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120강(민22:32-3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1. 8. 01:18

민수기 강해 제120(22:32-3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222()

 

마침내 영안이 열린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또한 그 말을 듣고 회개를 하고 있는데 그 회개의 내용이 무엇이며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전하고 있는 여호와의 명령의 내용은 무엇인가?(22:32-35)

 

모압 왕의 유혹에 그 마음을 빼앗겨 버린 선지자 발람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좁은 길에 나타났지만 그것을 전혀 알아채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발람의 나귀가 그 모습을 보고서 본능적으로 두려워하여 몸을 피하고 있는 광경이 연출이 됩니다. 나귀를 타고 있는 발람은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나귀에게 두 번 채찍을 휘두르고 있습니다(22:23, 25). 마지막에는 좁은 골목길 끝에서 자신을 태운 채 그만 주저 앉아버린 나귀를 일으키기 위하여 지팡이로 내리치고 있습니다(22:27).

그 모습을 보고서 여호와께서는 나귀의 입을 열어 사람의 말로 선지자 발람에게 항의를 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습니다(22:28, 30). 그러한 기이한 이적이 발생하게 되면 발람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아채고서 이제는 그 영안이 열리지 아니할까 여호와께서는 기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발람의 행동은 그 기대에 크게 못 미치고 있습니다. 나귀와 말다툼을 하고 있는 형편없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22:29).

여호와께서는 비로소 발람의 영안을 직접 열어 주십니다(22:31a). 그제서야 골목길에 칼을 들고 서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게 된 선지자 발람이 여호와께서 역사하고 계심을 알고서 나귀에서 내려와 납작 엎드리고 있습니다(22:31b). 그토록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는 발람에게 천사를 통해서 전해주시는 여호와의 말씀이 과연 무엇일까요?(22:32-35) 본문의 기록을 참조하면 그 내용과 의미가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 모압 왕에게 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해주라는 사명을 잊어버리고(22:20) 선지자 발람이 속으로 신이 나서 두 종을 거느리고 나귀에 탄 채 거들먹거리고 있습니다(22:21). 그는 모압 왕으로부터 받게 될 엄청난 재물과 높은 관직에 마음이 뺏겨 있는 것입니다(22:17-21). 그러한 사악한 생각을 가지고 모압으로 들어가게 되면 십중팔구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일하지를 못할 것입니다(22:32b). 따라서 그 탐욕에서 벗어나 올바른 선지자로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혼을 내고 계신 것입니다.

(2)  그것은 40년 전에 모세를 출애굽의 일꾼으로 파견하실 때에 그 길의 숙소에서 발생한 사건과 같은 맥락입니다. 당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 이후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통적으로 지키고 있는 할례조차(17:9-14) 막내 아들에게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애굽으로 향하고 있는 모세를 죽이시려고 하십니다(4:24).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여호와의 의도를 빨리 파악하여 돌칼로 둘째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자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풀어 주시고 떠나십니다(4:25-26). 따라서, 모세의 경우나 발람의 경우나 그 메시지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하게 여기는 선지자나 하나님의 일꾼은 그 잘못을 고치지 아니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삼상2:30).  

(3)  둘째,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여호와의 사자의 칼을 피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는 나귀를 세 번이나 때리고 있는 발람의 행동에 대하여 사자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크게 꾸중을 하십니다(22:32a). 그 나귀가 적극적으로 피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 벌써 발람이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22:33). 그 신실한 나귀 덕택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발람이 그 전후사정을 모르고 자기 말을 듣지 아니하고 있다고 하여 갑질을 하면서 나귀만을 후려치고 있으니 그 고약한 버릇을 고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4)  셋째, 선지자 발람은 자신의 마음속 탐욕과 영적인 어두움이 모두 여호와 앞에 탄로가 나게 되자 할말이 없어서 자신은 여호와 앞에 범죄자이며 선지자의 자격이 없으므로 모압으로 가지 아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2:34). 그러나 여호와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그러한 약점을 지니고 있는 발람을 모압 왕에게 보내고자 하십니다. 모압 왕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라고 하시는 사명을 다시 부여하시는 것입니다(22:35).

(5)  그렇다면, 모압 왕에게 가게 되면 선지자 발람이 과연 여호와 하나님의 당부를 명심하여 여호와의 뜻을 끝까지 정확하게 전달하게 되는 훌륭한 선지자의 역할을 하게 될까요?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한번 크게 물욕과 세상적인 유혹에 흔들려버린 그의 마음이 모압 땅에서 더 큰 시험을 받게 될 것이며 거짓 선지자가 될 공산이 큽니다(3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불완전한 선지자 발람을 모압 땅에 보내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선지자 발람을 통하여 한번 되돌아보라고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6)  일찍이 여호와께서 40년 전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시내 산 앞에서 선민으로 삼으신 이유와 목적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제부터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전파하는 여호와의 선지자(12:1-3, 14:16-20, 20:7) 곧 아브라함과 같은 거룩한 백성이 되고 이방인들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나라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19:4-6 의역). 그런데 그러한 선민의 사명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신들의 잘못을 이스라엘 자손들은 차제에 선지자 발람의 시행착오라고 하는 거울에 생생하게 비추어보라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3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22:32);

(1)  여호와께서 발람의 영안을 열어주자 그가 비로소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길을 막아 서있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22:31a). 그 앞에 납작 엎드려서 그 천사가 전달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22:31b). 그때 천사가 전달하고 있는 여호와의 질책의 말씀이 두가지입니다;

(2)  하나는 모압의 고관들과 함께 모압 왕에게 가고 있는 선지자 발람의 마음에 사악함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22:32b). 그 이유는 모압 왕 발락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겠다고 하는 사명보다는 발락이 그에게 제시하고 있는 높은 관직과 많은 재물에 눈이 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악한 선지자의 길을 막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22:32c).

(3)  또 하나는 세상의 유혹과 물욕 때문에 영안이 어두워진 발람이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무죄한 나귀만을 3차례나 때리고 있으니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22:32a).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를 못하고 그 대신에 자신을 섬기고 있는 충실한 나귀만을 때리고 있으니 그것이 역시 사악한 행동인 것입니다.

둘째로,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3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22:33);

(1)  여호와께서 발람의 길을 막아 서도록 보내고 있는 천사의 칼날이 어느 정도로 예리하고 두려운 것일까요? 그 칼날은 마치 40년 전에 애굽 땅에서 애굽인들의 장자와 가축의 초대생을 모두 살해한 그것과 같습니다(12:29-30). 훗날 히스기야 왕 시대에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 군대 185천명을 한꺼번에 죽여버리는 그러한 무서운 검입니다(왕하19:35). 그토록 날카롭고 무서운 검을 들고서 여호와의 천사가 과연 목표물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천사의 검을 과연 미물인 나귀가 피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2)  그 칼은 애초부터 선지자 발람에게 겁을 주고 세상으로 향하고 있는 그의 탐욕을 끊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깊은 속뜻을 밝히지 아니한 채 여기서는 다만 충직한 나귀의 공로를 모르고 매질만 3번한 발람의 잘못을 여호와의 사자가 지적하고 있습니다(22:33). 나귀가 길을 막아 서고 있는 천사의 존재와 그가 휘두르고 있는 칼날을 보고서 몸을 재빠르게 3번이나 피했기에 그 위에 타고 있던 발람이 그 칼날에 맞지를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 천사는 사악한 마음을 지니고 모압 땅으로 가고 있는 발람을 처벌하려고 나선 것이지 그 나귀를 처벌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발람을 죽이려다가 도리어 나귀를 잡게 생겼으므로 검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후사정을 전혀 모르고 나귀를 3차례나 매질하고 있는 선지자 발람의 잘못이 크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22:34);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22:34a); 선지자 발람이 비로소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실토를 하고 있는 자신의 잘못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의 영안이 어두워서 여호와의 사자가 길에 칼을 들고 서있는 것을 전혀 보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22:34a 의역). 여기서 발람은 어째서 자신의 영안이 어두워져 버린 것인지 그 이유를 말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모압 왕의 유혹과 물욕에 사로잡혀서 선지자로서의 영안을 잃어버리고 있는 발람입니다. 그것이 진실로 사악한 일입니다. 그 잘못을 고쳐 주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천적인 잘못을 발람이 전혀 뉘우치거나 시정하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그저 귀하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길을 막아 서셨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잘못만을 고백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뻔뻔하게 자신의 탐욕스러운 속마음을 숨기면서 반쪽 회개를 하고 있는 발람을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처리하실까요?

(2)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22:34b);

1)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지 아니하려고 선지자 발람이 한 마디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자신이 이번에 모압 땅으로 가는 것을 여호와께서 사자를 보내어 막고 계시니 그 여행을 기뻐하시지 아니하시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자신은 모압 왕에게 가지를 않겠다는 것입니다”(22:34b 의역). 겉으로 보면, 참으로 여호와의 뜻을 잘 받들고자 하는 종의 자세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2)    세상의 유혹과 재물에 휘둘리고 있는 자신의 사악한 마음을 들키지 아니하려고 여호와의 사자 앞에서까지 선수를 치고 있는 발람의 위선이 그의 말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여호와께서 그러한 발람의 속마음을 모르실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먼저 살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삼상16:7).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이중적인 신앙을 지니고 있는 선지자 발람을 모압 왕에게 보내시고자 하십니다(22:35). 과연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넷째로,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발람이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니라”(22:35);

(1)  발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압 왕에게 보내시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하면 그 발걸음을 돌려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2:34). 하지만 그 속마음은 한 재산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게 되니 참으로 아쉬운 것입니다. 그러한 발람의 속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벌써 알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모압 왕에게 보내시겠다고 사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면서 한가지 조건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발람이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니라”(22:35).

(2)  그 말씀은 진작에 선지자 발람에게 두번째의 신탁으로 주신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22:20).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하십니다. 다만 그 말씀을 종들이 제대로 실천하는가? 아니하는가?의 문제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 준행 여부에 따라서 그 종들이 받는 상급이 달라지게 됩니다. 세상적인 유혹과 탐욕에 눈이 멀어서 여호와의 말씀을 저버리게 되면 그 앞에는 여호와의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여호와의 역사는 발람에게 있어서나 성도들에게 있어서나 동일하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모세는 출애굽 제40년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가데스 바네아에 들어옵니다(20:1). 광야생활 40년의 형벌이 끝나는 해이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란광야와 신(zin)광야가 만나고 있는 가데스 바네아입니다. 신 광야를 넘어 가나안 남부 네게브 지역으로 북진하면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가 있습니다(13:17-18).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해 정월에 두가지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①첫째, 누나이며 선지자인 미리암이 그곳에서 별세를 한 것입니다(20:1). ②둘째, 물을 얻을 수가 없어서 백성들이 여호와와 모세를 원망하자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제대로 이행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에게 진노하면서 자신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번이나 내리치고 만 것입니다(20:5-11). 2므리바 사건이라고 불리는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처벌을 여호와께로부터 받게 됩니다(20:12-13).

그해 51일에는 형 아론마저 호르 산에서 그 일생을 마감하고 맙니다(20:22-29, 33:38-39). 홀로 남게 된 모세는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 강 동편으로 가서 아모리 족속의 땅을 정벌하라고 지시하시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들고 있습니다(21:12-35, 2:13-3:11). 그 정복전쟁은 성공적입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단 몇 개월만에 아르논 강에서 헬몬 산에 이르는 아모리 족속 두 왕의 영토를 모두 점령한 것입니다(21:24-35, 3:8). 그러자 모세가 죽기 전에 마지막 위협이 모압 왕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모압 왕은 직접 군사적인 행동을 하지 아니하는 대신에 영적으로 여호와와 이스라엘 자손과의 관계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고자 열심입니다. 그 방법이 북부 시리아의 신령한 선지자인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여호와의 힘을 빌려서 저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22:2-7). 발람이 여호와의 신탁의 말씀을 쫓아서 동행하지를 아니하고자 하므로 엄청난 상금과 보상을 내걸고서 그를 유혹하고 있습니다(22:12-17).

선지자 발람이 모압 왕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사절단과 함께 모압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모압으로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겠다고 하지만 그 속마음은 한 재물을 얻게 되는 물욕에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22:18-22). 그 마음을 아시고 그를 모압으로 보내시면서 여호와께서는 사자를 보내어 크게 혼을 내십니다(22:32-33).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여호와의 선지자로 올바른 사역을 하라고 하시는 징계입니다(22:34-35). 과연 발람이 철저하게 반성을 하고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여호와의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게 될까요?

그 귀추가 모세의 관심을 크게 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죽은 다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앙행태와 선지자 발람의 사례가 크게 닮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후사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선지자 발람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수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발람은 자신의 내심을 들키지 아니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흔들리는 마음을 벌써 보고 계시는데 그는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외식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입니다. 발람은 그저 모압 왕에게 가서 적당하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한 재산을 챙길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민이나 성도들이 경계해야만 하는 사악한 생각입니다(22:32).

하나님께서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바라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파하고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이기적이고 현세적인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선지자 발람의 경우와 같은 믿음의 실족이며 영적인 타락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오늘날의 성도들도 결코 자유스럽지가 않습니다. 똑같은 올무에 걸리고 동일한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선지자 발람의 일대기를 깊이 묵상함으로써 자신들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바로 잡아가시는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풍성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