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를 뚫는 햇살(손진길 소설)

가지를 뚫는 햇살11(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4. 1. 8. 03:22

가지를 뚫는 햇살11(손진길 소설)

 

하와이대학교(University of Hawai)는 미국이 태평양 중심의 하와이 제도 오아후(O’Ahu)호놀룰루(Honolulu)에 가지고 있는 규모가 큰 종합대학교이다. 그러므로 미국정부는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전후(戰後)에 태평양국가로 크게 발전하기 위하여 동아시아의 우수한 인재를 그 대학원에 많이 받아들여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하도록 장학금을 제공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에 따라 전후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우수한 인재는 물론 그 옛날 대영제국에 속하던 인도양의 각국 인재들이 호놀룰루에 자리잡고 있는 하와이대학교의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다. 그러한 미국의 정책은 서운갑이 그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 더욱 강화되고 있다.

그 이유는 19598월 하순에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로 가입이 되고 호놀룰루의 마노아(Manoa)에 있는 하와이대학교가 미국의 주립대학으로 승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60년이 되자 2명의 한국인 젊은이가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는데 그 이름이 윤광일(尹光一)허숙(許肅)이다.

두사람의 전공은 다르다. 윤광일이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입학을 했는데 허숙은 정치학을 전공하기 위하여 입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국 국무성에서 제공하고 있는 전액장학금을 받고서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 공부하러 온 것은 동일하다. 그만큼 우수한 인재들이다;

1959년 봄부터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유일한 한국사람이 서운갑(徐運甲)이다. 그리고 그의 나이는 입학당시에 벌써 35살이다. 그에 비하여 같은 전공으로 한해 늦게 입학하고 있는 허숙5년 연하인 30살이다. 그는 부친과 숙부들이 모두 일제시대에 동경에서 공부하고 공학과 철학 그리고 정치학 등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만큼 허숙은 서울의 유력한 집안의 출신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일찍이 해외로 나와서 아예 하와이대학교 학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 다음에 미국무성 장학금을 받아 이제는 곧바로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정치학 석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학박사학위를 받기 위하여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으로 입학하고 있는 윤광일의 이력도 개인적으로 화려하다. 그는 머리가 좋아서 전후에 서울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한국은행에 입사하여 근무하다가 미국무성의 장학금을 받고서 이제는 전공을 바꾸어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그의 나이는 허숙보다 2살이 많은 32살이다. 그렇지만 서운갑보다는 3년 연하이다. 그렇게 쟁쟁한 인물 2사람이 1960년 봄부터 교정에서 마주칠 때마다 서운갑에게 선배대접을 하면서 인사를 하고 있다. 서운갑의 입장에서도 한국사람을 만나니 기분이 좋다. 따라서 밤늦게 공부를 하다가 간혹 호놀룰루 시내에 있는 맥도날드에 들러 2사람과 간단하게 식사도 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두사람이 서운갑에게 선배대접을 하는 이유가 사실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당시 한국사람으로는 보기 드물게 서운갑이 호주 시드니대학교에서 벌써 정치학을 공부한 특이한 경력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한국사람으로는 가장 먼저 미국무성의 전액장학금을 받고서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서운갑허숙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허숙 그대는 벌써 하와이대학교 학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는데 그때도 미국무성의 장학금을 받았는가? 자네는 미국에 나보다 먼저 진출했고 또한 미국에 대해서 나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는 인물이야!”.

그 말을 듣자 허숙이 슬며시 웃으면서 대답한다; “운갑 형, 그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집안에서 재정지원을 크게 하여 나를 하와이대학교로 진짜 유학을 시킨 것이지요. 그것이 미안해서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이제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는 미 국무성의 장학금을 받고 있지요, 하하하... “.

그 말에 서운갑이 깜짝 놀라고 있다. 전후에 집안 어른들이 돈을 모아서 허숙을 미국 하와이대학교에서 공부하도록 유학을 시켰다고 하면 보통 재력이 있는 집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본제국의 대학교와는 달리 미국의 대학교는 정말 학비가 엄청나게 비싼 것이다.

그 점을 눈치챘는지 허숙이 싱긋 웃으면서 부연설명을 한다; “우리 집안은 일찍이 구한말에 조선에서 손꼽히는 호남의 대지주였어요. 1930년대 말에 그 재산을 전부 처분하여 어른들이 경성에 올라와서 자리를 잡았지요. 그러니 윗대는 전부 일본의 동경에서 유학하고 저는 미국의 하와이에서 유학한 것이지요, 하하하“;

옆에서 두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광일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허허, 허숙은 정말 집안배경이 대단해요. 그에 비하면 우리 집안은 별로이지요. 일제시대에 지방에서 서울로 진출한 것은 맞는데 어른들이 별로 모아 놓은 재산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전쟁통에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다시 서울로 들어왔으니 생활하기가 더욱 어려웠지요. 그렇지만 어른들이 다시 서울로 들어온 것이 천만 다행이었어요. 왜냐하면… “.

새로운 이야기인지라 서운갑허숙이 귀를 기울인다. 그것을 보면서 윤광일이 간략하게 말한다; “서울에서 공부하였기에 나는 경기고에 이어서 서울대학 문리대로 진학할 수가 있었어요. 만약 지방에 살고 있었으면 그러한 명문고등학교와 명문대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을 마치자마자 돈을 벌고자 한국은행에 입사를 했지요.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오는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서운갑이 한마디를 한다; “역시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를 보내라는 말이 맞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경상도 바닷가 포항에서 줄곧 살아온 나는 대구에서 중학 5년을 마치자 고향에서 자영업을 하다가 나중에는 지방공무원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묘한 인연으로… “.

윤광일허숙서운갑의 이야기에 흥미가 있는 모양이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때 간략한 설명이 들려온다; 마침 친구의 부친이 미국의 선교사였지요. 그 덕분에 저는 영어를 배우고 또한 정부에서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호주에서 정치학을 공부할 수가 있었어요. 그 다음에는 미국무성의 장학생으로 이곳 하와이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지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보아야지요!”.

서운갑의 설명을 들으면서 두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떡이고 있다. 지방에서 그것도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사람이 영어를 배우고 호주와 미국에서 장학금을 받고서 유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인 선교사를 만난 것이 벌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2년반동안 정치학과 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그들 나름대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3사람이다. 그런데 1년 먼저 대학원공부를 시작한 서운갑이 역시 빠르다. 그리고 그가 박사학위논문을 쓰는데 있어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서운갑이 한국의 전쟁과 전후의 경제발전방향에 대하여 가장 먼저 논문을 구상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면서 하나의 체계적인 설명을 이끌어낼 수가 있는 이유는 다분히 고향에서 수년간 오천덕(David Paul Ross) 선교사의 도움으로 정치학과 국제관계를 배우고 그와 오래 토론한 결과로 보이는 것이다.

서운갑이 오천덕 선교사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한마디로, 이민국가인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개인적으로 능력만 있으면 새로운 국가인 미국에서 이민자들이 마음껏 자신들의 청운의 꿈을 펼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합중국은 그야말로 유럽의 백인들이 먼저 이민 와서 만들어 놓은 완전한 평등사회인 것이다;

빈부귀천이 없는 새로운 자유 자본주의 평등사회가 신대륙에 펼쳐져 있기에  유럽에서 건너온 젊은이들이 마음 놓고 제 꿈을 펼치기 위하여 전력질주를 한 것이다. 그 결과 18세기와 19세기 신생국가 미국의 경제적인 발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된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서자 2차례의 유럽전쟁의 발발로 미국은 영국에 군수물자를 대거 수출하면서 단숨에 세계의 패권국으로 올라선 것이다.

그와 같은 젊은 나라 기회의 땅이 어디에서 다시 탄생할 것인가?’, 그 점에 관하여 서운갑은 전후의 일본과 한국을 그 후보지로 손꼽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치루면서 열도의 모든 자원이 고갈된 상태이다.

그런데 천우신조로 1949년에 중국에 공산당정권이 들어서고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생함으로써 일본은 자유진영의 거대한 병참기지로서 역사 가운데 다시 등장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제국은 벌써 선진기술을 축적하고 있는 첨단선진국이다.

전후 일본의 경제구조가 국방산업을 중심으로 1950년대부터 다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불을 붙인 일본의 경제적인 발전은 군수산업에서 민생산업으로 옮겨가면서 단숨에 고도성장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라고 서운갑이 먼저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에 그는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가 되어 버린 한국사회를 상당히 독특한 시각으로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1)  첫째, 한국전쟁의 결과 양반과 상놈이라고 하는 오래된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계급구조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하는 차별적 유교질서가 완전히 버림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운 출발선 앞에 모든 백성이 서서 평등하게 새출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둘째, 미국식 자본주의사상이 주입되어 이제는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면 된다고 하는 새로운 사조가 만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경제발전의 동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3)  셋째, 거기에 높은 교육열이 신분상승의 근간으로 작용하고 있다. 머리만 좋으면 좋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로 진학할 수가 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성적만 좋으면 고시에 합격하여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을 수가 있다. 한마디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4)  넷째,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전후의 사회이므로 먹고 살 수 있는 길이라고 하면 하루 24시간 7데이로 일하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한국민들이다. 일년 365일을 하루도 쉬지 아니하고 일하려고 하는 소위 헝거리(hungry)근성이 있는 한국사람들이다. 처자식을 굶기지 아니하고 먹여 살리며 자녀를 교육시킬 수만 있다고 하면 어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고자 한다. 마치 스파르타 군인과 같은 한국인들이기에 앞으로 제대로 경제개발에 나서게 되면 그 발전의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라고 서운갑이 벌써 그의 박사학위논문에서 말하고 있다. 그것도 영어로 그렇게 작성하여 제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서운갑의 박사학위 제출논문을 심사하면서 1962년 가을학기에 하와이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들은 굉장한 흥미를 가지고 그에게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그 이유는 한해 전 곧 1961516일에 한국에서 군사쿠데타가 발생했는데 그 주동자들이 갑자기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하고서 정부주도로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실시하겠다고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이 어떠한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인지 알 수가 없는 형편인데 특이하게도 서운갑이 그에 대한 설명의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와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해하기가 쉽다. 따라서 심사위원들이 흥미를 가지고 질문하고 있는데 무려 1시간 동안이나 서운갑이 나름대로 유창한 영어로 논리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그 결과 서운갑은 단 4년만에 모든 과정을 마치고 있다. , 1963년초에 정치학박사학위를 받고서 그해 3월달에 벌써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박사과정 한해 후배인 허숙이 한마디를 한다; “운갑 선배, 정말 대단하십니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경륜이 있습니다. 4년만에 박사학위를 끝내고 있으니 존경스럽습니다. 차제에 제가 다소 도움이 될까 하여 한 말씀을 드려 두고자 합니다. 그것은 “;

서운갑의 환송파티를 하고 나서 개인적으로 따로 하고 있는 말이므로 허숙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의 말이 다음과 같다; “한국에 도착하시면 서울 인근 국방대학원에 근무하고 계시는 저의 숙부님을 한번 찾아보세요. 그 이름이 허달수(許達秀) 박사입니다. 연세가 50대 중반이고 민간인 교수이시지요“.

그 말을 듣자 서운갑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질문한다; “허숙, 국방대학원이라고 하는 말을 나는 처음 들어요. 그 학교가 어디에 있나요?... “. 허숙이 싱긋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럴 거예요. 작년 1962년초에 국방대학원이 시작되었는데 그 위치가 경기도 고양시 수색이지요. 제 숙부님이 그곳에서 국방연구원 시절부터 근무하고 계시기에 제가 좀 알고 있어요. 만나보시면 앞으로 진로에 도움이 될 거예요, 하하하“.

서운갑은 허숙의 집안이 서울에서 대단하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어른들이 정계와 재계에 발치가 넓다는 사실도 짐작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아니한다. 서운갑19633월 귀국하는 길에 서울에서 일부러 수색까지 찾아간다. 정문에서 근무하고 있는 위병들에게 물었더니 마침 허달수 교수가 평일이라 근무중이라고 대답한다.

위병이 참으로 친절하다. 일부러 찾아왔다고 말했더니 전화로 확인하고서 안내를 해준다. 서운갑이 교수실로 찾아갔더니 처음보는 허달수 교수가 만면에 미소를 띄면서 그를 환영하고 있다; “허허, 서박사, 참으로 잘 찾아왔어요. 나는 조카 허숙의 편지를 받고서 진작부터 그대를 만나고 싶어했어요. 내가 바로 허달수입니다, 하하하… “.

서운갑이 얼떨결에 허교수의 손을 공손하게 잡고서 자신의 소개를 간략하게 한다; “허숙이 말한 대로 제가 서운갑입니다. 이렇게 조카분의 소개로 허달수 교수님을 만나 뵙게 되어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저는 시골 출신입니다. 앞으로 여러가지로 지도 편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후학인 제가 많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허달수 교수가 허허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허허허, 내가 나이가 서박사보다 십 수년 앞서다 보니 어떻게 이곳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군요. 그러니 지도 편달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배워야 할 입장이지요. 어쨌든 참 잘 오셨어요. 나는 서박사가 하와이대학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고 오셨으니 가능하면 우리 국방대학원에서 같이 근무하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

참으로 허달수 교수는 솔직 담백한 사람이다. 그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동경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하였기에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있어서 한계가 있어요. 지금은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하니까요. 그러니 서박사가 이곳에서 교수진에 합류하여 학생들을 함께 지도해주면 좋겠어요!... “.

그 말을 듣자 서운갑은 고개를 끄떡이면서 허달수 교수로부터 국방대학원에 관하여 자세하게 물어본다. 그 결과 그는 포항에서 서울로 이사할 생각을 한다. 그때가 바로 19633월이다. 과연 서운갑의 서울생활은 어떠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