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119강(민22:27-31)(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1. 6. 07:37

민수기 강해 제119(22:27-3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221()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선지자 발람이 개인적인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자 영안이 어두워져서 여호와의 사자를 먼저 보고 있는 나귀에게 어떠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가?(22:27-31)

 

선지자가 세상적인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게 되면 어느 정도로 타락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모세는 발람의 이야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첫째, 자신이 타고 다니는 짐승인 나귀조차 좁을 길을 막아 서고 있는 천사의 존재를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천사의 칼을 피하여 밭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라고 하는 발람은 세상의 물욕에 현혹이 되어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버렸기에 천사의 존재를 전혀 눈치를 채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나귀에게 채찍질만 하고 있습니다(22:23).

(2)  둘째, 천사가 나귀를 타고 있는 발람을 계속 코너로 밀어 부칩니다. 천사의 칼날을 피하려고 나귀가 좌충우돌을 하다가 자신의 등에 태우고 있는 주인 발람의 발을 포도원 담벼락에 끼우게 하고 맙니다. 발람은 전후사정을 모르고 나귀에게 화가 나서 다시 채찍질을 하고 있습니다(22:25).

(3)  셋째, 천사가 좁은 길 끝까지 나귀와 발람을 밀어 부칩니다. 더 이상 후퇴할 길이 없게 되자 나귀가 주인을 태운 채 엎드리고 맙니다. 그러자 발람은 나귀가 주저 앉아서 일어나지를 않는다고 화를 내면서 이제는 채찍이 아니라 아예 지팡이로 나귀를 내리치고 있습니다(22:27).

(4)  넷째, 그 모양을 보고서 하도 기가 막혀서 여호와께서는 나귀가 사람의 말로 주인인 발람에게 항의를 하도록 조치하십니다(22:28). 짐승인 나귀가 사람의 말을 하고 있는 이적을 보면서도 발람은 그것이 여호와의 능력의 발휘인 사실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선지자입니다. 세상의 유혹에 빠지고 물욕에 눈이 뒤집히게 되면 여호와의 선지자라고 하더라도 발람처럼 영적으로 완전한 소경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5)  다섯째, 발람처럼 영적으로 타락한 자를 어떻게 하면 그 영성을 회복하여 믿음의 자리에 다시 세울 수가 있을까요?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도우심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본문의 말미에서 모세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22:31).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나귀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22:27);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나귀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 밑에 엎드리니”(22:27a);

1)    여호와의 사자를 눈으로 보게 된 나귀는 깜짝 놀라서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천사가 칼을 들고 나귀에게 나아오고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목숨을 살리고자 피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22:23a, 25a). 그 와중에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주인 발람은 나귀에게 애꿎은 채찍질만 두 차례나 하고 있습니다(22:23b, 25b).

2)    그렇지만 좁은 길로 도망을 치던 나귀는 이제 막다른 골목 끝에 다다르고 있습니다(22:26).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깨닫자 나귀는 그 자리에서 여호와의 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22:27a).

3)    여기에서 자연계의 현상을 뛰어 넘고 있는 초월적인 영적인 존재를 만난 피조물의 두려움에 찬 행동을 두가지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①첫째는, 무조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은 나귀처럼 본능적으로 정신없이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②둘째는,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에는 극도의 두려움 가운데 무릎을 꿇고서 죽음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2)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22:27b);

1)    길에서 갑자기 제멋대로 날뛰던 자신의 나귀가 이제는 골목 끝에 주저앉아 일어서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22:27a). 그 나귀를 타고 있는 선지자 발람은 기가 막힙니다. 나귀에게 매가 부족하여 그러한 고약한 버릇을 보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채찍이 아니라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서 나귀에게 휘두르고 있습니다(22:27b).

2)    참으로 고약한 것은 그 나귀가 아니라 그 주인인 발람입니다. 그는 주인인 의 입장에 있으면서 상대방인 의 입장을 전혀 헤아리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자신과 같이 돌보라고 그 청지기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1:26-31, 19:5-6, 5:43-48). 그런데 여호와의 선지자인 발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선한 관리자의 의무를 게을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돌보아야만 하는 피조물의 아픔과 처지를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발람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종인 자신의 책무를 모르고 제멋대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피조물들의 주인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연약하고 작은 자를 무시하면서 나와 똑같은 여호와의 창조물로 대접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25:40). 한 마디로, 그러한 작태는 피조물들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하여 여호와의 공의를 실천하는 모습 이른바 피조물을 섬기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53:2-11, 25:40). 그 결과 발람처럼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제멋대로 움직이기 위하여 함부로 지팡이를 휘두르고 있는 것입니다(22:27b).

둘째로,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3번을 때리느냐?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22:28-29);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3번을 때리느냐? ”(22:28);

1)    창세기 제1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창조가 된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심을 받은 남자와 여자 뿐입니다(1:26-27). 그 사실을 창세기 제2-3장에서는 에덴 동산의 아담 부부를 통하여 정확하게 보여주십니다(2:15-17, 3:9-13). 그리고 에덴동산에서는 또 다른 낙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부르며 동무가 되어 함께 잘 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2:19-20). 심지어 뱀은 아담 부부와 대화까지 나누고 있습니다(3:1-5).

2)    그러나 여호와께 죄를 범한 아담 부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뱀이 여호와의 저주를 받게 된 이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습니다(3:14-24). 영적으로 어두워진 아담 부부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대화에 어려움이 생기고 동물들은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진 것입니다. 따라서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셔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게 되시면 어린 아기와 맹수들이 함께 뛰놀 수 있는 광경이 마치 노아의 방주 안이나 에덴동산처럼 다시 펼쳐진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11:5-9).

3)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아닌데 갑자기 발람의 나귀가 사람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22:28a). 그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나귀에게 일시적으로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인인 사람에게서 받은 억울한 사정에 대해서는 가축이라고 하더라도 때가 되면 하나님 앞에서 증언을 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22:28b, 2:15, 4:13). 그것은 창세기 제4장에서 무죄한 아벨의 피를 받아 먹은 땅이 견딜 수가 없어서 여호와께 호소하고 있으며 아벨이 흘린 그 피가 여호와께 억울한 사정을 아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4:10-11). 당장 본문에서는 그 나귀가 주인인 발람에게 다음과 같이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다;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3번을 때리느냐?”(22:28b).

(2)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22:29a); 경천동지(驚天動地,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리는 것)할 사건이 선지자 발람의 앞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짐승에 불과한 자신의 나귀가 사람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적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 발람이 얼른 알아채야만 합니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언가를 깨달으라고 그 이적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12:38-40).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여호와 앞에 꿇고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겸손하게 그 말씀을 경청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영안이 완전히 어두워진 발람은 그 수준이 나귀의 수준 이하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를 조금도 눈치채지를 못한 채 한심하게도 나귀만을 상대로 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22:29a).

(3)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22:29b);

1)    발람이 자신에게 나귀에 대한 처벌권과 처형권이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훗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로마총독인 빌라도가 자신의 세상적인 권세를 다음과 같이 자랑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9:10).

2)    지금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창조의 능력으로 나귀의 입을 열어서 사람인 발람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으며 바야흐로 선지자 발람이 여호와의 존재를 깨닫고 있는지를 보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영적인 사실을 발람이 조금도 눈치를 채지를 못한 채 한심하게도 나귀에 대한 절대적인 처벌권을 자신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면서 그 나귀를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22:29b).

셋째로,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22:30);

(1)  나귀가 발람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한번도 주인의 말에 순종하지 아니한 적이 없는 나귀입니다(22:30). 그 버릇이 참으로 좋은 나귀입니다. 그런데 그날만은 참으로 이상하게도 무엇을 보고서 겁에 질렸는지 갑자기 길가 밭으로 뛰어들거나 좁은 골목길로 후진하여 마침내 주저앉고 있습니다(22:23-27).

(2)  어째서 그러한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점을 깊이 생각해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발람이 처신하고 있는 모습이 하도 답답하여 나귀의 입을 통하여 그가 알아챌 수 있도록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의 뜻조차 선지자 발람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나귀가 사람의 말을 한다는 것 그리고 주인인 발람의 채찍질과 지팡이 때림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 기이한 일입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발람은 여호와의 존재와 그 역사하심을 빨리 눈치를 채야만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그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22:31);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22:31a);

1)    하도 답답하여 여호와께서 마침내 발람의 눈을 영적으로 활짝 밝히십니다(22:31a). 지금까지 미물인 나귀만을 상대로 하여 화를 내고 채찍과 지팡이를 휘두르고 있던 발람 앞에 거룩하신 여호와의 모습을 사자를 통하여 볼 수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발람은 이상한 현상이 모두 여호와로 말미암아 자신 앞에 펼쳐진 것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고 있습니다.

2)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인생에 있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깨닫게 만들고 계신 것이라는 사실을 얼른 알아채야만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 서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회개하고 여호와의 종으로 다시 세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고 재물에 어두워진 영안을 다시 밝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길입니다(12:1-3, 19:4-6, 28:18-20).  

(2)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22:31b); 여호와께서 사자를 보내어 그 길을 막고 징계를 내리고 싶은 대상은 그 나귀가 아니라 사실은 선지자 발람입니다. 그는 모압 왕에게 가서 여호와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겠다고 맹세를 하면서 길을 떠나고 있지만 사실은 모압 왕이 제시하고 있는 높은 자리와 금은보화에 군침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갑자기 영안이 어두워지고 나귀보다도 못한 한심한 처지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발람이지만 다시 그 믿음을 회복시키고 여호와의 종으로 삼아 모압 왕에게 보내야만 합니다. 그 방법이 여호와의 진노를 칼을 빼어 든 천사의 모습으로 발람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22:31ba).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에서 탐욕의 들보를 제거하자 비로소 영안이 밝아진 발람이 칼을 들고 서 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고서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22:31bb).

결론적으로, 여호와께서는 부디 발람이 지금의 영적인 체험을 잊어버리지 말고 모압 땅에 도착해서도 선지자의 참된 모습을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이방인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12:1-3, 20:7). 발람이 과연 여호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선지자답게 끝까지 행동을 할까요? 그 이야기가 제31장에 이르기까지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31:8).

그러므로 아무쪼록 발람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신앙생활에 있어서 많은 시행착오를 미리 줄이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