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124강(민23:13-2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1. 10. 02:29

민수기 강해 제124(23:13-2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227()

 

어째서 발락 왕이 선지자 발람을 데리고 이스라엘 진영의 끝만 보이는 곳에 데리고 가서 다시 신탁의 말씀을 받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여호와의 답변은 무엇인가?(23:13-20)

 

 모세오경은 히브리정경의 제일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유대교의 경전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 있어서도 그 정경의 편집에 있어서 구약의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모세오경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그 정경의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모세오경에 여호와의 뜻과 세상경영의 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뚜렷한 기초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오경 가운데 첫번째 기록인 창세기가 특히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입문서 중의 입문서는 창세기이며 그 속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세상창조와 경영의 지침이 모두 대설정으로 들어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창세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먼저 알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1:1-30).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여호와의 창조의 질서를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2)  둘째, 땅의 피조물들을 돌보도록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1:26-30). 그들이 여호와의 창조의 질서를 따라 피조물들을 돌보고 있는 모습을 여호와께서 보시고 참으로 좋다고 평가하십니다(1:31).

(3)  셋째, 그러나 인간세상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약육강식의 사회를 만들고 개인들이 집단적으로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6:1-6).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던 여호와께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인 영적인 삶을 버려버리고 이제는 육신적인 삶만을 추구하고 있는 인간들을 더 이상 버려 두지를 못하시고 드디어 심판에 나서십니다(6:7-13). 간접개입에서 직접개입으로 나서시자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과 같은 인류역사의 단절이 등장합니다(7:21-23).

(4)  넷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아니하는 이상 그와 같은 심판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무지개언약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섭리의 방향성을 보여주십니다(6:5, 8:21-22, 9:11-17). 구체적으로 여호와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역사섭리의 지향점이 모세오경과 선지서 그리고 시편의 말씀 등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성령님에 대한 예언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24:44-45). 예컨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희생으로 이루시는 대속의 은혜 그리고 회개한 성도들이 어떻게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서 교회를 건설하고 온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 등이라고 하겠습니다(24:46-49).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은 성경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모압 왕 발락과 아람의 선지자 발람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모압 왕 발락은 십볼의 아들이라고 누차 모세가 강조하고 있습니다(22:2, 4, 23:18). 당시 히브리말로 십볼은 그 뜻이 작은 새입니다. 그것은 당시 흔한 이름이며 여성들도 십보라라고 발음하여 사용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가 그러합니다(2:21). 그녀가 미디안 족속의 양치기에 불과하듯이 별로 대단한 이름이 아닙니다(2:16). 왕의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발락의 아버지 십볼은 그 이름의 뜻으로 볼 때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볼의 아들로 태어난 발락은 왕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가문의 도움이 없이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모압의 통치자가 된 인물입니다. 그만큼 그는 걸출한 영웅입니다.

(2)  둘째, 발락과 같은 영웅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한번 목표를 정하면 포기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민수기의 기록에 그 점이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1)    그는 자신의 군사력이 아모리 족속 시혼 왕에게 미치지 못함을 알고서 시혼의 왕국이 쇠퇴하기를 오래 기다린 인내의 인물입니다. 그만큼 냉철한 판단력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모압의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약하여 아모리 족속 시혼에게 아르논 강 이북지역을 빼앗겼기에 그것을 되찾고자 절치부심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타나서 시혼 왕의 영토를 전부 정복하고 맙니다. 이제 발락 왕의 타도대상은 시혼 왕이 아니라 모세와 그의 군대입니다.

2)    그런데 그는 감히 모세의 이스라엘 군대와 전투를 하고자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몇 개월이 되지 아니하는 사이에 모세가 북으로 도망하는 시혼의 잔당을 쫓아서 아예 바산 왕국마저 정복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중동의 역사에 있어서 그것은 엄청난 충격입니다. 반년도 되지 아니하는 동안에 그 강력한 아모리 족속의 두 왕국이 모세에 의하여 지도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21:23-35). 그렇다면 그보다 군사력이 훨씬 약한 모압 왕 발락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3)    그가 찾아낸 해법은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반() 이스라엘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나라들이 동참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22:2-4). ②또 하나는 모세의 군대가 강한 이유를 발견한 것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모세의 군대가 승리를 얻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입니다. 따라서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하도록 하기만 하면 승리는 모압 왕의 것입니다(22:5-6). 그 일을 위해서는 신통력이 대단한 술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정성과 재물을 바쳐서 멀리 아람 왕국에 살고 있는 선지자 발람을 640km나 남쪽에 떨어져 있는 모압으로 초청한 것입니다(22:5-7).

4)    선지자 발람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하여 부디 이스라엘 자손들을 저주하게 해달라고 하는 모압 왕의 청탁을 받고서 고민을 합니다(22:7). 자신의 능력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움직일 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그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긍정적인 신탁의 말씀이 없으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모압에서 온 첫번째 사절단에게 여호와의 신탁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합니다(22:8). 밤새 기도한 결과 모압 왕에게 협조하지를 말라고 하는 응답을 얻습니다(22:12). 따라서 발락 왕의 사절은 빈손으로 모압으로 돌아가고 맙니다(22:13-14).

5)    그러나 모압 왕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는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모압 족속의 왕의 자리에 오른 인물입니다. 따라서 집념을 가지고 포기하지 아니하고서 더 높은 귀족들을 사절단으로 파견합니다. 더 큰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하는 모압 왕의 약속을 가지고 선지자 발람의 고향으로 보냅니다(22:15-17). 그 결과 발람이 밤새 고민을 하면서 기도를 하다가 마침내 모압으로 가도 좋다고 하는 여호와의 신탁을 받아 냅니다(22:20). 집념의 사나이 모압 왕의 생각이 맞아 들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3)  셋째, 겉으로 보면 도전정신이 강하고 포기할 줄을 모르는 집념의 왕 발락이 승리를 얻고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섭리하시는 여호와의 의도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어째서 여호와의 신탁이 달라지고 있는 것일까요? 두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모압 왕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선지자 발람의 마음을 여호와께서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모압의 현지에서 시험을 받고 그것을 극복해야만 합니다(4:1-11). ②또 하나는 발락 왕을 단념시키자면 현지에서 선지자 발람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하여 정확하게 신탁의 말씀을 그에게 전해 주어야만 합니다(23:1-10). 몇 차례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집념의 사나이, 도전정신이 강한 발락 왕이 마침내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24:25). 그와 같이 사람을 다룰 줄 아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2)    발락 왕은 모압으로 찾아온 선지자 발람의 의견대로 모세의 이스라엘 군대의 진지가 모두 보이는 산 정상에 제단 7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께 온갖 정성을 바치고 있습니다(22:41-23:1).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한 마리씩 잡아서 번제로 드립니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 가서 선지자 발람이 여호와의 신탁을 받아 옵니다. 그 내용은 축복의 대상인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께서는 전혀 저주하실 생각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23:7-12). 그러나 발락 왕은 포기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23:13-20).

3)    모압 왕은 선지자 발람이 좀더 모세의 이스라엘 군대의 진영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의 본진이 있는 느보 산자락의 서편에 솟아 있는 비스가 산지로 그를 데리고 갑니다(23:13-14). 그는 선지자 발람을 술사나 무당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인 발람의 환심만 사게 되면 자신의 소원대로 여호와의 마음을 얼마든지 바꿀 수가 있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상문화의 특징입니다. 발락 왕은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입니다. 과연 그의 소원이 이루어질까요? 아니면 여호와의 생각과 뜻이 한결같은 진리로 나타날까요? 역사를 섭리하시는 창조주의 생각이 무엇인지 본문에서 그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3:18-20).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발락이 말하되, 나와 함께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 거기서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끝만 보리니,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하고,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 7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23:13-14);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락이 말하되, 나와 함께 그들을 달리 볼 곳으로 가자. 거기서는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끝만 보리니, 거기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하고”(23:13);

1)    흔히 소경이 코끼리 만지기라는 속담을 사용합니다. 그 의미는 코끼리라고 하는 큰 동물은 멀리서 사람이 그 눈으로 볼 때에 그 모양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는데 소경은 그 눈으로 코끼리를 볼 수가 없으므로 전체 모양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경은 일일이 손으로 만져보고서 머리속으로 그 모양을 그리고 있으므로 어느 부위를 쓰다듬어 보았느냐에 따라서 코끼리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세계는 인간의 능력으로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수호신이나 우상 앞에 서게 되면 술사나 무당이 어느 신과 접신을 하여 신탁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그 예언이 달라집니다.

2)    그런데 선지자 발람이 전하고 있는 여호와의 신탁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처음 모압 왕이 사절단을 아람으로 보냈을 때에 발람이 전해 준 여호와의 신탁, “그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22:12)는 말씀과 모압 땅 아르논 강의 언덕 바알을 모신 산당에 올라가서 선지자 발람이 전해준 신탁의 말씀,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23:8)는 말씀은 서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진리의 신탁의 말씀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3)    그렇지만 모압 왕 발락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어느 산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신탁을 들었느냐?에 따라서 그 신탁의 말씀은 달라질 수 있다고 사고합니다. 그 결과 그는 선지자 발람을 데리고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23:13a). 모세의 이스라엘 군대의 진영이 일부 내려다 보이는 지역까지 가까이 접근을 합니다(23:13b). 그곳에서 직접 발람의 눈으로 모세의 군대를 보면서 그들을 저주하도록 여호와께 제사도 드리고 기도도 간절하게 드리라는 것입니다(23:13c).

(2)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23:14a); 여기서 소빔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파수꾼입니다. 지금 느보 산 기슭과 그 아래 들판에 이스라엘 군대가 진지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압 왕은 모세의 군대의 동향을 살피기 위하여 느보 산의 서쪽에 있는 비스가 산지의 꼭대기에 파수꾼을 은밀하게 세우고 있습니다(23:14aa). 그들이 적진을 살피고 있는 최전선입니다. 그렇게나 위험한 곳까지 발락 왕이 선지자 발람을 데리고 간 것입니다(23:14ab). 바로 눈 아래에 모세의 본진의 끝을 볼 수가 있는 곳입니다(23:13).

(3)  7제단을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23:14b);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가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제례의식은 같습니다. 여전히 7개의 제단을 소빔 들판의 위에 있는 비스가 산지의 봉우리에 쌓고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한 마리씩 번제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수 ‘7이 거듭 사용되고 있으므로 소위 사람이 여호와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둘째로,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나 뵐 동안에 여기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하니라. 여호와께서 발람에게 임하사 그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발람이 가서 본즉, 발락이 번제물 곁에 섰고 모압 고관들이 함께 있더라.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23:15-17);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저기서 여호와를 만나 뵐 동안에 여기 당신의 번제물 곁에 서소서 하니라. 여호와께서 발람에게 임하사 그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23:15-16);

1)    7개의 제단에 선지자 발람이 모압 왕 발락과 함께 일일이 제물을 번제로 바치고 있습니다(23:14b). 모압 왕의 대단한 정성이 7마리의 송아지와 7마리의 양을 제물로 삼아 여호와께 번제로 바쳐진 것입니다. 이제는 선지자 발람이 조용한 곳에서 여호와께 발락 왕의 소원을 아뢰고 그 신탁의 말씀을 받을 차례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선지자 발람은 외딴 곳을 선택하여 자리를 옮깁니다.

2)    비록 모압 왕이라고 하더라도 발람이 기도를 드리고 영적으로 여호와를 만나는 자리에는 함께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선지자 발람이 여호와의 신탁을 받아 올때까지 그 번제단 옆에 서서 경건하게 기다리고 있어야만 합니다(23:15). 한 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선지자 발람의 영적인 권위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조치를 취한 후에 조용한 곳에서 발람이 발락 왕의 소원을 아뢰자 여호와의 음성이 신탁의 말씀으로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23:16).

(2)  발람이 가서 본즉, 발락이 번제물 곁에 섰고 모압 고관들이 함께 있더라.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23:17); 여호와의 신탁의 말씀을 받아서 번제단 앞으로 돌아온 선지자 발람이 가장 먼저 모압 왕과 대신들이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있습니다(23:17a). 그렇게 간절하게 여호와의 말씀을 사모하고 있는 자들에게 여호와의 신탁의 말씀이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모압 왕이 돌아온 선지자 발람에게 즉시 묻고 있습니다;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23:17b).

셋째로,발람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내게 자세히 들으라. 하나님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23:18-19);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람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내게 자세히 들으라”(23:18);

1)    선지자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에는 영적인 권위가 다음과 같이 담겨 있습니다; “발람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내게 자세히 들으라”(23:18). 여호와의 말씀을 왕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겸손한 자세로 들어야만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2)    ①첫째,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이 선지자 발람의 입을 통하여 모압 왕 앞에 직접 전해지기 때문에 그 부르는 호칭이 발락이여’(23:18a)입니다. ②둘째, 모두들 그 자리에서 일어나 여호와의 말씀을 겸손하게 들으라는 명령입니다(23:18b). ③셋째, 그와 같은 취지의 말씀이 다시 한번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십볼의 아들인 발락은 귀를 기울여 선지자 발람이 전해주는 여호와의 신탁의 말씀을 자세하게 들으라는 것입니다”(23:18c의역).

(2)  하나님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23:19a);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첫째, 피조물인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만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진실만을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 뿐인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거짓말을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영생의 존재이시며 창조의 능력의 소유자이시기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2)    둘째, 피조물들이 자신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또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때로는 거짓말을 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숨도 안전보장도 사실은 모두 창조주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짧은 지혜와 판단으로 살아온 것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울 따름입니다.

3)    셋째, 그와 같은 사실을 먼저 선지자 발람이 여호와의 신탁으로 말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얻은 여호와의 말씀은 한결 같은 진리이며 변경의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3)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23:19b); 여호와 하나님이 두려우신 이유는 스스로 하신 말씀을 반드시 실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훗날 선지자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55:8-11). 그러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의 원형을 여기서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23:20); 선지자 발람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은 신탁의 말씀은 온통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얻은 발람은 그 축복의 신탁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축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모압 왕이 그것을 원하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발람 자신은 여호와의 신탁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변경하거나 왜곡하여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며 무효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선지자로서의 입장을 본문에서 발람이 확고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23:20). 하지만 발람의 말은 보기에 따라서는 부디 선지자인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고 모압 왕에게 사정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한평생 여호와의 선지자로 올바르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그 비결이 본문 가운데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발람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내게 자세히 들으라. 하나님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23:18-19).

(1)  첫째,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성도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왕명을 받들 듯이 그렇게 여호와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야만 합니다. 자신의 위치가 교계의 지도자라고 하여 또는 세상의 임금이라고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앉은 자리에서 거만하게 받아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2)  둘째, 사람은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진리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처음과 끝이 같으며 안과 밖이 동일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과 성자 그리스도의 실천이 같습니다. 성도들에게 임재하신 성령님의 역사하심도 성부와 성자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성도들은 그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진리를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자신의 인생을 걸고서 실천을 하여야 합니다.

(3)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대로 인생을 사시면서 그 말씀을 전파하시고 제자를 양육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그 깨달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길이며 후회함이 없는 인생입니다.

  여호와의 신탁을 받은 선지자 발람이 그와 같은 인생을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전하고 있는 여호와의 신탁은 정확한 것입니다. 그 점을 생각하시면서 아무쪼록 선지자 답게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비스가 산지와 느보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