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117강(민22:15-2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1. 4. 17:13

민수기 강해 제117(22:15-2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219()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22:12)고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 발람에게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하지니라”(22:20)고 달리 말씀하시면서 발람을 모압 왕 발락에게 보내시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22:15-20)

 

모압 왕 발락은 미디안 장로들인 대상들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사절단을 멀리 640km 떨어져 있는 북부 시리아 브돌로 선지자 발람에게 보냈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발람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도록 하는 제사를 부탁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발람은 여호와의 뜻이 모압으로 가지도 말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을 저주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임을 신탁으로 받았기에 빈손으로 그 사절단을 모압으로 돌려보내고 맙니다.

돌아온 사신들로부터 그 보고를 받은 모압 왕 발락은 포기하지를 않습니다. 아르논 강 북쪽에 주둔하고 있는 모세의 이스라엘 군대를 멀리 쫓아내는 것이 모압의 안보상 절실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더 높은 귀족들을 발람에게 다시 파견합니다. 더 많은 약속을 하고서 발람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합니다.

모압 왕 발락은 선지자 발람을 일종의 무당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소위 수호신이나 우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많은 재물과 높은 관직을 발람에게 주면 무당인 발람은 그것에 혹하여 왕의 뜻대로 여호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해주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과연 모압 왕 발락의 생각대로 그렇게 미래가 전개될까요?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압 왕 발락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선지자 발람의 마음의 중심을 먼저 보고 계십니다. 그러한 발람을 고향에 그냥 붙들어 두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유혹의 현장인 모압으로 가서 그 시험을 이기게 하는 것이 더 좋을까요? 선지자 발람은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22:18).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부디 그 초심을 잃지 말고 유혹의 땅 모압에서도 하나님의 선지자로 우뚝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를 모압으로 보내시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22:20).

모압으로 떠나게 되는 발람이 과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놀라운 선지자의 사역을 하게 될까요? 아니면 물질적인 유혹에 빠져서 큰 잘못을 범하게 될까요?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발람의 사례가 큰 교훈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그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하고자 합니다.

생각해보면, 성도들은 발람과 같습니다. 온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으로 전파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향과 집을 떠나서 이방인들의 땅에서 사역을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치 예수님의 공생애와 같은 성도들의 복음전파의 과정에 있어서 발람이 받은 유혹과 시험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처신하면 그 무서운 세상의 유혹과 물질적인 시험을 이겨낼 수가 있을까요? 장차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와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서 모세가 죽기 전에 민수기에서 발람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하고 또한 그와 관련이 되고 있는 직접적인 교훈을 신명기에서 유언처럼 남기고 있습니다(22-24, 31:8, 8, 29-30).  

그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매, 그들이 발람에게로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십볼의 아들 발락의 말씀에 청하건대 아무 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22:15-17);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락이 다시 그들보다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매, 그들이 발람에게로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22:15-16a); 모압 왕 발락은 집념의 사람입니다. 그는 약탈자라고 하는 그의 이름의 뜻에 걸맞게 한번 기회를 잡으면 반드시 끝을 내고 그가 노린 그것을 탈취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움직여서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내릴 수만 있다고 하면 선지자 발람을 구워 삼기 위하여 두 번 세 번 그 먼 길에 사절을 계속 보내는 것은 눈도 깜짝하지 아니하고 시행하는 인물인 것입니다. 물론 그 다음에 파견이 되는 사절단은 더 높은 고관들로 구성이 되고 있습니다.

(2)  십볼의 아들 발락의 말씀에 청하건대 아무 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22:16b-17a); 모압의 왕이 자신의 소원만 들어주면 선지자 발람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줄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모압에 와서 왕의 소원대로 여호와에게 제사를 드려주면 된다는 것입니다(22:16b). 그리하면 아무리 큰 벼슬자리라도 줄 것이며 무엇이든지 원하는 상급을 주겠다고 단단히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22:17a).

(3)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22:17b);

1)    모압 왕 발락이 사절을 통하여 선지자 발람에게 하고 있는 그 약속이 사실이며 성취가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실제로, 그 약속이 실현이 되자면 하나의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압 왕이 모세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도록 선지자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서로 대적관계로 만들어야만 합니다”(22:17b 의역`). 그런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한 마디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2)    요컨대, 발락과 발람이 헛수고를 하고 있으며 그들은 허망한 소원을 쫓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이 뻔한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모압 왕 발락이 무당을 찾고 우상의 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모압 왕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선지자 발람의 마음이 그의 영안(靈眼, 영적인 깨달음의 눈)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 말하는 나귀의 이적입니다(22:21-35).

둘째로,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22:18-19);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22:18);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 발람의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모압 왕 발락이 많은 상금과 높은 자리를 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지만 그 때문에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다고 하는 확실한 의사표현이기 때문입니다(22:18). 그렇다면 전번에 사절이 왔을 때에 그러한 뜻의 여호와의 신탁을 받아서 발람이 모압 왕에게 전달을 해준 바가 있으므로(22:12-13) 이번에도 복채와 함께 사절단을 깨끗하게 돌려 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발람이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 말씀의 진리성을 절대적으로 믿고 행동을 하고 있는 인물일까요?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에 다음 대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22:19);

1)    전번에 모압 왕의 사절이 왔을 때에 여호와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전달한 바가 있는 선지자 발람입니다. 여호와의 뜻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며 변함이 없습니다; ①첫째, 사절을 따라 모압으로 가지를 말라는 것입니다(22:12a). ②둘째, 하나님의 복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을 저주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를 말라는 것입니다(22:12b). 그러므로 발람은 그것이 여호와의 신탁의 말씀이라고 정확하게 다시 한번 설명을 하고 모압의 사절을 돌아가도록 하면 됩니다.

2)    그런데 선지자 발람이 그 먼 길을 온 모압의 사절단에게 인정을 베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22:19). 그 노고에 마치 보답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여호와의 전번 신탁의 말씀은 그러하실지라도 혹시 그동안 변경사항이나 보충사항이 있으실지 모르므로 하룻밤 자신의 집에서 유숙을 하면서 한번 기다려 보라고 하는 자상한 배려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과연 올바른 선지자의 태도일까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는 이상한 대목입니다. 진리의 말씀에서 결코 흔들림이나 변개함이 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선지자 발람이 누구보다도 당대에 그 지역에서 잘 알고 있는 인물인데 그렇게 이상하게 처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마음이 그 속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대목입니다.

3)    비록 선지자 발람이 아무리 모압의 왕이 자신에게 금은보화를 많이 준다고 하더라도 여호와의 신탁의 말씀을 꼭 그대로 전달하는 자신의 기본 입장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지만(22:18) 그의 속마음은 이미 유혹을 받아서 흔들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발람은 여호와께서 자신을 모압 왕에게 보내어 주시면 자신은 한 재산 얻을 수가 있으니 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서 그렇게 한 발짝을 떼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발람이 그 밤에 여호와께 사정 말씀을 올리고 있습니다. 과연 여호와께서는 어떠한 새로운 신탁의 말씀을 그에게 주시는 것입까요? 발람의 내심을 이미 알고 계시는 여호와께서는 차제에 그를 모압에 보내어 여호와의 뜻이 무엇인지를 모압 왕과 그 백성들에게 똑똑하게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4)    따라서 만약 발람이 끝까지 여호와께 충성하면 그는 위대한 선지자가 될 것입니다. 그 반대로, 탐욕에 눈이 멀어 영안이 어두워지게 되면 개인적으로 큰 비극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민수기 제31장의 말씀을 미리 참조하면 선지자 발람은 물욕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정직하게 선포하는데 있어서 실패를 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스라엘 군대에 의하여 사로 잡혀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31:8).

셋째로,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22:20); 역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22:20a); 

1)    이와 유사한 구절을 창세기 제15장에서 다음과 같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15:1). 비교를 해보면 두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발람에게는 밤에 임한 것이지만 아브람에게는 환상 중에 임한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발람에게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임하신 것이지만 아브람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신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한 차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2)    첫째,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주의 영광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 영광 앞에 피조물은 함부로 설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모세에게 시내 산에서 여호와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33:20). 태양보다 더 밝은 창조주의 영광을 그대로 개방한다면(21:23, 22:5) 심판의 날 육신을 가진 모든 피조물처럼 그대로 녹아버리고 말 것임을 사도 베드로 역시 증거하고 있습니다(벧후3:12). 그러므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밤에 꿈속에 나타나시는 것입니다(15:12).

3)    둘째, 여호와의 말씀은 그 정체가 사도 요한의 글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1:1-14). 그 점을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그의 영적인 체험을 통하여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환상 가운데 만난 분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신에게 음성으로 임하셨다고 두 차례나 간증하고 있습니다(9:3-9, 22:6-11). 그러므로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신 주님으로서 성도들에게 환상 가운데 영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14:16-20).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의 구절이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2:20a).

(2)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22:20b);

1)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음 두가지를 함께 보신 것으로 보입니다; ①하나는 사절단을 곧바로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여운을 남기고 있는 선지자 발람의 흔들리고 있는 마음의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모압 왕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직접 전하기 위해서는 선지자 발람을 그곳으로 보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보신 것입니다. 좀더 살펴봅니다;

2)    첫째, 발람은 내심 모압의 왕이 제시하고 있는 좋은 조건의 보상을 받아 챙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과는 전혀 반대의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자신의 결심을 다시 한번 밝히고 다른 길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하면 여호와의 뜻도 만족시키면서 모압 왕의 상급도 함께 받아 챙길 수 있을까요? 그렇게 흔들리고 있는 선지자 발람이기에 당장 사절단을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하루 유숙을 시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둘째, 참으로 세상에 미련이 많고 할 수만 있다고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성취하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세상에서 연단을 받아야 그 믿음이 굳건해 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발람이 실제로 모압을 방문하여 그 현장에서 자신의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모르겠지만 거쳐야만 하는 과정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하여 모압 왕 발락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발람을 모압으로 보내시고 계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모세는 선지자 발람의 이야기와 그 교훈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위시하여 그의 민수기에 그에 관한 기록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의도는 한 마디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발람의 사례를 타산지석(他山之石, 남의 잘못을 보고서 자신의 잘못을 미리 고치는 것)으로 삼아 믿음생활에서 실족하지 아니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선지자 발람처럼 물욕에 눈이 어두워져서 여호와의 말씀의 분명한 뜻을 사정변경을 핑계로 삼아 한번 그 융통성을 찾아보고자 하는 불필요한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발람의 전철을 밟지 아니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