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51강(민11:7-1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9. 23. 05:09

민수기 강해 제51(11:7-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121()

 

만나에 대한 설명 그리고 백성들의 울음에 대하여 마음이 상한 모세의 항변 및 그의 중보기도의 내용 등에 대하여(11:7-15);

 

본문에서 모세는 만나에 대하여 가장 먼저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1년 이상 광야생활을 하는 가운데 매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하시는 양식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아니하지만 그 전날에 이틀치를 거둘 수가 있기 때문에 매일 양식을 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16:22-25)

모세는 만나의 모양과 맛에 대하여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는 언제 공급이 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11:7-9). 그런데 모세가 본문에서 특기하고 있는 것은 그 조리의 방법입니다. 출애굽기 제16장에서는 만나를 삶거나 구어서 먹었다고만 간단하게 기록을 하고 있는데(16:23) 본문에서는 가루로 만들어 과자를 만들어서 먹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11:8).

그렇게 잘 요리를 하면 기름 섞은 과자 맛을 낼 수가 있다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 말의 뜻은 백성들이 만나만 가지고서는 그 맛이 특별하지가 못하여 그것으로 기름 섞은 과자 맛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름기가 있는 생선이나 육류를 먹기를 원하고 있는 백성들의 욕구가 은연중에 반영이 되어 있는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11:4-6).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대놓고 여호와를 원망하거나 악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불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1:1-3). 그러나 이민족들의 말에 충동을 받아서 그 옛날처럼 메추라기 고기가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11:4-6). 따라서 이스라엘의 각 종족들이 장막문에 모여서 슬피 우는 것으로 그 원망을 대신하고 있습니다(11:10a). 그 모습을 보시고 여호와의 진노하심이 다시 커지고 있습니다(11:10b).

모세는 백성들이 울음소리를 듣고 마음이 편하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모양새가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에서 먼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이 없는데(22:28-30, 8:17-18)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그 한두 달을 참지 못하여 그러한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먼저 여호와의 진노하심이 백성들에게 곧바로 쏟아지지 아니하도록 중보의 기도부터 드려야만 합니다.

모세의 중보기도의 내용에 있어서 자신의 불편한 심기가 두가지로 담겨 있습니다; ①하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철없는 신앙자세에 대한 비판입니다(11:11). 광야에서 또 고기를 달라고 울고 있으니 자신은 고기를 만들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11:13). ②또 하나는 그러한 백성들을 모세 혼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고 명령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수행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기 때문에 부디 선처를 해달라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간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1:12, 14-15).

모세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드리고 있는 그러한 중보기도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치리를 하시고 또한 보완장치를 마련하십니다. 그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11:16-35) 뒤로 미루도록 하고 여기 본문에서는 모세의 중보기도의 내용까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11:7-15).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만나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같았더라.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11:7-9);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만나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11:7);

1)    이 땅에 만나가 처음 나타난 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입니다(16:1-3). 출애굽한지 한 달이 지나자 양식이 떨어진 것입니다(16:1).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에 비록 종살이를 했지만 굶지는 않았다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16:2). 그것은 내심 여호와에게 불만을 토로한 것입니다(16:3).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 일용할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그것으로 백성들을 시험하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16:4).

2)    구체적으로, 아침에는 만나를 주시고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매일 내려 주시는데 단지 안식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치를 주십니다. 그리고 메추라기는 한시적으로 주신 것으로 보입니다(11:6). 그런데 어째서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시는 것으로 백성들을 시험하신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약속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면서 인생을 살고자 하는지 아니면 인간적인 생각과 탐욕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는지를 보고자 하신 것입니다.

3)    그런데 1년이 지나자 바란 광야에서 그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편하게 만나만 얻어 먹고서 연명을 하는데 이골이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1년 전처럼 메추라기를 주어서 고기 맛을 보도록 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요구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진노하십니다(11:1).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한두 달이면 들어갈 수가 있는데 그 마지막 한두 달을 인내하지 못하고 여호와께 원망과 불만을 늘어놓고 있으니 불심판으로 끝장을 내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의 간절한 중보의 기도로 불심판을 멈추십니다(11:2).

4)    한동안 잠잠하던 불평과 불만이 다른 방법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함께 출애굽을 한 여러 족속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충동질한 것입니다(11:4).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지 말고 어린아이처럼 고기 맛을 볼 수 있도록 해달라고 모세에게 우는 모습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11:4, 10). 어리석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방인 출신 족속들의 말을 따르고 있습니다. 장차 그 일이 어떻게 처리가 될까요? 흥미진진한 그 일의 자초지종을 기록하기에 앞서서 모세는 만나의 모양과 그 맛에 대하여 먼저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5)    먼저 만나의 모양이 다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만나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11:7). 그것은 출애굽기 제16장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만나의 모습과 대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16:14). 두가지로 구체적으로 설명이 진보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어느 정도로 작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깟씨의 굵기라는 것입니다. 깟씨는 한국에서 고수라고 불리고 있는 코리앤더’(coriander)의 씨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굵기는 작은 쌀알 정도입니다. ②둘째, 만나의 모양은 희고 둥근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진주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깟씨의 모양이 그와 비슷합니다.

(2)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같았더라”(11:8);

1)    출애굽기 제16장에 먼저 기록이 되어 있는 만나의 조리법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16:23). 만나를 굽거나 삶아서 빵이나 밥처럼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일년 가까이 먹으니 맛이 없습니다. 따라서 조리법이 바뀌고 일종의 요리가 되고 있습니다;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같았더라”(11:8);

2)    풀이를 해보자면, 절구에 만나를 찧어서 가루로 만들고 그것을 과자처럼 구워서 맛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만나에 기름기가 있어서 그런지 잘 만들면 기름 섞은 과자 맛이 나게 됩니다. 그러한 요리를 만든 이유는 고기 맛을 대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에 앞서서 먼저 메추라기 고기의 맛을 다시 보고 싶은 것입니다. 기나긴 광야생활의 고난에 대하여 그들의 인내가 이제 바닥이 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3)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11:9);

1)    지금까지 일년이 넘는 기간동안 언제나 밤에 이슬이 광야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에 내릴 때에 하나님께서 신위적으로 주시는 만나가 함께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거두어서 양식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황량한 광야에서 일년 이상 만나를 주시고 연명하게 해주신 여호와의 능력에 감사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2)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 대신에 이제는 고기 맛을 보게 해주지 않는다고 여호와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하늘에서 만나가 이슬과 함께 내리는 것은 자연현상의 하나로 치부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그 만나를 매일 얻어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는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없으면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 이스라엘도 있을 수가 없다고 자만하고 있습니다.

3)    요컨대, 피조물인 인간들이 감히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요구대로 여호와가 종처럼 응함으로써 계속 그들로부터 하나님 대접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버림을 받을 것인지를 잘 판단하시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이스라엘 자손들이 창조주이신 여호와를 종처럼 여기고 우상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는 다른 것은 다 참아도 그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모세의 자손으로 새로운 신정국가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다시 일어납니다(32:10, 11:1-2, 10). 하지만 이번에도 모세가 자신의 영생과 목숨을 걸고서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립니다(11:15).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둘째로,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11:10-12); 역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11:10a);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출신 족속으로부터 묘책을 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여호와를 노골적으로 원망하지 말고 모세를 이용하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그 앞에서 12지파의 종족과 가문들이 모여서 우는 모습을 연출하라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주효하고 있습니다.

(2)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1:10b-11); 모세의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픕니다. 그러나 인간의 중심을 벌써 보고 판단하시는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어설픈 연기에 속지를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모세가 어떻게 중보의 기도를 시작할 것인지를 주시하십니다. 모세는 자신의 속마음을 다음과 같이 여호와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자신이 지고 가기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무 무거운 짐이라는 것입니다(11:11a). 그런데 어째서 모세 자신에게 그러한 무거운 짐을 지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말씀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11:11c). ②둘째, 이제는 그 괴로운 짐을 벗겨 주시고 쉴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11:11b).

(3)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11:12); 생각보다 모세의 하소연이 구체적이고 그 짐이 정말 무거워 보입니다. 모세가 동족들을 불쌍히 여기며 모두 가슴에 품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지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 점을 다음 세가지로 모세가 강조하고 있습니다; ①첫째, 자신이 임신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②둘째, 응석받이로 자라 유치한 믿음만을 보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양육하기에는 자신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③셋째, 그들을 모두 데리고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에는 모세 자신이 너무 지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안을 모색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셋째로,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11:13-14);

(1)  모세는 한갓 피조물에 불과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정확하게 여호와 앞에 진술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하늘 곳간을 열어서 백성들에게 고기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를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11:13a). 그러므로 고기를 달라고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는 백성들에게 그 소원을 들어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11:13b).

(2)  그렇다면 여기서 모세는 여호와께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요? 두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1)    그 하나는 장차 백성들의 소원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자를 그들의 지도자로 보내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 소원의 끝에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11:26).

2)    또 하나는 최고지도자인 모세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질 수 있도록 동역자들을 세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11:14). 여호와께서 영적인 능력을 부어서 새로운 민간인 지도자들을 세워 달라는 것입니다(11:24-25). 당시 군부의 지도자들을 모세 혼자서 감당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므로 모세의 요구는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11:15);

(1)  여호와의 마음을 강력하게 움직일 수 있는 모세의 마지막 무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가지입니다; ①하나는 자신의 영생을 거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강력한 무기이지만 이미 시내 산에서 한번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33:32-33). ②또 하나는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직 남아 있기에 모세가 여기서 그 무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모세의 마지막 말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여기서 거두어 가신다고 하면 그것은 모세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는 언급입니다(11:15a). 왜냐하면, 계속 여호와 하나님께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여호와의 진노로 불심판을 당하는 것을 보지 아니하게 되는 것이니 그것이 다행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하는 논리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눈으로 백성들이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로부터 멸망을 당하게 되는 최후의 모습을 보는 것이 모세 자신의 가장 큰 고난이라고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11:15b). 그와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할 수가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진노로 모두 멸망을 당하는 것을 하늘에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최후의 멸망 그것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가장 큰 고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시는 독생자께서 스스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십니다.

피조세계의 멸망이 아니라 그 구원을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온세상에 천국복음으로 전파하시고 십자가 대속의 고난을 스스로 받으십니다(3:13-17). 그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고 천국에서 피조물들이 모두 멸망을 당하고 마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고난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라는 주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2:5-11).

부디 그 마음을 이해하고서 아무쪼록 세상 끝까지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고난을 달게 감수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깟씨의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