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53강(민11:21-2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9. 24. 02:33

민수기 강해 제53(11:21-2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124()

 

모세는 어째서 1년 전에 광야에서 메추라기를 주신 여호와의 능력에 대하여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가? 그 하나님의 기적을 다시 기억하게 하고 여호와의 능력을 철저하게 의지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조치를 취하고 계시는가?(11:21-25)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께서 주시는 메추라기의 고기 맛을 잠시 본 장소는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펼쳐져 있는 신 광야입니다(16:1a, 12-13). 그때는 출애굽한지 한달 후 양식이 떨어졌을 때입니다(16:1b-3). 새벽에는 이슬과 함께 진 바깥 광야에 만나가 내리고 저녁에는 진중에 하늘에서부터 메추라기가 날아와서 떨어진 것입니다(16:13-15).

그런데 민수기 제11장의 기록에 따르면 여전히 만나만 광야에서 얻을 수가 있고 메추라기의 고기 맛을 본지는 까마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11:4-6).

그렇다면, 여호와께서는 어째서 만나만 계속 하늘에서 내려 주시고 메추라기 고기는 잠시 공급해주고 만 것일까요? 그 이유는 황량한 광야라고 하는 곳은 어차피 신앙훈련의 장소이지 영원히 사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훈련기간에는 먹는 것까지 간단하게 만나로 해결을 하고 신앙훈련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마치 세례 요한이 빈들에서 금욕생활을 하면서 신앙수련을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3:1-4, 1:80).

그러면 고기 맛은 언제 어디에서 볼 수가 있는 것일까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광야생활과 비교하면 엄청 풍요롭고 다양한 먹거리를 즐길 수가 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3:8).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고기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인내하면서 신앙훈련에 전념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 훈련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한지 벌써 1년하고도 1달이 지나고 있습니다(10:11).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 광야를 벗어나서 바란 광야에 들어서고 있습니다(10:12). 60만명의 대군을 앞세우고 보무도 당당하게 24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과 함께 북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훈련만 게을리하지를 않는다면 한두 달이 지나면 가나안 남부 지역을 차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소원하고 있는 고기 맛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시점에 그들이 고기 맛을 그리워하며 여호와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불심판을 맞을 뻔하지만 모세의 중보기도로 그 위기가 지나가자(11:1-3) 다시 간접적으로 울면서 칭얼거리고 있습니다(11:4-6, 10). 그러한 백성들의 행태를 보고서 모세는 절망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혼자서 그렇게 미숙한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가 없으니 여호와께서는 적극적인 조치를 강구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11:11-15).

여호와께서는 두가지로 응답을 하십니다; ①하나는 백성들이 질린 정도로 한 달 동안 실컷 고기 맛을 보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11:18-21). ②또 하나는 민간 지도자인 장로와 족장을 70인 모아오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임하게 하여 모세와 함께 백성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11:16-17). 그런데 그 두가지 조치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좀 이상한 내용이 소개가 되고 있습니다;

(1)  첫째, 모세가 어디에서 그 많은 양의 고기를 구할 수가 있을지 반신반의를 하고 있습니다(11:21).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키우고 있는 가축의 수를 생각해보고 또 바다나 강에서 낚시를 하는 경우를 상상해보고 있습니다(11:22). 모세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고기를 모아도 당장 24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셈법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상당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출애굽을 하여 한달이 되었을 때에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서 여호와께서는 하늘 곳간을 열어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신 바가 있습니다(16:1-13). 그런데 그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망에 빠진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하다가 다다르고 있는 막다른 골목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모세에게 여호와께서는 부디 정신을 차리라고 따끔하게 한 마디를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11:23).

(2)  둘째, 모세가 백성들 가운데서 민간인 지도자 70인을 모아서 회막 앞으로 데리고 오고 있습니다(11:16, 24). 장로와 족장들입니다. 그들에게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의 영을 임하게 하십니다(11:25a). 갑자기 그들이 예언을 하게 됩니다(11:25b).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떠나게 되자 다시는 예언을 하지 아니하게 됩니다(11:25c). 그렇지만 여호와의 영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 그들은 영적인 안목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적인 말씀이 믿어지고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그 놀라우신 능력을 증거하게 되는 선지자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세와 다릅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계속하여 지성소에 들어가서 여호와를 만나고 대화를 할 수가 있는 특혜를 누리고 있지만 그들 장로들은 잠시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맛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차이가 바로 영적인 차원에 있어서 최고지도자인 모세와 민간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70인의 장로들의 영성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피라미드 구조에 의하여 제사장나라가 질서 있게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60만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11:21-22);

(1)  모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달 동안 신물이 나게 고기를 실컷 먹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시는 그 말씀을 듣자 마자(11:18-20) 큰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11:21-22). 왜냐하면, 직접 그러한 여호와의 공약(公約, 공적인 약속)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해야만 하는 자는 최고지도자인 모세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에게 그렇게 자신 있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했다가 만약에 하나님께서 후속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시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백성들은 원망하기에 앞서서 만만한 그들의 최고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할 것입니다.

(2)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해보아야 무엇이 이롭겠습니까? 잘못하면 불심판을 당하게 될 뿐입니다(11:1-3).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모세에게 그 책임을 추궁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백성들의 행태를 모세는 광야생활을 통하여 익히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태산입니다; “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60만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11:21-22); 두가지 생각해볼 거리가 있는 모세의 말입니다;

1)    첫째, 이스라엘 백성의 보행자가 60만명이라고 모세가 말하고 있습니다(11:21a). 그것은 고대사회이므로 여자를 제외하고 남자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정을 보행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약자와 어린아이 그리고 노인들을 제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말하고 있는 보행자 60만명은 남자 장정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므로(12:37)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스라엘 12지파의 군인의 수 603,550명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2:32). 참고로, 전체 남자의 수는 장정의 수의 2배 정도이므로 120만명입니다. 남녀의 성비(性比)가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이스라엘 남자와 여자는 전부 240만명입니다.

2)    둘째, 모세는 그들 240만명의 인구에게 공급할 수 있는 막대한 양의 고기를 어디서 구할 수가 있는지 현실적으로 가늠을 해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몰고 나온 가축을 전부 도살한다고 하더라도 240만명의 백성들에게 한달 동안 고기를 공급할 수가 없습니다(11:21b-22a). 그리고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곳은 가데스 바네아 남쪽인 바란 광야입니다. 그곳에서는 바다가 멀어서 생선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이웃에 강이 있다고는 하지만 수량(水量, 물의 양)이 적습니다. 따라서 민물고기가 별로 없습니다(11:22b).

3)    그렇게 모세가 인간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호와께서 공()수표를 남발하신 것이라면 그때에는 모세가 대신 백성들에게 고기를 한달간 공급해야만 합니다(11:21). 그런데 아무리 현실적으로 따져보아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도 답답하여 여호와께 제가 인간적으로 걱정하지 아니하여도 될 수 있도록 부디 속 시원하게 그 방안을 말씀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11:21-22).

(3)  본문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하는 것은 모세의 불신앙입니다. 그는 작년에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서 양식이 떨어졌을 때 여호와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위적으로 메추라기를 한동안 공급해주신 그 기적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16:1-13). 만약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세는 한번 그러한 기적을 베풀어 주셨지만 다시는 그렇게 하시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세의 잘못입니다.

(4)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에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시며 또한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공의의 원칙을 적용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1)    첫째, 모세의 상상력을 뛰어넘고 계시는 것이 창조주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창조하시는 그러한 새로운 역사도 가능한 것입니다(65:17-18, 21:1-2).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의 희생 그리고 3일후의 부활의 역사도 가능한 것입니다(1:14, 24:44-49).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의 임재도 많은 성도들에게 가능한 것입니다(1:8, 2:1-4).

2)    둘째, 하나님의 공의란 모세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11:24-25). 그리고 작년에 맛본 그 메추라기를 금년에도 맛볼 수 있게 해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11:31-32). 그러므로 오로지 자신에게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영을 임하게 하시며 다른 사람에게는 제한하신다고 사유하는 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외면하고 있는 불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11:23);

(1)  처음 출애굽을 했을 때에는 모세나 이스라엘 자손들이나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에 의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일찍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미디안 광야로 인도하여 호렙 산으로 먼저 데리고 갔습니다(17:1, 6, 18:5). 그 다음에는 회군을 하여 시나이 반도 남쪽 끝에 있는 시내 산 앞으로 인도했습니다(19:1-2). 그곳에서 성막을 만들고 다시 북상을 합니다(40:17, 34-38). 이제 시내 광야를 지나서 바란 광야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때까지 출애굽한지 1년하고도 1달이 지나고 있습니다(10:11).

(2)  이제 바란 광야에서 그 북쪽에 있는 신 광야를 바라봅니다. 그곳을 통과하면 가나안 남부의 메마른 땅 네게브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땅은 아직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3:8). 가나안 서편 블레셋 족속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랄 평야 등이 기름진 땅입니다(13:27-28). 그리고 가나안의 중심인 세겜까지 올라가야 좋은 땅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33:18). 그때까지 여러 달 고생을 더 해야만 할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 체력을 보충하고 군사력을 튼튼히 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3)  한 마디로, 1년 이상 광야에서 먹고 있는 만나만 가지고서는 삶의 활력을 되찾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양식이 되지를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11:6). 그렇게 상황을 파악하고 보면, 고기 맛을 보지 아니하게 해준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조건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여호와의 전능하심을 다시 한번 보여주시겠다고 다음과 같이 공언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11:23).

셋째로,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장로 70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70장로에게도 임하신 때에”(11:24-25a);

(1)  모세가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34:29-35).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민간지도자인 장로와 족장들을 70명 모아서 회막 앞으로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십니다(11:16). 그 이유는 그들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임하게 하여 모세처럼 백성들의 지도자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11:17).

(2)  권력이란 독점적인 것입니다. 한번 왕과 같은 최고의 권력의 맛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형제들이나 자식들과도 나누지 아니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살아 있는 권력이 속성입니다. 따라서 훗날 사울 왕은 백성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청년 장군 다윗을 암살하려고 합니다(삼상18:8-12, 19:2). 그리고 솔로몬 대왕은 정적이 될 수 있는 여로보암을 일찍 제거하려고 시도를 합니다(왕상11:40).

(3)  그런데 모세는 위대한 여호와의 종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70명의 장로들에게 임하게 하시겠다는 여호와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1:24). 나아가서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전부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체험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소원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1:29).

(4)  그러한 모세의 순종이 있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안심하시고 구름 가운데 회막에 임재를 하시고 동시에 모세에게 임하고 있는 동일한 하나님의 영을 70인의 장로들에게도 임하게 역사를 하십니다(11:25a). 그러한 맥락에서, 먼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성도들도 모세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회개를 하고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재를 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해주어야 합니다(28:18-20). 그렇게 성령님께서 널리 성도들에게 내주하여 역사를 하실 때에 복음이 온세상에 전파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1:8).

넷째로,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11:25b);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섬기고 있는 신정국가의 영적인 질서를 세우고 계십니다. 따라서 최고지도자인 모세에게는 언제나 지성소에 출입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25:22, 33:7-11, 34:10).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항상 있게 하십니다(34:29-35). 그러나 민간지도자인 70인의 장로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의 임재의 맛만 보여줄 따름입니다. 그들이 혹시 교만하여 자신들도 예언을 하고 하나님의 영의 임재를 얻었다고 주장하면서 모세의 최고 통치권에 반발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호와의 주도면밀하신 조치가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11:25b).

결론적으로,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인 70인의 장로들에게 잠시 여호와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난생처음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예언을 하게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잠시 하나님의 영의 임재와 예언활동이 있었기에 그들은 선지자의 반열에 올라설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모세를 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선지자로 활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영이 임재를 하고 말씀의 뜻을 깨달아 예언을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이 영적인 그 체험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할 수가 있기에 여호와의 말씀 가운데 깃들어 있는 그 말씀의 영적인 생명력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70장로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의 임재와 예언의 능력이 지극히 한시적입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인 성도들의 복음사역에 있어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한번 임재하신 성령님께서는 항상 내주하여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성도들이 성령님의 목소리와 움직임에 영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기만 하면 그 도우심을 늘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특혜가 성도들에게 복음사역을 위해서 주어지고 있기에 주님의 은혜를 감사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온세상의 복음화를 위하여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떠나지 아니하시고 항상 내주 역사하시도록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하여 조치를 해주셨기 때문입니다(24:49, 14:16-20, 1:8, 2:1-4).

그러므로 아무쪼록 내주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오늘도 복음사역의 현장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