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 제118강(민22:21-2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년 2월 20일(화)
여호와의 말씀을 선지자 발람이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면서 개인적으로 이익을 취하고자 하고 있기에 그 영안이 어두워지고 있는가?(민22:31) 그를 깨우치시는 여호와의 방법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민22:21-26)
본문 바로 앞에 있는 제20절 말씀과 본문의 제22절 말씀의 차이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본문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관건이 됩니다. 두 구절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하지니라”(민22:20),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타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민22:22).
분명히 간밤에는 선지자 발람이 여호와께 자신을 데리러 모압 왕이 또 사절을 보내어 왔으므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기도로 물었을 때에 함께 가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모세가 제20절에서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22절에 와서는 여호와께서 발람이 모압 왕의 사신들을 따라서 모압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고 있는데 발람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으므로 진노하신 것으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 앞뒤가 전혀 맞지가 않는 이야기를 적고 있는 것일까요?
이글을 적고 있는 모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그와 비슷한 경험을 40년전에 이미 한 적이 있습니다. 호렙 산에서 불꽃 가운데 모세 자신을 불러서 출애굽의 일꾼으로 삼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능력의 지팡이를 주시면서 애굽으로 들여보내십니다(출3:1-12, 4:12-20). 그런데 막상 처자식을 데리고 애굽으로 향하고 있는 모세를 여호와께서는 숙소로 찾아와서 죽이려고 하십니다(출4:24). 모세가 그 연유를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있는 동안에 그의 처 십보라가 갓난아기인 차남에게 급히 그 자리에서 날카로운 돌칼로 할례를 행하자 모세가 위기를 면하게 됩니다(출4:25-26a).
어째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일꾼을 죽이고자 도상에 나타나셨으며 어째서 또한 그렇게 쉽게 물러가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모세의 경우에는 할례입니다(출4:26b). 그리고 본문에서 선지자 발람에게 있어서는 그 연유가 과연 여호와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명심하고서(민22:20) 발람이 길을 떠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민22:27, 31).
발람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조건부로 모압으로 가는 것을 허락해주셨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민22:20). 그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발람 자신의 소망대로 모압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그것만이 기쁠 따름입니다. 사절단을 따라 모압에 도착하게 되면 금은보화와 높은 자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민22:16-17). 그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심히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의 영안은 어두워져 버립니다. 물질적인 탐욕 때문에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어째서 발람 자신을 모압으로 보내시고 계시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모압으로 가서 왕에게 여호와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라고 하시는 것인데 그 사명을 잊어버리고 잿밥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선지자 발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진노하십니다(민22:22a). 그런 정신상태로는 여호와의 일꾼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발람을 혼내 주고자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서 그 길에 나타나신 것입니다(민22:22b).
그런데 발람은 영안이 어두워져서 여호와의 사자를 알아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날뛰고 있는 나귀만이 보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말을 듣지 아니하는 나귀에게 채찍질만 하다가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민22:25-30). 잘못은 발람 자신이 해놓고 적반하장(賊反荷杖, 도둑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면서 지팡이를 주인에게 휘두르고 있는 것)으로 자신에게 충실한 나귀에게 매질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명을 뒷전으로 하고서 자신의 탐욕만 채우고자 하는 발람의 현주소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민22:21-22);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민22:21-22a);
1) 어제 오후에는 발람이 고민을 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다시 사절단을 그에게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한번만 모압에 왕림하셔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모압 왕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여호와께 기도를 해주면 금은보화는 물론 높은 관직까지 주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민22:16-17). 그 말을 들은 발람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과 같습니다. 완전히 팔자를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발생한 것입니다.
2)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걱정입니다. 여호와께서 진작에 자신에게 주신 그 신탁의 말씀을 그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처음 사절단이 왔을 때게 선지자 발람 자신이 기도를 드렸더니 그때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민22:12).
3) 발람은 제2차 사절단을 자신의 집에 하룻밤 유숙을 시키면서 여호와께 다시 기도를 드립니다(민22:19). 그 먼 길 640km나 되는 길을 모압 왕이 또 다시 사절단을 보내어와서 자신을 정중하게 모압으로 초청하고 있으니 인정상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직접 모압에 가서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해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기도 가운데서 두가지를 파악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4) 첫째, 모압 왕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발람의 속마음을 먼저 아십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로 그 이름을 멀리 모압까지 떨치고 있는 발람이 세상의 유혹과 물질적인 탐욕에 약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의 믿음을 강하게 할 수가 있을까요? 그 방법은 유혹의 현장에서 시험을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40일간 금식하신 예수님을 마귀에게 보내어 3가지 시험을 받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결정과 같은 것입니다(마4:1-11, 눅4:1-13).
5) 둘째, 모압 왕에게 발람을 보내어 여호와 하나님의 위엄과 뜻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과 이삭을 블레셋의 연맹 왕인 아비멜렉에게 보내어 그곳에 여호와의 권능을 나타내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창20:7-18, 26:8-29). 그렇지만 한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선지자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신실하게 행동을 할 때에 비로소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6) 그런데 불행하게도 선지자 발람의 마음이 여호와의 말씀을 떠나고 있으며 물욕에 눈이 어두워져서 영안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로 모압으로 가게 되면 큰일이 발생합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선지자로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으며 모압 왕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제멋대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한 불상사를 사전에 예방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는 한창 그 마음이 세상적으로 들떠서 모압 사절단과 함께 길을 떠나고 있는 발람에게 진노하시면서 영적으로 그를 깨우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민22:21-22a).
(2)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민22:22b); 여호와의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어 모압 왕의 사절을 신나게 따라가고 있는 선지자 발람의 길을 막아 서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야흐로 나귀를 타고 우쭐하여 모압으로 가고 있는 발람 앞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길을 막고 서있으니 그 다음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3)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민22:22c);
1) 발람은 혼자서 모압 왕의 사절단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높은 위상을 과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귀를 타고 또한 두 명의 시종을 거느리고 함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발람의 선지자답지 아니한 모습이 여호와 하나님의 눈 밖에 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은 여호와의 종입니다. 구체적으로, 만민의 생명을 돌보고 구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뜻을 받들고 사람들을 섬기는 종의 모습을 지녀야만 하는 것입니다(사53:2-12).
2) 그런데 선지자 발람은 그러한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를 않습니다. 여호와의 종인 그가 자신의 종을 두 명이나 거느리고서 모압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민22:22c). 그러한 마음가짐과 모양새로 모압에 가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가 있을까요?(민22:12, 20) 발람의 문제점을 아시고 여호와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차제에 올바르게 고쳐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민22:23);
(1) 여호와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창1:2, 요4:24). 여호와의 사자인 천사들 역시 영체(靈體)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선지자 발람의 눈에는 먼저 보여야만 합니다.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과 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귀가 열려서 그 말씀의 영적인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와 같은 신령한 모습을 일찍이 아브라함에게서 볼 수가 있으며 롯의 경우에도 그러합니다(창18:1-3, 19:1).
(2) 그런데 불행하게도 세상의 유혹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진 발람의 눈에는 여호와의 사자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 대신에 한갓 짐승에 불과한 나귀의 눈에 그 천사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발람을 등에 태우고 있는 그 나귀는 깜짝 놀라서 천사의 칼을 피하려고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민22:23a). 영문을 모르고 있는 발람은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나귀를 제자리로 돌이키려고 채찍질만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민22:23b).
셋째로,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누르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민22:24-26);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누르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민22:24-25);
1)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선지자가 세상의 유혹에 미혹이 되고 재물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앞길이 형통하게 될까요? 아니면 진퇴양난(進退兩難,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기가 어려운 것)의 좁은 길로 내몰리게 될까요? 선지자 발람의 이야기를 적고 있는 모세의 글이 그 정확한 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나귀도 길을 막아 서고 있는 천사의 칼을 보고 있는데 여호와의 선지자라고 하는 발람이 전혀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발람은 세상의 재물과 명예에는 눈이 활짝 열려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눈은 소경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2)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태가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포도원 사이로 난 그 좁은 길에서 나귀가 천사의 칼을 피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길과 포도원 사이에는 양쪽으로 담이 쳐져 있습니다(민22:24). 그러므로 나귀가 좌우로 발버둥을 치다가 주인의 발을 담벼락에 밀어 부치고 있습니다(민22:25a). 발람은 발이 아파서 채찍으로 나귀를 내리치고만 있습니다”(민22:25b). 참으로 딱한 형편입니다.
(2)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민22:26);
1) 막다른 길, 막다른 골목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서 나귀를 계속 위협하며 더 좁은 길로 마침내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부치고 있기 때문입니다(민22:26). 그야 말로 나귀도 그 위에 타고 있는 선지자 발람도 진퇴양난의 국면에 처한 것입니다.
2) 세상의 영광과 재물의 욕심에 눈이 멀어버리게 되면 여호와의 종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파국의 막다른 골목에 내몰리고 맙니다. 그때에는 어째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 그러한 파국과 난국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3)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면 곧바로 여호와께 자신의 잘못과 죄를 아뢰고 용서와 치유의 은혜를 달라고 매달려야만 합니다. 그것이 유일하게 그 난국을 벗어나고 파국을 면하며 다시 하나님의 종으로 올바르게 일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결론적으로, 북부 시리아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로 정평이 난 발람이 과연 모압 왕의 유혹과 자신의 탐욕을 물리치고서 여호와의 말씀을 정확하게 모압 땅에 전달할 수가 있을까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막아서는 여호와의 사자를 볼 수 있는 영안이 다시 열려야만 합니다.
선지자 발람이 과연 자신의 영성을 다시 회복할 수가 있을까요? 귀추가 주목이 되고 있습니다. 그가 믿음의 사람으로 영성을 다시 회복하여야 모압 왕에게 가서 여호와의 뜻을 정확하게 전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발람 뿐만이 아닙니다 성도들도 주님께서 맡기신 지상명령을 끝까지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의 믿음과 영성을 회복하여 세상의 시험에서 승리해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님 안에서 그리고 성령님 안에서 모든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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