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50강(민11:1-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9. 23. 05:06

민수기 강해 제50(11: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1130()

 

시나이 반도에서 맛본 메추라기가 한시적이었기에 바란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와 여호와께 무엇을 원망하고 있으며 또한 다베라의 교훈을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강력한 다른 거류민들의 충동은 무엇인가?(11:1-6, 12:38, 16:1-8, 13)

 

모세가 적고 있는 민수기의 기록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 광야에서 12지파별로 군대를 조직하여 60만명이 넘는 군사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의 기술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1:1-4).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로 시내 산 앞에서 출범한 이스라엘은 이제 60만 대군까지 가지게 되었으므로 구름기둥을 따라 성막과 함께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북진을 하고 있습니다(10:11-12).

그런데 그들에게 있어서 익숙한 시내 광야를 벗어나 생소한 바란 광야에 들어서게 되자 크게 두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됩니다;

(1)  하나는 그곳 지리에 밝은 길잡이 겐 족속 호밥마저 떠나게 됨에 따라 최고지도자 모세가 크게 당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0:29-36). 그 점에 대해서는 지난 번 강해에서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2)  또 하나는 전혀 낯선 환경에 들어서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크게 불안을 느껴 다시 그 옛날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던 시절이 더 좋았다고 하는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1:1). 그것은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불신앙의 모습입니다(11:2). 그래서 불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디 살려 달라고 모세에게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그 결과 겨우 불심판이 멈추고 있습니다(11:3).

그것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원망과 불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급한 불은 꺼졌지만 그들의 심령속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여전히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 불만이 드디어 함께 동행하고 있는 이민족들의 충동으로 다시 터져나오고 있습니다(12:38, 11:4). 그 옛날 애굽에 있던 때에 맛본 각종 채소류와 고기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그립기가 한이 없다는 넋두리들입니다(11:5-6). 여기에서 두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출애굽한 그해에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주시는 메추라기 고기를 저녁에 진중에서 맛본 경험이 있습니다(16:1-8, 12-13). 그런데 만나는 매일 새벽 진 바깥에서 수거할 수가 있었지만 메추라기는 한시적으로 공급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16:35, 11:6).

(2)  둘째,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불평과 불만이 끊이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심판으로 다스려도 그 끝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불신앙의 세상사람들이 앞장을 서서 유혹을 하고 충동을 하게 되면 다시 선민의 사회에서 하나님과 지도자에 대한 원망의 불길이 타오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불심판이 아니라 무엇으로 그 육신의 탐욕과 원망을 다스릴 수가 있을까요? 히브리정경에서 그 비결이 두가지로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

1)    하나는 대속자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19:23-27, 110:1-7, 11:1-12, 53:4-6).

2)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영의 임재로 영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11:29, 48:12-16, 2:28-32, 8:1-18).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에 사르게 하시매”(11:1);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11:1a);

1)    여호와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영이십니다(1:1-2, 4:24).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과 피조세계를 시공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감찰하실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통찰하면서 피조물을 마주 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미시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모든 거시의 세계까지 그 움직임을 전부 포착하고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창조주 여호와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감안한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약속의 땅을 향하여 북진 중에 있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행진을 눈 여겨 보시고 그 소리를 전부 듣고 계시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2)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를 벗어나서 생소한 바란 광야로 들어서게 되자(10:11-12) 그 행태가 좀 이상하게 변하고 있습니다(11:1a). 갑자기 이렇게 낯선 풍경 속으로 자신들을 밀어 넣으시면서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사전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주시지 아니하시는지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일년 동안 출애굽의 해방과 홍해에서의 구원과 미디안과 시내 광야생활에서의 생존을 있게 해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모조리 잊어버린 듯이 갑자기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3)    물론 생전 처음 경험하는 바란 광야에서의 생활이 시작이 되고 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들도 지도자 모세처럼 심히 불안할 것입니다(10:29-36). 그렇다고 하여 전적으로 선민 이스라엘을 돕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마치 여호와가 그들의 종인 것처럼 그렇게 대접을 하면서 함부로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어디까지나 여호와는 그들의 주인이시고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4)    그러므로 이것도 저것도 모두 해결을 해달라고 한꺼번에 떼를 쓰면서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다고 하는 것은 불신앙이며 여호와의 치리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한 말과 원망의 정도가 여호와께서 용인하시는 수준을 넘어서고 맙니다. 그러한 지나친 하나님 원망은 심판을 초래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제15장에서 가나안 원주민들이 그 때문에 쫓겨나게 된다고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15:16). 훗날 동일한 심판의 기준이 다윗왕조의 유다 왕국에도 적용이 됩니다(왕하21:10-15). 그렇다면, 바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2)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에 사르게 하시매”(11:1b);

1)    인류 최초의 전면심판은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입니다. 홍수 후에 살아 남은 노아의 가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그와 같은 전면적인 물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무지개를 두고서 언약을 하십니다(8:20-22, 9:8-17). 그때부터 사람들의 악함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은 불심판으로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    소돔과 고모라 등지에 대한 불심판이 그러한 것입니다(19:23-25, 29:23). 이제 그러한 불심판이 바란 광야에서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중에서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그들 백성들의 텐트에 떨어져서 진영 끝에서부터 타오르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11:1b). 실로 화급하기 이를 데가 없는 순간입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찌하면 되는 것일까요?

둘째로,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11:2-3); 역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11:2);

1)    그와 같이 화급한 순간에 어째서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직접 살려 달라고 부르짖지를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 백성은 하나같이 지도자 모세에게 살려 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11:2a). 그것은 번지수가 잘못된 경우입니다. 그렇지만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간접신앙에 익숙한 자들입니다.

2)    일년 전 시내 산에 여호와께서 강림하셔서 백성들에게 인간의 음성으로 자신의 뜻을 말씀하실 대에 그들은 겁을 집어 먹었습니다. 그 음성을 계속 듣고 있다가는 혹시 실수를 하게 되면 전적으로 자신들이 책임을 지고 여호와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만 같습니다(20:18-19). 따라서 자신들이 문책을 당하지 아니하고 대신 책임을 질 수 있게 하는 묘책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여호와 앞에 서며 그 책임까지 질 수 있는 중간자로 모세를 내세운 것입니다(5:23-27).

3)    그것은 참으로 비겁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목숨에 연연하고 있는 구차한 신앙의 행태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그것마저 수용을 하십니다(5:28-29). 그리고 모세를 중보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배경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결같이 모세에게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11:2a).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들 대신에 빌고 또 빌어서 불심판을 거두시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4)    모세는 한 해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제사를 드린 결과 전멸을 당하게 되는 위기 가운데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하여 백성들을 살린 경험이 있습니다(32:10-14). 그때처럼 모세가 다시 자신의 생명을 걸고서 기도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11:2b, 33:30-35). 그 결과 여호와께서는 그때처럼 불심판을 멈추고 계시는 것입니다(11:2c).

(2)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11:3); 바란 광야 초입에 있는 그곳의 지명을 모세가 다베라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불사름이라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다베라라고 하는 지명으로 그곳을 부르게 함으로써 자손대대로 그날의 교훈을 기억하게 만들고자 원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11:4);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 탐욕을 품으매”(11:4a);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광야로 올 때에 그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여러 족속들이 있습니다(12:38). 그들 이방 족속들은 애굽에서 여호와의 재앙을 경험하고 그 진노를 피하고자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길을 떠난 것입니다(9:20). 그런데 그들이 바란 광야에 들어서면서 탐욕을 품게 됩니다(11:4a).

2)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간접신앙의 모습에서 묘한 방법을 하나 배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은 자신들이 저질러 놓고서 여호와의 처벌은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해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 출신인 자신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충동하여 자신들이 요구조건을 대신 모세에게 전하게 하면 그것은 모세를 통하여 효과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전해지게 될 것입니다.

3)    혹시 잘못된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은 모세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게 될 것이므로 이방인 출신인 자신들에게는 별로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방법의 시작은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마귀의 화신인 간교한 뱀이 먼저 사용한 것입니다(3:1-7). 의심의 씨앗을 불만과 함께 아담부부에게 속삭이면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도록 그들의 욕심을 충동질한 것입니다(3:6). 그 결과 하나님의 청지기 아담 부부를 타락시키고 그 원죄를 모든 인류가 대물림하게 되는 놀라운 성과를 얻은 것입니다. 다시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그 시나리오가 작동을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11:4b); 이방인 출신 거주민들에게 유혹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로 얼마 전에 여호와의 불심판의 위험을 경험하면서도 다시 불신앙에 빠져들게 됩니다. 여호와를 원망하면서 작년에 엘림과 시내 산 사이 신 광야에서 맛본 그 메추라기 고기를 다시 얻어 먹고자 하는 것입니다(16:1-8, 13). 이제는 여호와의 진노와 불심판이 무섭기 때문에 직접 여호와에게 악한 말로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에 교활하게도 지도자 모세의 회막 가까이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면서 신세 한탄을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11:4b)는 것입니다.

넷째로,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오이참외부추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11:5-6); 역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오이참외부추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11:5);

1)    그 옛날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살고 있던 지역은 나일 강 하류의 동북면 고센 땅입니다. 고센 지방은 지리적으로 서편이 나일 강 하류이고 북쪽에는 지중해를 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유명한 목축 지역이므로 풀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마치 노예처럼 100년 넘게 신도시 개발과 병참 기지 건설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하더라도(1:11) 때로는 바다와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먹고 들판에 각종 채소류를 재배하여 먹고 산 것은 사실입니다(11:5).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만 일년 이상 영위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맛보던 그러한 채소류와 고기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그때가 그리울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11:6); 먹을 것이라고는 여호와께서 매일 새벽에 공급해주시는 만나 밖에 없습니다(16:14-15). 메추라기 공급은 일년 전에 잠시 있었지만 그후로는 다시 없습니다(16:13, 11:6). 따라서 각종 맛있는 채소류와 생선 그리고 육고기의 맛이 그립지 아니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만큼 그립다고 하는 것은 기력의 보충을 위하여 그러한 식재료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바람만 심하게 불고 있는 메마른 광야에서 어떻게 그러한 먹거리를 240만명의 백성들이 먹을 수 있도록 조달할 수가 있을까요? 결국은 하늘의 곳간을 다시 열어 달라고 하는 간접적인 요구입니다(11:4-6, 6:5-11). 그것도 야단을 맞지 아니하려고 엉엉 울면서 신세 한탄을 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모세는 어떻게 여호와께 그러한 백성들의 요구를 전달할 수가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북진하는 과정 중에 발생하게 되는 사건들은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 내용들이 성도들이 주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으로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기 위하여 이 땅에서 남은 인생 가운데 어떠한 천로역정(天路歷程)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민수기의 사건을 다시 음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도 성도들이 불필요한 불평과 원망을 줄이고 아버지 하나님께 직접 무엇을 기도해야만 하는지를 알게 하는 귀중한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광야와 같은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민수기의 내용을 묵상하면서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