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126강(민23:27-24: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1. 11. 02:58

민수기 강해 제126(23:27-24: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31()

 

모압 왕은 세번째로 발람을 어디로 인도하여 그에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여 자신의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가?(23:27-30) 그 결과 얻고 있는 신탁의 첫머리가 무엇이며 그것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24:1-5)

 

본문에서 모세가 적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1)  첫째로, 모압 왕인 발락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선지자 발람을 데리고 한번은 아르논 강 남쪽에 있는 높은 산 바알의 신당으로(22:41), 또 한번은 아르논 강 북쪽에 있는 비스가 산지로 데리고 가서(23:14) 여호와께 7제단을 쌓고 흡족하게 제물을 바쳤지만 여호와가 주시는 신탁의 말씀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23:7-12, 20-26). 그러나 발락 왕은 포기하지 아니하고 한번 더 시도를 합니다;

1)    발락 왕이 선지자 발람을 데리고 간 곳은 느보 산 북쪽 8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브올 산입니다(23:28). 브올 산에서 내려다보면 북쪽 4km지점에 넓은 광야가 있는데 그 중심지가 싯딤입니다. 그곳에 지금 이스라엘 12지파가 진을 치고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싯딤에서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강(渡江, 강을 건넘)을 하면 그 서쪽이 길갈이며 그 근방의 큰 성읍이 여리고입니다.

2)    싯딤에서 모세는 자신의 후계자를 세우고 그 손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요단 강을 건너가게 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모압 왕은 오로지 모세의 군대를 쳐부수기 위하여 술사인 발람의 힘을 이용하고자 열심입니다. 발람이 주술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여호와의 신탁을 얻어 주기만 하면 발락 왕은 모세의 이스라엘 군대를 단숨에 쳐부수고자 하는 것입니다(23:27-30).

(2)  둘째로, 발람의 생각은 모압 왕의 생각과 다릅니다. 그는 다른 수호신이나 우상이라면 몰라도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술법이나 신통력이 전혀 통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23:23). 그러므로 자신의 신통력을 이용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저주하도록 하는 신탁을 얻고자 하는 발락 왕의 소원은 실현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발람이 모압 왕의 요청을 단숨에 거절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가 약속하고 있는 상급과 보상이 워낙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22:17, 37). 따라서 발람은 모압 왕의 뜻대로 브올 산에 올라가서 7제단을 설치하고 다시 엄청난 제사를 드립니다(23:28-30). 그리고 발락 왕의 소원을 다시 여호와께 기도로 아뢰고 긍정적인 신탁의 말씀을 받고자 열심입니다.

(3)  셋째로, 선지자 발람은 여호와 앞에서 점술을 사용하지를 못합니다(24:1). 그렇지만 과거에 간절히 기도하여 자신의 소원의 일부분을 이룬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압에서 온 사절단을 처음 만났을 때에 여호와께서는 자신에게 모압 왕의 요청에 일체 응하지 말라고 하셨지만(22:10-12) 두 번째 사절단이 왔을 때에는 그가 간절하게 기도하자 모압으로 가도 좋다고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22:19-20). 물론 그 모압 행()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신탁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모압 왕에게 전달해야만 한다는 엄격한 단서가 붙어 있는 조건부 허락인 것입니다(22:20, 35). 그래서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저 모압 왕의 마음에 맞는 신탁의 말씀을 주셔서 자신에게 부귀영화가 주어지게 되면 좋겠지만 그것이 여호와의 뜻에 어긋나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을지 부디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소원을 아뢰면서 브올 산 아래 북쪽에 펼쳐져 있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진지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24:2a). 바로 그때 여호와의 영이 선지자 발람에게 임하고 그가 예언을 시작하게 됩니다(24:2b-3a).

(4)  넷째로, 발람의 입을 통하여 흘러나오고 있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은 그 내용이 심상한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의 의미를 크게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24:3b-5);

1)    하나는 세상의 것에 유혹을 받아서 그 탐심 때문에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자가 이제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은혜로 눈뜬 소경을 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다음 4가지의 변화가 발생합니다; ①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②둘째, 창조주 여호와를 환상 가운데 만나고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실감하게 됩니다. ③셋째, 여호와 앞에 엎드릴 줄 아는 겸손한 하나님 경외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④넷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야곱의 인생이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여호와께서 주시는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4가지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기본이 오늘날에도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믿음생활에 있어서 다음 4가지의 기초가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③첫째, 정신없이 세상으로 향하고 있는 성도의 마음을 오늘날에도 성령님께서 여호와 하나님께로 되돌리고 계십니다. ②둘째,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뜻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③셋째, 성도들이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주님의 종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④넷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와 성도들의 공동체가 얼마나 성령님 안에서 아름다운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발락이 발람에게 또 이르되,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거기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하고, 발락이 발람을 인도하여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에 이르니”(23:27-28);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락이 발람에게 또 이르되, 오라 내가 너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리니, 거기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하고”(23:27);

1)    모압 왕 발락은 두 차례나 선지자 발람을 이용하여 여호와의 저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도록 제사를 드렸지만 모두 헛일이 됩니다. 처음에는 아르논 강 남쪽 국경지대에 있는 바알 산당의 곁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느보 산 서쪽 비스가 산지의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두번이나 제사를 드렸지만 모두 저주가 아니라 축복의 신탁을 얻고 말았습니다(23:11, 24-25).

2)    이제 모압 왕은 마지막으로 한번 더 시도해보기로 합니다(23:27a).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가 달라지면 그 신탁의 말씀도 달라지지 아니할까?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발락 왕과 같은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심심치 아니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미지역이나 아시아 또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달라지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3)    나아가서 민족별로 종교와 사상이 상당히 다르다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을 감안하지 아니하고 있는 인간들의 좁은 생각에 불과합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감찰하시고 그들의 역사를 전부 섭리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겸손하게 인정하게 되면 자신들의 지역적인 특수성이나 민족적인 이익을 너무 앞세우지 아니하게 될 것입니다.

4)    거기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기를 하나님이 혹시 기뻐하시리라 하고”(23:27b)라고 하는 모압 왕의 생각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이 들어 있습니다; ①첫째, 하나님은 그 장소에 따라 의사결정을 달리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동안 두 차례나 선지자 발람이 모압 왕 자신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말리신 여호와 하나님은 제3의 장소에서는 허락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5)    ②둘째, 하나님은 그 능력의 발휘가 일정한 장소에 국한된 것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3의 장소로 선지자 발람이 옮겨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지를 내려다보고서 저주의 말씀을 퍼붓게 되면 여호와께서도 이번에는 그것을 말리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창조주이시며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몰지각한 사고방식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2)  발락이 발람을 인도하여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 산 꼭대기에 이르니”(23:28);

1)    모압 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을 데리고 다닌 지역이 다음과 같습니다; ①처음에는 아르논 강 남쪽 국경지대에 있는 높은 산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는 모압 사람들이 바알 신을 섬기고 있는 산당이 있습니다. ②그 다음에는 발람을 아르논 강 이북에 있는 느보 산 서쪽 비스가 산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 높은 곳에서 멀리 느보 산 아래까지 뻗어 있는 이스라엘 진영의 끝을 바라보고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2)    이번에는 모압 왕이 선지자 발람을 데리고 느보 산과 싯딤 사이에 있는 브올’(Peor) 산 꼭대기로 올라갑니다(23:28). 브올 산은 느보 산에서 북쪽으로 8km이며 싯딤에서는 남동쪽으로 4km지점입니다. 여기서 브올’(Peor)이라고 하는 용어는 지명이며 그 뜻은 본래 열리다입니다. 그러므로 브올 산은 마치 한국의 계룡산처럼 신계(神界, 신의 세계)가 열리는 신령한 산입니다. 그에 따라 모압 사람들과 미디안 사람들 그리고 아모리 사람들이 그곳에서 바알 신을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곳에서 섬기고 있는 그곳의 바알 신을 바알브올이라고 부르며(25:3) 브올 산을 달리 바알브올의 집이라고 하여 벧브올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3:29).

3)    참고로, 한국말로는 같은 브올이지만 지명이 아니라 인명으로 사용이 되는 용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어로 브올’(Beor)입니다. 그 말은횃불이라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민수기에서는 브올이 바로 선지자 발람의 아버지입니다(22:5).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지파별로 진을 치고 있는 싯딤은 광야인데 그 이름이 여전히 모압 광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일찍이 아모리 족속 시혼 왕에게 빼앗긴 땅이지만 옛날 지명이 사용이 되고 있는 이유는 그곳에서 모압인들과 미디안 사람들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들은 남동쪽 4km지점에 있는 브올 산에 올라가서 바알 신을 심하게 섬기면서 혼음을 하고 또한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모세가 모압 광야 싯딤에 머물면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후계체제를 갖추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장정들이 바알 신을 섬기고 있는 벧브올에 찾아가서 그곳 여인들과 혼음을 즐기고 있습니다(25:1-3). 그 결과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전염병으로 죽게 한 자가 24천명이나 됩니다(25:9).

5)    어째서 모압의 여인들과 미디안의 여인들이 바알브올의 축제에 이스라엘 장정들을 초대하여 육체적으로 혼음을 즐기게 하고 영적으로 타락을 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일까요?(25:1-3) 그 이유는 미디안 족속과 함께 머물면서 발람이 그 방법만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꾀라고 하는 사실을 모압의 귀족들과 미디안의 장로들에게 말해주고서 그 반대급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31:16, 1:11, 2:14). 그 결과 선지자 발람이 얼마 후에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붙잡혀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31:8).

둘째로,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7제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7마리와 숫양 7마리를 준비하소서.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행하여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23:29-30); 역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7제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7마리와 숫양 7마리를 준비하소서”(23:29); 선지자 발람이 모압 왕 발락에게 요구하고 있는 제례의식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산에 번제단 7개를 만들고 거기에 각각 한 마리씩의 수송아지와 숫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바치는 것입니다. 발람이 요구를 하자 모압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그 높은 브올 산까지 자재를 은밀하게 운반하여 7개의 제단을 쌓고 14마리의 가축을 제물로 몰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정성입니다.

(2)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행하여 각 제단에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니라”(23:30);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자 모압 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의 도움을 받아서 각 제단에 번제물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발락 왕이 여호와께 바치고 있는 정성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제물을 많이 바친다고 하여 여호와의 뜻에서 어긋나는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여호와의 뜻을 수용하여야 하며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모든 인생들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에게 자신의 뜻에 주인의 뜻을 맞추어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친 것을 보는데 그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24:1-2);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24:1a);

1)    여기서 점술’(占術, 점을 치는 수법, sorcery)로 번역이 된 것은 사실 주술’(呪術, 저주하는 술법, sorcery or incantation)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만약 발람이 점술을 사용한다고 하면 그것은 상대방을 저주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러한 저주의 술법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24:1aa).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축복하기를 원하시지 저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24:1ab).

2)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선지자 발람이 만약에 술법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고자 나서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요?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발람 자신에게 임하게 됩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여호와께서 천사를 보내어 칼로 발람을 죽여버리겠다고 이미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22:33-35). 그러므로 발람은 모압 왕에게 정성껏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라고 요구하고서 자신은 술법을 사용하지 아니한 채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2)  그의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천막친 것을 보는데”(24:1b-2a); 브올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북쪽 4km 지점에 모압 광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중앙에는 성막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성막을 중심으로 동남서북의 방향을 따라서 제1진영부터 제4진영까지 이스라엘 군대가 포진하고 있습니다(2:1-32). 그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그들 지파의 백성들이 천막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240만명의 백성들이 넓은 광야에 천막을 치고 있는 광경이 장관입니다(24:1b-2a). 선지자 발람의 주 관심사는 그 진지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는 성막입니다. 그곳 지성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여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서부터 브올 산 위에 있는 선지자 발람에게로 비쳐오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때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24:2b); 영적으로 민감한 선지자 발람입니다. 그의 눈에 성막에 임재하여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포착이 되고 있습니다. 그 순간에 시공간을 뛰어 넘어서 갑자기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발람에게 임하고 있습니다(24:2b). 참고로,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의 임재를 소원하고 있다고 하면 먼저 성령님께서 임재하여 역사하고 계시는 그 장소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곳에 관심을 두고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기를 간구하게 되면 성령님께서 자신에게도 임재하여 역사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님께서 발람의 영혼을 사로잡게 되자 갑자기 그가 예언을 하게 됩니다. 과연 어떠한 내용의 현상일까요?

넷째로,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야곱이여 너의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어찌 그리 아름다운고”(24:3-5); 다음과 같이 6부분으로 나누어 상세하게 살펴봅니다;

(1)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24:3a); 여호와의 영이 임하고 선지자가 성령님의 역사로 예언을 하게 되는 현상은 발람에게서만 발생하고 있는 일이 아닙니다(24:3a). 38년 전 바란 광야에서 모세가 12지파에서 민간인 지도자인 70명의 장로들을 여호와 앞에 데리고 오자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재하여 예언을 하는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11:24-25). 장차 그러한 현상이 성령세례로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일찍이 모세가 가지고 있는 소원이기도 합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1:29). 먼 훗날 모세의 소원이 주님의 은혜로 오순절날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취가 됩니다. 그때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님의 임재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큰 일 행하심을 방언으로 선포하고 사도 베드로가 히브리어로 선포함으로써 놀랍게도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2).

(2)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24:3b); 영적으로 눈뜬 소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정경을 읽어도 그 뜻을 헤아리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발생하여도 그것을 자연의 이치 정도로 치부하고 마는 자들이 영적으로 눈뜬 소경들입니다(6:9). 게다가 영적으로 자신의 인생과 생명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장하고 계시는데 그 사실을 깨닫지를 못하고 자신이 스스로 주인인 줄 알고서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눈뜬 소경들입니다. 그러한 소경들에게 성령님의 임재로 영적인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24:4a);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자신의 생각과 인간의 사고방식을 내려놓고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아 자신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으로 자리를 잡게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지식 그리고 세상적인 지혜와 논리가 이제는 여호와의 말씀의 뜻을 성취하고 구현하는 도구로 사용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4)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24:4b);

1)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 인생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초월적인 계시를 환상 가운데 영적으로 받게 되면 그 인생이 달라진다고  흔히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랍비 사울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태양보다 더 밝은 빛으로 자신에게 집중적으로 비추어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9:3). 그는 육신적인 눈이 멀어 버리는 대신에 영적인 눈이 뜨여서 그 환상 가운데 여호와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초월 계시를 얻게 되었으므로 사울은 이제 랍비가 아니라 자신이 선지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 흥분합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9:4)는 그 음성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하여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전하고 있는 자들을 열심히 체포하고 있는 자신에게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계시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음성의 주인공에게 누구시냐?고 그 정체를 묻습니다. 그 즉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5)는 답변에 랍비 사울은 자신의 신앙체계가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3)    지금까지 산술적인 하나의 여호와 하나님만을 자신의 신론으로 삼았던 바리새인 랍비 사울은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신비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논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부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영생구원의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어떻게 계시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성도들의 거듭난 삶을 어떻게 영적인 삶으로 인도하고 계시는지를 깨닫고 그것을 하나님의 복음으로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를 시작합니다(7:21-8:18).

4)    따라서 랍비 사울이 이방인 사도인 바울로서 변화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음미해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자가 어떻게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요컨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그 계기라고 한다면 그때부터는 여호와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종으로서의 새로운 영적인 삶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본문의 선지자 발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났지만 그의 삶의 변화는 얻지를 못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5)    비록 그는 영적으로 여호와를 만나고 그 음성까지 들었지만 하나님의 종으로 끝까지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타락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압의 귀족들과 미디안의 장로들에게 가르쳐주고 맙니다. 세상적인 부귀영화를 얻는 대가로 하나님의 백성을 해치는 꾀를 다음과 같이 제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게 되면 여호와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고 선민의 나라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인들을 보내어 모압 광야에 가서 이스라엘 장정들을 브올 산에서 열리는 바알 축제 그 혼음의 쾌락으로 초대하면 되는 것입니다”(25:1-3, 31:16).

(5)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24:4c);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여호와 하나님의 전에 엎드려서 주인의 뜻을 묻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자가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기도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스스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22:42, 26:52-54). 그 길이 바로 부활의 길이며 승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관건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눈을 뜬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서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성도의 삶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6)  야곱이여 너의 장막들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어찌 그리 아름다운고”(24:5); 그렇게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자는 공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첫째, 거듭난 자신의 인생 곧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이 가장 가치가 있으며 이 세상에 온 목적을 달성하는 인생이라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00년 안팎의 인생을 육신을 입고서 살아가는 동안에 영생의 구원을 얻고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티켓을 얻게 된다고 하는 그것이 가장 값진 것이라는 깨달음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모여서 복음사역을 하고 있는 교회와 그들의 공동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고 연약한 자의 믿음을 성숙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발람은 분명히 성령의 감동을 받았으며 예언활동까지 하게 된 선지자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세상의 재물과 영화를 추구하여 잘못된 길로 가고 맙니다. 그는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하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대가를 크게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발람의 유혹과 꾀가 선민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타락시키고 여호와의 진노 가운데 들어가게 만들고 있습니다(25:1-3).

그와 같은 발람의 꾀와 유혹은 오늘날에도 작동을 하고 있습니다. 발람처럼 선지자라고 하면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세속화와 사유화를 추구함으로써 성도들을 영적으로 타락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요한계시록 제2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2:14-16).

그러므로 아무쪼록 깊은 성찰을 바라며 끝까지 여호와의 종으로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느보 산과 싯딤 사이에 브올 산이 위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