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를 뚫는 햇살(손진길 소설)

가지를 뚫는 햇살12(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4. 1. 10. 16:46

가지를 뚫는 햇살12(손진길 소설)

 

5. 서울에 진출하여 자리를 잡는 서운갑

 

19633월 하순에 서운갑이 포항의 집에 도착하자 아내 황옥주와 딸 서민경이 먼저 그를 반긴다. 무엇보다 서운갑은 아내의 그윽한 눈빛에서 남편이 빨리 하와이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기를 학수고대한 그녀의 오랜 바램을 깊이 느끼고 있다.

서운갑 역시 하루빨리 학위를 받고 처자식이 기다리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새벽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그런데 장남 서경일은 벌써 18살이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고3 졸업반이라서 대입준비에 바빠 미처 포항에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차남 서한국14살인데 포항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2학년이다. 좋은 고등학교로 진학시키기 위하여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많이 하고 있어서 그런지 하교시간이 늦다. 그러므로 서운갑이 귀국하여 포항의 집에 들린 그날 오후 3시경에는 일찍 하교하여 집에 돌아온 자녀가 막내인 딸 서민경 뿐이다;

민경이도 벌써 11살이며 국민학교 5학년이다. 서운갑이 하와이에서 박사학위를 얻기 위하여 만 4년 줄기차게 공부하는 바람에 그 사이 이산가족이 된 셈이다. 따라서 딸 민경이 한마디를 한다; “아빠, 축하해요. 그런데 하와이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엄마와 내가 보고싶지 않았어요?... “.

대답을 하는 대신에 서운갑이 힘차게 딸아이를 번쩍 들어서 품에 안아본다. 어느 사이에 덩치가 커져서 무게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금방 땅에 내려놓으면서 말한다; “그 사이에 우리 민경이가 몸집이 커졌구나. 이제는 아빠가 쉽게 안지를 못하겠다, 하하하“.

서운갑은 아내와 함께 방에 들어가서 한번 포옹을 한 다음에 하와이에서 가지고 온 큰 가방을 열어서 보여준다. 그녀에게 주기 위하여 사온 물건들이 많다. 그것을 가장 먼저 꺼내서 황옥주에게 준다. 그리고 아들 딸과 부모님에게 줄 선물도 아내에게 전한다. 마지막으로 서운갑은 큰 봉투를 하나 꺼내어 품에 간수한다.

그리고 그는 얼른 자전거포에 가서 양부모님께 귀국인사를 드리고자 한다. 서운갑이 크게 멀지 아니한 자전거포에 들리자 칠순이 가까운 양부 서달호가 아들 서운갑을 먼저 알아본다. 그가 급히 내실에 있는 아내 장화련을 부르면서 문간으로 아들 마중을 나간다.

서운갑은 반갑게 부친 서달호의 손을 잡으면서 내실로 들어선다. 모친 장화련이 잠시 누워서 쉬고 있다가 방안으로 들어서는 남편과 아들을 웃으며 맞이한다. 서운갑이 먼저 말을 건넨다; “어머니, 어디 몸이 불편하신 것이 아닙니까? 누워서 쉬시는데 제가 들어서고 있군요!... “.

그 말을 듣자 장화련이 손을 급히 가로 저으며 말한다; “운갑아, 아니다. 이 에미는 아직 건강하다. 나이가 70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자리보전이야 하겠느냐! 그저 봄이 되어서 그런지 춘곤증에 잠시 눈을 붙이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 이 에미에게 한번 와보아라. 이게 도대체 얼마 만이냐?... “.

양부모님을 한 자리에 앉게 한 다음에 서운갑이 큰절부터 올리면서 말한다; “부모님이 저를 잘 키워 주시고 또한 제 처자식을 잘 돌보아 주셔서 제가 계획보다 1년 일찍 박사학위를 받아서 귀국했습니다. 모두 부모님의 은덕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그 말에 부친 서달호가 웃으면서 말한다; “허허허, 모두 운갑이 네가 애써 공부하고 열심히 생활한 덕분이다. 우리 부모야 그저 옆에서 방해가 되지 아니하도록 지켜본 것 밖에 없다. 그리고 네 아내 황옥주가 정말 지극 정성이었다. 주일마다 자식들을 데리고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너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하더구나. 이제는 박사학위까지 마쳤으니 그렇게 장기간 해외에 나갈 일은 없겠구나! 그러면 되었다”.

그 말을 듣자 모친 장화련이 말한다; “운갑아, 네 아버지 말씀 그대로이다. 모두가 며느리가 애를 쓴 덕분이다. 네가 호주에 공부하러 갔을 때에 3년을 독수공방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네가 하와이에 박사학위 하러 갔기에 또 4년을 내리 독수공방을 했다. 그러니 이제는 해외에 그렇게 오래 혼자서 나가지 마라. 내가 부탁하마!”.

모친의 말을 들으면서 서운갑이 확답한다; “아버지,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는 처자식 옆에, 그리고 부모님 옆에 항상 붙어 있겠습니다. 그것이 지금부터 제가 할 일이지요!”.

그날 저녁에 온가족이 모여서 식사를 함께한다. 그 자리에서 서운갑이 한가지 상의를 한다; “귀국하는 길에 서울에서 근교에 있는 국방대학원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허달수 교수를 만났어요. 그가 저에게 제안했습니다. 그곳에서 함께 교수로 일했으면 좋겠다고요. 그는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저와 함께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한해 후배의 삼촌입니다. 그가 소개를 해서 만났고 또한 차제에 좋은 제안을 받았지요!... “.

그 말을 듣자 부친 서달호가 조용히 아들 서운갑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빙긋 웃으면서 말한다; “운갑이 네가 좋은 제안이라고 판단하면 그것으로 나는 되었다. 이제 내 나이도 칠순이 되어가고 하니 이곳 자전거포를 그만 정리하고 서울로 떠나가서 한번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 나는 찬성이다, 하하하… “.

그 말에 모친 장화련이 고개를 끄떡이면서 말한다; “나도 그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장손 경일이가 벌써 고3이야. 대구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성적이 좋아. 그러니 서울로 진학하면 좋겠구나! 그래서 나는 찬성이다”.

시부모님이 찬성하자 그제서야 아내 황옥주가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저도 찬성입니다. 박사학위를 얻었으니 이제는 서울에 가서 자리를 잡는 것이 좋겠지요. 특히 우리 3자녀의 장래를 위해서도 저는 수도인 서울로 진입하고 싶어요. 그러면 언제쯤 이사를 하면 되나요?... “.

그 말에 서운갑이 즉시 대답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그러면 우리 차남 한국이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 식사를 빨리 끝내고 자리에 앉아 있던 서한국이 아버지 서운갑의 얼굴을 쳐다보고서 대답한다; “아버지, 저도 좋아요. 서울로 이사가면 그곳 중학교에 전학하여 열심히 공부할게요. 그리고 서울의 명문고등학교에 한번 들어가 보이겠습니다. 저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어요, 아버지!”.

다음날 서운갑은 자전거를 타고서 천북에 있는 생가에 들린다;

친부모님을 뵙고서 절을 올린 다음에 다시 친형 서운석을 따로 만난다. 그 자리에서 이번에도 큰 봉투를 하나 전하면서 말한다; “, 이번에는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4년간 조금씩 장학금을 모은 것이야. 한화로 바꾸었으니 그것을 가지고 조카 춘수의 뒷바라지를 해주면 좋겠어. 그래 춘수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데?... “.

그 말을 듣자 서운석이 대답한다;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일찍 지원하여 군대를 갔다. 이제 만기 제대할 때가 거의 되었어. 춘수는 대학에 가고 싶어하는데 우리가 형편이 안되어서 그동안 걱정만 하고 있었어. 그런데 운갑이 네가 이렇게 거금을 내놓았으니 우리 부부는 고맙게 생각하고 이 돈을 오로지 춘수의 대학공부를 위해서 사용하도록 하마!”.

서운갑이 진지하게 묻는다; “, 그런데 춘수의 학업성적은 어느 정도였어요?”. 이번에는 형보다 먼저 형수인 김영주가 대답한다; “삼촌, 춘수는 고등학교에서 성적이 좋았어요. 형편만 되었으면 진작에 대구의 국립대학에 진학할 수가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 이번에 제대하면 대구에 가서 입시학원에서 공부하도록 뒷바라지를 할게요. 넉넉하게 대구에 있는 좋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니 한번 지켜보세요!... “.

그 말을 듣자 서운갑은 비로서 생가와 형의 가족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있다. 이번에 그가 형 부부에게 건네 준 돈은 문전옥답 3마지기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던 것이다. 그것이면 조카 서춘수가 국립대학교에서 4년 동안 공부할 수 있는 충분한 장학금이 될 수 있다.

포항에 돌아온 서운갑은 다음날부터 자전거포와 주택 그리고 주변에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을 전부 정리하느라고 바쁘다. 그 일에 2달이 소요가 되고 있다. 그 사이에 서운갑은 개인적으로 여전히 포항에서 선교사업에 바쁜 오천덕 선교사 부부를 만나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아내와 함께 두번이나 상경을 했다. 그것은 서울에서 살 집을 사전에 마련하기 위한 걸음이다.

서운갑 부부가 조사를 해보니 마침 그해 1963년에 박정희 정권이 획기적으로 강남지역을 편입하면서 서울시를 크게 확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좋은 고등학교는 여전히 강북에 있다. 그것을 보고서 그들은 마포지역에서 살 집을 구하고자 한다. 미리 살 집부터 매수를 한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서운갑의 가족은 양부모님을 모시고 19635월 말에 서울로 이사를 한다. 마포에 마련한 저택이 나름대로 대가족이 지낼 만하다. 이삿짐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서운갑은 오토바이를 한대 마련한다. 그것을 타고서 경기도 고양시 수색에 자리잡고 있는 국방대학원을 방문하는 것이다.

벌써 필요한 인사서류를 보내 두었기에 크게 어렵지 아니하게 6월 보름부터 근무를 하도록 인사발령이 나고 있다. 그렇게 인사조치가 되자 허달수 교수가 자기일처럼 기뻐하면서 말한다; “서박사, 정말 잘 되었어. 이제는 나하고 같이 국제관계학과에서 학생들도 가르치고 함께 연구과제를 수행하게 되었어요. 기대가 커요, 하하하 “.

당시의 국방대학원에서는 장교들을 대학원에 입학시켜서 정책과정을 공부하게 한다. 아직 석사과정이 설치되어 있지 않기에 1년 동안 교육을 받고 과제연구에 함께 참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국방대학원에서 2년간 근무하는 동안에 서운갑은 좋은 연구과제를 만나 전력투구를 하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하면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연구과제이다. 서운갑이 그 연구과제에 매력을 느끼고 깊이 파고든 것은 이유가 두가지 있다; 하나는, 그가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논문을 작성하기 위하여 수집한 자료 가운데 그러한 실마리가 이미 들어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시키자면 일본이 사용한 정책을 깊이 있게 연구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 연구과제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서운갑은 혼자서 연구하지 아니하고 같은 국제관계학과에서 교수로 근무하고 있는 선배 허달수 교수와 공동으로 연구했다. 왜냐하면, 허교수가 일제시대 동경대학교에서 연구한 분야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서로 토론하면서 과제를 수행하다가 보니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고 있다. 그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다;

(1)  1868년 명치유신에 성공한 젊은 사무라이들이 스스로 군부와 정부의 관료가 되고 정치지도자들이 되어 일본 열도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들이 구()귀족을 대체하고 있는 유신의 화족(華族)이다. 그들은 가장 먼저 일본의 산업근대화를 위하여 서양에서 두가지를 적극 도입한다; 하나가, 투자자본이다. 또 하나가, 산업기술이다;

(2)  일본이 산업근대화에 나서자 서양의 열강들이 별로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자신들의 식민지의 하나로 일본이 계속 지냈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아니라 스스로 산업선진국이 되고자 하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명치원로들이 서양 선진국에서 자본을 도입하는데 있어서 어쩔 수없이 높은 이자를 감당하면서 장기차관을 들여오게 된다.

(3)  일단 차관이 들어오자면 그 사용처를 명시해야 한다. 일본정부에서는 산업분야를 명시하고 그 분야에 사용이 되는 기계와 기술을 함께 도입하게 된다. 그러므로 차관공여국에서는 기계와 기술을 함께 팔면서 차관을 선()공제하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 기계와 기술을 파는데 도움이 되도록 차관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산업선진국이 개도국의 건설사업을 수주하면서 그에 따른 차관을 제공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4)  그런데 일본제국의 경우에는 산업근대화 과정에서 장단점을 동시에 보이고 있다; 첫째, 장점은 토지 값이 싸고 노동임금이 싼 것이다. 둘째, 단점은 차관이자가 높은 것이다. 따라서 대량생산된 상품을 해외시장에서 즉시에 대량으로 팔아 치우지 아니하게 되면 빚더미에 앉게 되는 것이다;

(5)  그와 같이 일단 분석되기에 서운갑이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1)    첫째, 장기저리 차관을 도입해야 한다. 그 방법은 국가원수가 직접 선진국을 순방하고 국가재건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양질의 차관을 원조차원에서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해야 한다. 예를 들면, 미국과 영국의 정부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국가들과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경제를 적극 개발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양질의 장기저리 차관을 들여와야 한다.

2)    둘째, 독일에서는 심부화되고 있는 지하 탄광을 개발하기 위하여 해외에서 광부를 대대적으로 모집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비슷한 탄광구조를 지니고 있는 한국의 정부가 그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부지런한 한국의 광부에 대하여 독일관계자들에게 설명하고 대대적으로 한국의 광부를 모집하여 독일의 탄광에 노무자로 보낼 필요가 있다. 특히 서독정부는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전후에 분단국 신세가 되어버린 한국민에 대하여 호의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    셋째, 독일이 필요로 하고 있는 간호사도 한국정부가 나서서 국내에서 모집하고 단계적으로 보내 줄 필요가 있다. 그들이 벌어서 송금해오는 돈이 국가경제건설을 위하여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독일이 필요로 하는 분야에 적극 협조하는 한국정부에 대하여 그들이 양질의 차관을 공여할 것이다. 기술 또한 그들의 협력을 얻을 분야가 많다. 그리고 독일의 고속도로를 그 옛날 히틀러가 벌써 건설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참조하여 한국에서도 고속도로를 정부 주도로 건설할 필요가 있다.

4)    넷째, 조선시대에는 농업이 천하의 대본이었기에 호남지역을 중시했다. 그러나 산업근대화는 구미지역에 수출하기 위하여 동해에서 상품을 배에 싣고 떠나야 한다. 자연히 공업벨트를 서울과 부산 사이에 건설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공단에서 생산한 수출상품을 구미지역 해외시장에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 절실한 것이다;

5)    다섯째, 일단 도시에서 그리고 경부간 공단에서 산업화가 시작되면 노동인력의 도시집중으로 말미암아 일종의 이촌향도 현상이 심각하게 발생할 것이다. 그렇지만 농촌에도 일거리를 주어야 하고 소득증대의 보람을 함께 느끼도록 만들어야 한다. 처음에 재건최고회의가 국가경제개발을 위하여 농공병진 정책을 내걸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은 시골과 농촌이 잘 사는 나라가 선진국인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여 농촌 살리기 운동을 정신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일으킬 필요가 있다.

6)    여섯째, 명치유신의 원로들은 열도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있어서는 굉장히 속성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이 실패한 분야는 소비시장의 개척분야이다. 조선과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어 해외시장을 개척함으로써 겨우 도입한 차관의 이자를 물었다. 그러나 원금상환에는 실패하여 결국 중국시장을 무력으로 얻고자 시도했다. 그 때문에 유럽 열강 및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그와 같은 이웃나라의 역사적인 실례를 참조하여 우리 정부에서는 수출시장의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기업에서는 수출상사를 만들고 정부에서는 무역진흥을 위한 기관을 만들어 운영해야 한다. 결국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인 것이다. 요컨대, 수출시장의 확보와 가격경쟁력 확보에 성공하지 못하면 지속적인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실시에는 큰 부담이 되고 마는 것이다;

7)    일곱째, 박정희 정권은 특히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성공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그 이유가 두가지이다; 하나는, 집권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것이다. 또 하나는, 해방과 전후에 한국의 경제는 북한에 비하여 열위인 것이다. 그 이유는 일제가 만주와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남한이 아니라 북한 땅에 병참기지를 많이 건설했기 때문이다. 수력발전소 건설과 도로 및 항만건설만 보더라도 그것은 금방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한국정부가 경제개발5개년 계획에 계속 성공하여 소득 및 산업면에서 북한에 대하여 경제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서 남북간 대화와 이산가족의 상봉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와 같은 연구에 매진하다가 보니 2년의 세월이 금방 지나가고 있다. 그때 서운갑은 서울을 방문한 오천덕 선교사 부부를 오래간만에 만나게 된다. 그들은 이제 한국에서의 선교사업을 마감하고 고국인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오천덕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서운갑에게 하나 해주고 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