서 말한다; “운갑아, 고맙다. 그런데 앞으로는 그리 마음을 쓰지 아니해도 된다. 부모님도 건강하시고 나도 벌써 36살이 넘었다. 집안에 논이 10마지나 있으니 농사를 지어 우리 식구들은 먹고 살 수가 있다. 그저 네가 잘 되면 훗날 우리 아들 춘수(春洙)의 앞길이나 보살펴 다오. 그러면 된다”.

큰 욕심이 없고 성실하기 이를 데가 없는 친형이다. 그리고 형수 김영주(金瑛珠)도 살림솜씨가 야무지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둘이 나서 자라고 있는데 형은 아들 춘수의 앞날을 돌보아 달라고 동생에게 미리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서운갑이 알기로 형의 자녀는 운갑 자신의 자녀보다 3살씩이 많다. 그러므로 그가 새삼 그 나이를 따져보니 조카 서춘수(徐春洙)15, 바로 아래 여동생인 서미자(徐美子)11살 그리고 막내 여동생인 서미옥(徐美玉)8살이다.

차제에 서운갑이 형에게 물어본다; “춘수는 벌써 국민학교를 졸업했겠군요. 어떻게 중학교는 다니고 있습니까?”. 그 대답이 다음과 같다; “경주중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벌써 중3 졸업반이다. 내년에 경주고등학교로 진학시키고자 하고 있지. 내가 크게 배우지 못했기에 아들만은 꼭 고등학교까지 마치도록 만들고 싶다. 그러니 운갑이 네가 조카의 앞날에 신경을 좀 써다오. 이 부족한 형이 부탁한다!”.

그 말을 들으면서 서운갑은 자신이 양자로 갔기에 친형이 모든 책임을 떠맡고 있는 것만 같아서 괜히 미안하다. 그래서 순순히 대답한다; “,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조카 춘수의 앞날에 도움이 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노력할께.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를 다하고 있는 형과 형수에게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 말에 형 서운석이 허허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허허허, 오늘 내가 너에게서 별 소리를 다 듣는다. 장남이 나이 드신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야 집안에서 당연한 일인데 그것이 어찌 그리 칭찬을 받을 일인가? 오히려 내가 너에게 고맙지. 11살 어린 나이에 네가 부자친척에게 양자로 들어갔기에 우리집이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어. 그 돈으로 무려 10마지기의 논을 사서 지금까지 먹고 살고 있거든, 허허허… “;

그렇지만 조카가 자라고 있으니 돈이 필요할 것이다. 그 점을 짐작하고서 서운갑은 장학금 가운데 용돈을 아껴 모아 그것을 친형에게 쥐어 준 것이다. 그 정도라도 도와줄 수가 있어서 서운갑은 마음이 기쁘다. 그리고 앞으로 조카의 일에 신경을 좀 쓰고자 작심한다.

그는 천북을 다녀온 다음날 월성군청(月城郡廳)에 출근한다. 군수실로 가서 3년간 호주에서 공부하고 돌아왔음을 보고한다. 그러자 최군수(崔郡守)서운갑에게 말한다; “지난 3년간 해외장학금을 받고서 유학한후 이제 복귀하였다고 하니 앞으로 2년은 공무원생활을 계속해야 하네. 2년이 지나면 그때에는 이직을 해도 좋아. 그렇게 알고 다음주부터 신설된 복지과(福祉課) 과장(課長)으로 일해주기 바라네!”.

3년전 19541월에 서운갑이 해외유학을 떠날 때의 월성군수는 사무관 김학수(金鶴壽)였다. 그런데 지금의 군수는 사무관 최명권(崔明權)이다. 군수의 임면권이 전적으로 중앙정부에 달려 있으므로 그 사이에 군수가 바뀐 것이다;

그런데 다음주부터 복지과장으로 일하게 된 서운갑은 무엇보다 복지예산이 크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산은 부족하지만 제대로 일을 하자면 일거리가 너무 많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4년이 지났지만 전쟁고아와 과부가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건소 시설도 빈약하다.

그러므로 서운갑은 고아원과 고아들이 많이 다니고 있는 시골중학교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그는 그 문제를 오천덕 선교사와 협의를 했더니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월성군내에 있는 고아원의 실태와 그들을 수용하여 가르치고 있는 시골중학교의 실태를 조사하여 내게 자료를 주세요. 내가 미국의 교계에 나름대로 도움을 한번 요청해볼께요!”.

서운갑이 자료를 정밀하게 만들어 사진을 붙여서 제공하였더니 그해 말 크리스마스 때부터 미국의 교계에서 재정지원이 들어온다. 그것참 다행이다. 그렇게 보람을 느끼면서 1957년과 이듬해 1958년말까지 2년 동안 서운갑이 군청의 복지과장으로 근무한다. 그의 직급은 여전히 4()주사(主事)이다.

그런데 해가 바뀌어 19591월이 되자 그가 미국의 영토에 편입이 된 하와이로 다시 유학을 떠나고 있다. 그 이유는 서운갑에게 호놀룰루에 자리잡고 있는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박사과정을 5년간 공부할 수 있는 미국무성의 장학금(Scholarship)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사실 서운갑1957년과 19582년 동안 여러 차례 서울을 방문했다. 그 목적은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제임스(James) 영사를 만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영국대사관에 들러서는 토빈(Tobin) 영사를 또한 만난다. 서운갑이 호주로 떠날 때에는 주한 영국공사관이었는데 돌아와서 보니 1957년 그해에 주한 영국대사관으로 승격이 되었다고 토빈이 자랑스럽게 말한 바가 있다.

어쨌든 토빈이 친구 제임스서운갑 자신에게 소개해주었기에 그것이 고마워서 서울에 온 김에 그는 토빈의 사무실에 들리고 있다. 그와 같이 신의가 있는 서운갑토빈 영사가 좋게 보고 있다.

따라서 그가 친구인 제임스에게 은근히 압력을 가한다; “여보게 제임스, 서운갑은 신의가 있는 한국사람이야. 그에게 미국 국무성의 장학금을 주면 좋겠어. 그는 벌써 시드니대학교에서 Bachelor of Political Science 학위를 취득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제임스 영사가 서운갑에게 호의적이다. 그는 미 국무성에 서운갑의 프로필을 보고하고 이듬해 1958년 가을에 정말 5년간의 전액장학금(Full Scholarship)을 받아 준다. 그것은 학자금은 물론 기숙사 숙식비와 용돈까지 포함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보고를 듣고서 서운갑은 뛸 듯이 기뻐한다. 비록 35세의 생일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지만 미국의 대학원으로 유학 가는 길이 그에게 열린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내 황옥주에게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

그런데 서운갑의 이야기를 듣자 아내 황옥주가 기뻐하면서 또한 슬퍼한다. 그 이유는 남편이 정치학박사가 되는 것은 좋지만 5년간 떨어져서 지낼 생각을 하니 그것이 슬픈 것이다. 더구나 시부모님의 연세가 60대 중반이다. 큰일이라도 발생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그녀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보, 반드시 5년내에 돌아 오셔야 합니다. 그 이상을 저는 기다릴 수가 없어요. 칠순(七旬)이 되시는 부모님 생각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식들도 나이가 많아지고 있어요!”;

그 말을 듣자 서운갑이 확실하게 말한다; “5년이 아니라 그 안에 나는 일찍 박사학위까지 받아서 돌아올 생각이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계세요!”.

무엇이 서운갑에게 그렇게 자신을 불어넣고 있는지 당시에는 몰랐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흰소리가 아니다. 그가 5년이 아니라 단 4년만에 하와이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아서 19633월에 한국으로 귀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하여 훗날 202312월에 백세가 된 서운갑이 허허라고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처자식이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나는 35세가 넘어서 하와이대학교의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그러니 빨리 박사학위를 받아서 조기에 귀국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아요. 그래서 공부하면서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했지요. 빨리 내게 박사학위를 달라고요. 그것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아요, 허허허… “;

그러면서 서운갑이 덧붙이고 있는 말이 있다; “아내 황옥주가 나대신 고생이 많았지요. 그리고 양부모님의 건강이 좋으신 것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답니다. 그 분들이 장수를 하셨기에 내가 큰 걱정이 없이 전력으로 공부할 수가 있었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

서운갑이 하와이 호놀룰루로 출발하는 19591월에도 그곳으로 가는 항공편이 서울에서는 없다. 따라서 이번에도 그는 동경으로 가서 하와이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 그것이 참으로 불편하다.

그런데 하와이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 그해 19598월 하순에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로 가입이 되고 있다. 주민투표를 거쳐서 그렇게 확정이 된 것이다. 그에 따라 호놀룰루 마노아(Manoa)에 있는 하와이대학교가 졸지에 미국의 주립대학으로 승격된다;

그러자 미국의 국무성에서는 태평양 연안의 동아시아 국가와 인도양 연안의 서아시아 국가에서 인재들을 발굴하여 장학금 혜택을 받도록 널리 조치하고 있다. 그들 유능한 인재를 모아 하와이 주립대학교에서 공부시키고 친미(親美) 또는 지미(知美) 인사(人士)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과연 서운갑()이 오래 기억하고 있는 하와이에서의 추억은 어떠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