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128강(민24:10-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11. 12. 11:33

민수기 강해 제128(24:10-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834(주일)

 

선지자 발람이 3차례나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여호와의 말씀만을 신탁으로 전하게 되자 마침내 모압 왕이 분노하고 있음(24:10-11). 그 화를 피하고자 선지자 발람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24:12-14)

 

모압 왕 발락은 참으로 어렵게 두 차례나 신하들을 사절단으로 북부 시리아 브돌로 보내어 선지자 발람을 모압으로 초청하였습니다. 그 목적은 발람의 주술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여호와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 왕의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발락 왕이 세 차례나 장소를 바꾸어 가면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많이 만들고 충분한 제물을 마련하여 흡족하게 번제를 바칩니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를 한 후에 선지자 발람이 가지고 오는 여호와의 신탁의 말씀은 번번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두번의 제사까지는 참았지만 세번째 역시 선지자 발람이 무능력하게 동일한 여호와의 신탁의 말씀만을 들고 오자 마침내 참았던 모압 왕 발락의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24:10). 선지자 발람을 당장 죽여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그의 주술의 힘에 의하여 어떠한 재앙을 만날지 모릅니다.

따라서 발락 왕은 자신의 분노를 스스로 억제하면서 그에게 빨리 자기 앞에서 눈에 보이지 않도록 도망을 치라고 말합니다(24:11). 선지자 발람은 브올 산에서 도망을 쳐보아야 모압의 광야인데 그 피신이 쉽지 아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따라서 발람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변명도 하고 또한 미래지사를 모압 왕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당장의 진노를 피하고자 합니다(24:12-14);

(1)  첫째, 다른 수호신이나 우상은 몰라도 이스라엘의 수호신인 여호와 하나님에게만은 자신의 주술의 힘이 통하지를 않기 때문에(23:23, 24:1) 여호와 스스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그 마음을 저주로 바꿀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바쳐야 한다고 이미 모압 왕 발락에게 솔직하게 중언을 한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23:1-2, 14, 29-30). 자신은 모압 왕과 함께 여호와께 많은 제물을 드려서 제사를 드리고 한적한 곳에서 발락 왕의 소원을 간절하게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려서 여호와의 신탁을 받았을 뿐입니다(23:3, 15, 24:2). 그리고 그 결과를 정직하게 그대로 발락 왕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이미 말씀드렸기 때문에(22:38, 23:12, 26) 자신이 모압 왕을 속인 적이 없음을 감안하여 달라는 말씀입니다(24:12-13). 재물에 눈이 팔려서 결코 거짓 신탁을 말씀 올린 적이 없으니 자신의 무죄함을 생각해 달라는 것입니다(24:13).

(2)  둘째, 모압 왕 발락이 선지자 발람 자신에 대하여 억지로 분노를 가라 앉히고 있는 것을 보고서 발람은 하나의 팁을 발락 왕에게 주고서 떠나고자 합니다(24:14). 그것은 모압 왕국의 미래지사(未來之事, 미래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통치자인 왕에게 있어서는 천금(千金, 천개의 금만큼 엄청나게 소중한 것을 말함)과 같이 중요한 조언이 바로 왕국의 장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것을 선지자 발람이 자신이 아는 한 정확하게 모압 왕에게 말씀 드림으로써 자신의 밥값을 톡톡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번 강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24:10);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말하되”(24:10a);

1)    특이한 표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흔히 손뼉을 치는 경우는 박장대소(拍掌大笑,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는 것)를 하는 때입니다. 그와 정반대로 이 경우는 이해하기 쉽게 문자를 만들어 보자면, 박장대노(拍掌大怒, 손뼉을 치면서 화를 내는 것)를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살던 주전 15세기 중동 땅에서는 박장대노의 경우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2)    모압 왕 발락이 지금 선지자 발람에 대하여 크게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스스로 자제를 하려고 손뼉을 치고 있습니다. 그대로 그에게 진노를 폭발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왕인 발락은 자신의  친위대를 불러서 발람의 목을 치라고 그 자리에서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브올 산 꼭대기에서 왕인 자신의 행동을 말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이성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3)     모압 왕이 자신의 성격대로 하자면 괘씸한 선지자 발람의 목을 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후환이 두려운 일입니다. 영통(靈通, 영계와 통함)한 술사 발람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되면 그 신통력(神通力, 신과 통하는 능력)이 살아서 모압 왕 자신을 괴롭힐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발락 왕은 화가 무지하게 나지만 박수를 치면서 그 화를 가라앉히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24:10b); 모압 왕 발락은 자신이 어째서 선지자 발람에게 화를 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아주 조리(條理, 조목조목 이치에 맞는 것)가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두 차례나 사절단을 멀리 아람까지 보내어 그대를 모압으로 초청하여 온 목적은 자신의 원수인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도록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한 것이다. ②둘째, 그런데 그대는 3차례나 시도하였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는 여호와의 신탁만을 받아서 나에게 전달하고 있으니 그것은 나의 뜻을 배신하는 것이며 전혀 성의가 없는 행동이 아닌가? 하는 질책입니다.

둘째로,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아나라.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존귀하게 하기로 뜻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대를 막아 존귀하지 못하게 하셨도다”(24:11); 역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아나라”(24:11a);

1)    그렇게 괘씸한 선지자 발람이지만 모압 왕인 발락은 대자대비(大慈大悲, 자비가 크고도 풍성함)한 마음으로 그를 살려서 고향으로 보내어 주겠다고 하는 언급입니다. 그의 불편한 심기가 도망하라는 말속에 충분히 깃들어 있습니다. 화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발락 왕이 어째서 그렇게 발람에 대하여 선처(善處, 좋게 처리함)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두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①하나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영통한 무당을 참하는 것이 두고두고 후환이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2)    ②또 하나는 모압 왕이 비밀리에 아람의 선지자 발람을 초청하여 모세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시도하다가 그 일이 성사가 되지 아니하자 발람의 목을 쳐버리고 말았다고 하는 구설수가 주변국에 회자(膾炙,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되는 것을 싫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용히 살려서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리하면 선지자 발람도 자신의 실패가 소문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할 것이므로 함구할 것입니다. 그렇게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발락 왕은 현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화가 나더라도 그렇게 냉철하게 이해관계를 따질 줄 아는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2)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존귀하게 하기로 뜻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대를 막아 존귀하지 못하게 하셨도다”(24:11b); 그러한 내심을 숨길 줄도 아는 자가 바로 발락 왕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아주 좋은 말로 그를 살려서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주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모압 왕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주면 크게 재물을 주고 높은 자리에 중용하고자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발람도 그 뜻을 받아 들여서 멀리 모압 땅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이 아니냐? 하는 말씀입니다. ②둘째, 발락 왕도 원하고 선지자 발람 자신도 원하였지만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엄청난 능력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으니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찌할 수 있는 도리가 없으니 고향으로 조용히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로,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이 내게 보낸 사신들에게 내가 말하여 이르지 아니하였나이까? 가령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간(善惡間, 선과 악 사이)에 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24:12-13);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이 내게 보낸 사신들에게 내가 말하여 이르지 아니하였나이까?”(24:12); 선지자 발람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가지 변명을 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대하여 벌써 사절단을 통하여 모압 왕에게 말씀을 드린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22:20),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발람이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니라”(22:35). 그러한 사실을 선지자 발람이 진작에 모압 왕에게 직접 말씀드린 적도 있습니다;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말할 능력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22:3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점을 전혀 감안하지 아니하고서 발락 왕이 화를 내면서 발람 자신을 배신자이며 무능력자라고 질책하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2)  가령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간(善惡間, 선과 악 사이)에 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24:13a);

1)    모압 왕의 마음에 맞는 신탁의 말씀만 발람이 얻어서 준다고 하면 일확천금(一攫千金, 한꺼번에 엄청난 재물을 얻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평생을 살면서 그러한 좋은 기회는 별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회를 잡고자 선지자 발람이 내심 모압 땅으로 발걸음을 하고 싶어한 것입니다(22:19). 그 마음을 아시고 여호와께서는 처음의 방침을 완화하여 선지자 발람이 사절단을 따라서 모압으로 가도 좋다고 허락을 해주십니다(22:20a).

2)    그러나 강력한 조건을 하나 달고 계십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신탁의 말씀을 변개하지 말고 정확하게 그대로 모압 왕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22:20b 의역). 발람의 모압 행보는 여호와의 입장에서는 조건부 허용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발람은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동행불허 방침을 허용으로 바꾸시는 것을 보니 여호와께서 그 마음을 바꾸어 이스라엘을 저주하실 여지도 있다고 자기 좋은 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진 발람은 두 종자를 거느리고 당나귀 위에 앉아서 의기양양하게 사절단과 함께 모압으로 길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3)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모압 땅에 도착하여 선지자 발람이 만약 모압 왕이 제시하고 있는 금은보화를 얻기 위하여 그에게 거짓 신탁을 말씀드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선지자 발람의 목숨을 거두어 버리겠다고 하시는 여호와의 뜻이 천사를 통하여 드러나고 있습니다(22:32-33). 따라서 선지자 발람은 여호와의 신탁의 말씀을 제마음대로 왜곡할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모압 땅에서 3차례나 장소를 변경하면서 선지자 발람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로 간구하면서 모압 왕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한편 그 막대한 재화를 상급으로 얻고 싶어한 것입니다.

4)    그러나 여호와의 신탁의 말씀은 시종(始終, 처음과 끝)이 너무나 동일합니다. 조금도 변개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숨이 아까운 발람은 울며 겨자 먹기로 여호와의 신탁의 말씀을 그대로 모압 왕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떠나는 길에 선지자 발람은 자신이 무진장 정직하며 세상의 금은보화에 초탈한 위대한 선지자라고 한번 과시를 하고 있습니다(24:13a). 참으로 혼자 보기 아까운 자기 합리화의 장면이라고 하겠습니다.

(3)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24:13b);

1)    어차피 금은보화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좋은 이미지를 남기고 떠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발람은 자신이 여호와의 참된 일꾼이라는 인상을 모압 왕과 모압의 귀족들에게 끝까지 남기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24:13b). 애초에 모압 왕에게 진술한 그대로 여호와의 신탁말씀의 전달자답게 정직하게 사역을 하고 이제는 고향으로 떳떳하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2)    그렇게 큰 소리를 치고서 640km나 북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고향 브돌로 돌아간 발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큰 소리친 그대로 여호와의 정직한 선지자로 일생을 마치지 못하고 맙니다. 그 이유는 훗날 스스로 남하하여 미디안 장로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통하여 모압 왕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시켜 여호와의 진노로 망할 수 있게 하는 묘책을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31:16). 그 방법이 바로 모압과 미디안의 여자들을 이스라엘 장정들에게 보내어 바알 신을 섬기는 혼음의 현장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25:1-3).

3)    소위 발람의 꾀로 불리고 있는 엄청난 유혹입니다(1:11, 2:14). 그 공로로 발람은 모압 왕으로부터 많은 포상금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모세가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어 미디안을 치면서 선지자 발람을 색출하여 처형을 하고 맙니다(31:8). 그리고 발람의 이름은 위대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아니라 백성들을 미혹하여 우상숭배자로 만들어 영적으로 타락하게 하는 술사 또는 무당의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넷째로,이제 나는 내 백성에게로 돌아가거니와, 들으소서. 내가 이 백성후일당신의 백성에게 어떻게 할지를 당신에게 말하리이다 하고”(24:14);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이제 나는 내 백성에게로 돌아가거니와, 들으소서”(24:14a); 선지자 발람은 모압 왕과 헤어지면서 한가지 호의적인 진언을 하고자 합니다. 발람 자신을 동족들이 살고 있는 아람 땅으로 보내어준다고 하는 모압 왕의 호의에 대한 답례를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은 발락 왕이 미리 귀를 기울여 들어 놓으면 장래 모압 왕국을 경영하는데 크게 보탬이 되는 유익한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2)  내가 이 백성후일당신의 백성에게 어떻게 할지를 당신에게 말하리이다 하고”(24:14b);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과 모압 백성 사이에 장차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하여 예언의 말씀을 모압 왕에게 전해주고 싶어합니다. 발락 왕이 호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하게 되면 장래 두 민족 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까요? 모압 왕이 소원을 성취하게 될까요? 아니면 그 반대 국면이 전개가 되고 마는 것일까요? 선지자 발람의 신령한 예언에 모압 왕과 귀족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세차례나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정성껏 제사를 드렸지만 모압 왕이 원하고 있는 신탁의 말씀이 나타나고 있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발락 왕은 선지자 발람의 무능력을 질타하면서 화를 내고 있습니다. 스스로 분노를 제어하면서 빨리 아람 왕국 고향으로 떠나버리라고 말합니다.

발람은 모암 왕과 헤어지는 마당에 두가지를 하고자 합니다; ①하나는 여호와의 선지자다운 면모를 과시하고자 합니다. 이왕 재물을 얻지 못하게 되었으니 자신의 이미지나마 좋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모압 왕과 귀족들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예언으로 전해주려고 합니다.

그렇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면서 선지자 발람이 고향으로 떠나려고 하지만 훗날 그의 말로는 비참합니다. 왜냐하면, 다시 탐욕이 발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시키고 여호와의 진노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는 묘책을 미디안 족속과 모압 왕에게 알려주고 그 대가로 많은 재물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모세의 이스라엘 군대에 사로잡혀서 처형이 되고 맙니다(31:8). 그와 같은 여호와의 역사섭리를 바라보면서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발람과 달리 성도들은 끝까지 여호와의 신실한 종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감으로써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그러한 은혜가 여러 성도님들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