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122강(민22:41-23: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1. 8. 23:27

민수기 강해 제122(22:41-23: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225(주일)

 

모압 왕 발락의 권유로 바알의 산당에 올라간 선지자 발람이 멀리 이스라엘 군대의 진영을 바라보면서 모압 왕에게 여호와의 신탁을 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22:41-23:5)

 

북부 시리아 유프라데스 강 상류의 성읍 브돌에 살고 있는 브올의 아들 발람은 그 신통력이 대단하여 그 명성이 시리아인 아람은 물론 그 남부인 모압과 아라비아의 미디안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22:5, 7). 모압 왕인 십볼의 아들 발락은 그를 초청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축복이 저주로 바뀌도록 제사를 드리고자 합니다(22:6).

모압 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을 모압으로 초청하는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처음에는 실패를 합니다(22:12-14). 그러자 더 많은 재물과 높은 관직을 주겠다고 하는 약속을 함으로써 두번째 사절단은 성공을 합니다(22:15-21). 발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640km나 떨어져 있는 모압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발락 왕은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북쪽 국경 아르논 강까지 마중을 나가고 국경도시 기럇후손에서 소도 잡고 양도 잡아서 정성껏 대접을 합니다(22:36-40). 잔치가 끝나자 드디어 여호와의 마음을 움직이는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선지자 발람을 그 근방 신령한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22:41).

그 산의 이름은 기록에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우상인 바알을 모시는 산당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선지자 발람은 여호와의 신탁을 듣기 위하여 발락 왕에게 제단 7을 쌓고 수송아지 7마리와 숫양 7마리를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합니다(23:1). 그와 같은 준비가 갖추어지자 드디어 발람이 여호와께 그 많은 번제물을 드리면서 발락 왕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간구를 합니다(23:2-4).

그러자 여호와의 신탁의 말씀이 들려옵니다(23:5). 그 내용은 발람 왕의 소원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음 번 강해에서 다루고자 합니다(23:6-12). 그 이유는 본문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이 다음과 같이 참으로 많기 때문입니다(22:41-23:5);  

(1)  첫째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인도로 요단 강 동편 아모리 족속의 두 왕국을 쳐부수고 그 땅을 점령하고 있습니다(21:24-35). 그렇지만 그들의 정예병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곳은 사해의 머리 동쪽인 느보 산 근처입니다(22:1). 그곳에서는 요단 강 하류의 동편인 싯딤이 가까워서 언제라도 그곳 평지로 이동하여 강을 건너 길갈과 그 서편의 도시 여리고로 쳐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1)    그동안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과 그 친척들의 자손들이 살고 있는 에돔, 모압, 암몬의 땅을 일체 침범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아모리 족속의 땅을 뺏은 것입니다(2:4-6, 9, 19, 24, 3:2-3). 그리고 이제는 후계자에게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싯딤에서 요단 강을 건너가서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도록 그 준비를 갖추어 주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2)    그러한 사정을 모르고 있는 모압 왕이 그 옛날 아모리 족속에게 빼앗긴 아르논 강 이북지역을 수복하고자 선지자 발람을 초청하여 거국적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22:16-17, 23:2). 그 무지몽매한 제사를 받으신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선민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기회만 있으면 쳐부수려고 시도하고 있는 모압을 계속 이스라엘의 형제국이라고 생각하여 보호해 주실까요? 아니면 훗날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의 전쟁을 못 본체 하실까요? 아무래도 훗날의 역사는 후자로 진행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모압 왕이 먼저 이스라엘 자손들을 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둘째로, 모세가 머물고 있는 느보 산 근처에는 모압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이 바알 신을 섬기고 있던 사당과 마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벧브올 또는 바알므온 등입니다. 그런데 아르논 강 남쪽의 국경지역에도 모압 사람들이 바알 신을 섬기는 산당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가나안 원주민들과 모압인들은 바알 신을 많이 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수호신과 우상을 엄청 섬기고 있는 다신주의(多神主義) 국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발람은 그러한 바알 신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이 훨씬 높은 신이므로 더 많은 제단을 만들고 더 많은 제물을 바쳐야만 그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압 왕 발락에게 7개의 제단을 쌓고 7마리의 수송아지와 7마리의 숫양을 한꺼번에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23:1). 발락 왕 역시 모세의 이스라엘 군대가 단 몇 달 만에 아모리 족속의 두 왕국을 쳐부순 그 놀라운 역사를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모두 그들의 신 여호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바알 신 보다 더 높은 대접을 하고 있습니다. 순순히 선지자 발락의 요구에 응하고 있는 것입니다(23:2).

(3)  셋째로, 여호와 하나님을 바알 신이나(22:41) 그모스 신보다(21:29) 더 높은 신이라고 생각하고 더 많은 제물을 드린다고 하여 과연 여호와의 마음을 움직여서 발락 왕이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수호신이나 우상과는 달리 여호와께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홀로 만드시고 그 역사를 섭리하고 계시는데 그 정도의 제물과 정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1:11-12) 다만 사람들에게 바라고 계시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생명을 돌보고 살리는 선한 청지기가 되라는 것입니다”(1:10, 17, 58:6-12, 25:40). 그러한 여호와의 뜻과는 다른 소원을 말하고 있기에 모압 왕의 소원은 이루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4)  넷째로, 바알을 모시는 산당이 있는 곳에서 여호와의 제단을 따로 만들고 누가 진짜 신인지를 판가름 내고자 하는 시도가 훗날 600년 후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서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의 시대에 발생하게 됩니다(왕상18:24-37).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이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습니다(왕상18:26-29). 그러나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와께 그곳에 제단을 쌓고 번제와 소제를 드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그 땅을 모두 태우게 됩니다(왕상18:33-38). 그러자 엘리야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합니다(왕상18:39-40). 그와 같은 일의 원형이 벌써 민수기 본문에서 등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다섯째로, 그 옛날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그의 자손들이 400년을 이국 땅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다가 4대 만에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5:13-16a). 그리고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하게 되는 그 때에 그들의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15:16b-21). 그 예언이 여호수아가 이끌게 되는 이스라엘 자손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이전에 사실은 모세의 말년에 요단 강 동쪽 땅에서 상당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430년간 애굽에 체류하는 동안에 모세의 족보만은 레위, 고핫, 아므람, 모세로 이어지는 4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의 군대를 지휘하여 아모리 족속의 두 왕국을 쳐부수고 그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22:41);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하고 그를 인도하여”(22:41a); 모압 왕 발락의 마음이 급합니다. 강성한 모세의 이스라엘 군대의 힘을 빨리 약화를 시켜야 전쟁을 벌여서 승리를 얻고 아르논 강 북쪽의 땅을 회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면 모처럼 모압을 방문한 선지자 발람을 빨리 움직여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의 마음을 이스라엘 자손들을 저주하는 쪽으로 돌려세워야만 합니다. 신통한 능력자 발람이 왔을 때 빨리 그 일을 해치워야만 합니다. 따라서 발람을 잘 대접한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모압 왕은 그를 데리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길을 나섭니다(22:41a).

(2)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22:41b);

1)    모압 사람들이 평소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 없기 때문에 바알의 산당이 있는 산지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22:41b). 모압 왕의 생각으로는 모압의 수호신이며 우상인 바알이나 이스라엘의 수호신이며 우상인 여호와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알의 산당에서도 여호와에게 제사를 드릴 수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2)    그렇지만 모압 왕인 발락은 바알과 여호와의 차이 하나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알 신보다는 여호와 신이 더 힘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압 왕인 발락은 옛날에 아모리 족속의 지파의 족장인 시혼과 싸워서 패하여 아르논 강 이북지역을 상실했는데 여호와를 섬기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막강한 아모리 시혼 왕의 군대를 거뜬하게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이스라엘 군대와 싸워서 승리를 얻자면 먼저 여호와 신과 이스라엘 사이를 이간시켜서 그들의 힘을 약화시켜야 합니다. 그 일을 이제 능력 있는 무당인 발람이 모압을 위하여 실현할 것입니다.

(3)  발람이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니라”(22:41c); 바알 신을 섬기는 산당이 있는 곳이 높은 산이라고하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산당에 올라간 선지자 발람이 그곳에서 북녘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지를 전부 내려다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상대방의 진영을 내려다 보면서 그는 모압 왕 발락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부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를 내리시도록 큰 제사를 드려야만 합니다. 모압 왕이 어느 정도로 정성을 바치면 그러한 역사가 발생을 할까요?

둘째로,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제단 7 쌓고 거기 수송아지 7마리와 숫양 7마리를 준비하소서 하매,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 발락과 발람이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23:1-2);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제단 7 쌓고 거기 수송아지 7마리와 숫양 7마리를 준비하소서 하매”(23:1);

1)    선지자 발람은 여호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하여 어느 정도의 재물이 필요한지를 다음과 같이 모압 왕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바알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그 제단을 그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②둘째, 별도로 7개의 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 1마리와 숫양 1마리씩을 번제로 바치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압 왕이 그 정도의 정성을 보여야 선지자 발람의 제사와 기도가 효험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나를 위하여”(23:1)의 의미입니다.

2)    참고로, ‘7이라고 하는 수는 히브리인들의 관념에 따르면 완전수입니다. 하나님의 숫자인 3에 인간의 수인 4를 더한 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7제단을 쌓고 7마리의 수송아지와 7마리의 숫양을 모두 번제로 여호와께 바친다고 하는 것은 신을 감동시킬 만한 인간의 정성을 보인다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정도의 정성을 보이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과연 움직일 수가 있을까요?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이 본문 다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3)    세상의 수호신이나 우상이라고 하면 그러한 7이라고 하는 제물의 수에 영향을 받겠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라고 하는 의미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뜻은 피조물에 의하여 움직임을 당하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스스로 결정하고 움직이시는 창조주의 능동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3:14). 그러므로 모압 왕 발락이나 선지자 발람이 무당적인 생각으로 아무리 정성을 보이고 용을 써보아도 그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 나무에 가서 생선을 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2)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준비한 후에”(23:2a); 모압 왕 발락은 선지자 발람의 요구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금방 알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최대한의 성의를 표시하고 자신의 정성을 속히 보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진영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국가적인 대사이기에 그 정도의 준비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즉시 7제단을 쌓고 7마리의 수송아지와 7마리의 숫양을 제물로 마련하고 있습니다.

(3)  발락과 발람이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23:2b);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제사는 제사장의 전담 업무입니다. 그런데 모압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선지자 발람의 고향인 아람왕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제사장의 역할을 겸하고 있습니다. 훗날 북조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아합 왕의 시대에 바알 신을 섬기는 선지자 450명이 제사장의 일을 겸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왕상18:19, 26). 여기 본문에서는 모압 왕인 발락과 선지자 발람이 7제단에 각각 수송아지와 숫양을 번제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입회만 한 것인지 아니면 직접 그 제사에 관여를 한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제사장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가리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알리리이다 하고 언덕길로 가니,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23:3-4a);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나는 저리로 가리이다. 여호와께서 혹시 오셔서 나를 만나시리니”(23:3a); 선지자 발람이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은 특별하신 신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알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산당의 옆에서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고 제물을 바쳐 제사를 드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곧바로 여호와의 신탁이 임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신 중의 신이시기에 일반 수호신이나 우상과는 달리 조용한 중에 좀 떨어진 곳에서 그 음성으로 선지자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람은 모압 왕에게 번제물 옆에 그대로 서 계시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좀 떨어진 조용한 곳에 가서 기도로 여호와께 당신의 소원을 말씀드리고 신탁을 받아 오겠다는 것입니다.  

(2)  그가 내게 지시하시는 것은 다 당신에게 알리리이다 하고 언덕길로 가니,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시는지라”(23:3b-4a); 불안해하는 모압 왕을 선지자 발람이 안심을 시키고 있습니다. 정성을 크게 보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조용한 곳에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신탁의 말씀을 주실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도 빼놓지 아니하고 그대로 와서 모압 왕에게 전달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말을 남기고 선지자 발람은 언덕을 하나 넘어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기를 시작합니다. 그러자 그 조용한 곳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임재를 하십니다.

넷째로,발람이 아뢰되, 내가 7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23:4b-5); 역시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람이 아뢰되, 내가 7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렸나이다”(23:4b); 여호와의 임재를 영적으로 느낀 발람이 모압 왕이 바친 제사를 자신이 여호와께 바친 제사이며 제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7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골고루 수송아지와 숫양을 바쳤으니 그 정성을 보시고 좋은 응답을 달라고 하는 취지가 그 말속에 들어 있습니다.

(2)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23:5); 그러한 선지자 발람의 말에 여호와께서 영향을 받으실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호와의 입장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처음과 끝이 같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선지자 발람에게 주신 말씀 그대로 너는 그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22:12)는 것이 여호와의 진심인 것입니다. 그러한 신탁의 말씀을 모압 왕 발락에게 가서 그대로 전하는 것이 선지자 발람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 사실을 모압으로 오는 도상에서 천사를 보내어 벌써 다음과 같이 강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전할지니라”(22:35). 그러한 의미에서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23:5)는 본문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선지자와 무당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모압 왕은 바알 신을 섬기는 산당에서 발람에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그 자리에서 신탁의 말씀을 받으라고 종용합니다. 모압에서는 바알을 섬기는 무당들이 그렇게 행동을 했기에 발락 왕이 그렇게 알고서 선지자 발람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발람은 달리 모압 왕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던 제단을 여호와께는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이 7개의 제단을 쌓도록 요청합니다. ②둘째,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한 마리씩 번제로 바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제사를 드린 다음에 발람은 제단 앞에 모압 왕을 세워 두고 자신은 언덕을 넘어 조용한 곳에 가서 여호와의 임재를 바라며 기도를 드립니다. 그는 여호와께서는 조용한 곳에서 선지자에게 임재하여 그 음성으로 신탁의 말씀을 주시는 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압 왕 발락이 원하고 있는 무당의 행태와 선지자 발람의 행동이 상당히 달라 보입니다. 훗날에는 선지자 발람이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탐욕에 사로잡혀서 어떻게 변질이 되어갈지 몰라도 여기서는 최소한의 선지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선지자들입니다(벧전2:9). 그러므로 그 옛날 아람왕국의 선지자인 발람보다는 더욱 여호와께 조용하게 기도를 드리고 그 음성을 듣는 영성생활에 힘써야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주님의 교훈과 행적에 비추어서 그 뜻을 깨달아 실천하는 복음적인 예배인생들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모압의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