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49강(민10:29-3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9. 21. 20:20

민수기 강해 제49(10:29-3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1129()

 

240만명에 달하는 민족을 이끌고 북진을 하고 있는 모세가 구름기둥과 불기둥 다음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10:29-36)

 

이스라엘 자손들은 시내 산 앞에서 성막을 완성한 때부터 계속 북진을 하고 있습니다(40:34-38). 성막 위에는 구름기둥이 머물고 있으며 행진할 때가 되면 그 구름기둥이 하늘에 두둥실 떠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행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어둡고 추운 밤이 되면 그 구름속에서 불기운이 퍼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불기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3:21-22). 그 불기둥의 도움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에서 추위를 이길 수가 있으며 밤에도 행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성막을 만들기 전부터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애굽을 벗어나서 광야로 들어오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직접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길 안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교차가 심한 광야에서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는 기능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13:20-22).

그런데 민수기 제10장에 들어서게 되면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내 광야를 벗어나서 바란 광야에 들어서고 있습니다(10:11-12). 그러자 모세는 인간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익숙한 곳은 애굽과 시내 광야 그리고 미디안 광야이지 결코 바란 광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호와께서 그들의 앞장을 서고 계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행진을 인도하고 있다고 하지만 낯선 환경 가운데 두려움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과 대상을 다음과 같이 찾고 있습니다;

(1)  첫째, 모세가 점점 더 대장장이 유목민으로서 바란 광야와 신 광야 그리고 네게브 지역까지 두루 다녀본 경험이 있는 처남 호밥을 의지하고 있습니다(10:29, 31). 호밥은 여러 곳을 떠돌고 있는 겐 족속이므로(1:16, 4:11, 삼상15:6) 자꾸만 집시처럼 모세를 떠나서 멀리 가고자 합니다(10:30). 그러므로 모세는 호밥을 자신의 곁에 참모로 붙들어 두기 위하여 참으로 열심히 그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면 충분한 보상을 해줄 터이니 부디 끝까지 동행을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10:31-32).

(2)  둘째, 바란 광야에 들어서자 모세가 바란의 산인 카르콤에 올라가서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세는 그 산을 여호와의 산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0:33). 출애굽을 하여 미디안 광야와 시내 광야를 떠돌 때에는 자신이 그래도 어느 정도 그들 광야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름대로 도울 수가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평생 처음 대하는 바란 광야와 신 광야를 남겨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디 더욱 자신을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간구는 행진을 시작할 때에도 그리고 행진을 멈출 때에도 언약궤를 붙들고 계속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0:35-36).

이상과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10:29); 모세가 호밥에게 자신들을 떠나지 말고 부디 함께 끝까지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동행하자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호밥이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모세가 어째서 그와 동행하기를 그토록 원하고 있는지가 관심거리입니다. 다음과 같이 하나씩 살펴봅니다;

(1)  첫째, 호밥은 모세의 장인인 르우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에게는 처남이 됩니다. 그렇지만 출애굽기의 기록에 따르면 모세에게는 처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호밥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두가지의 학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어에서 장인’(丈人, 아내의 아버지)으로 표기를 하고 있는 용어가 모음이 없이 자음만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모음을 넣어서 두가지로 발음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호텐이라고 발음하게 되면 장인입니다. 그렇지만 하탄이라고 발음하게 되면 그만 처남이 됩니다. 그러므로 장인으로 보는 경우와 처남으로 보는 경우 그 두가지의 학설을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첫째, 장인으로 보게 되면 호밥은 모세의 장인의 또다른 이름이 됩니다(4:11). 그렇다면 이드로와 르우엘 가운데 어느 쪽이 모세의 장인의 이름일까요? 학자들 가운데에서는 르우엘이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의 아버지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기도 하는 이유는 히브리어에 있어서 아들이라고 하는 용어가 사실은 아들이거나 그 자손이라고 하는 두가지의 뜻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근한 사례로서는 야곱이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신의 아들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48:5). 그렇지만 그와 같은 해석은 상당히 무리가 따르고 있습니다. 모세의 장인에게 딸들만 있고 아들이 없다고 하는 기록에 충실하다가 보니까(2:16) 그러한 무리한 해석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    둘째, 호밥을 모세의 처남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아들이 없고 딸만 있는 경우에는 뒤늦게 아들을 얻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을 하게 됩니다. 모세의 장인도 미디안의 제사장이므로 그러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동족인 미디안 족속으로부터 첩을 얻지를 아니하고 떠돌이 족속인 겐 족속의 딸을 첩으로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이 애굽 여인 하갈을 첩으로 얻은 것과(16:1-3) 훗날 모세가 구스 여자를 첩으로 취한 것을 참조하면 충분히 그러합니다(12:1). 어쨌든 그 결과 모세의 장인은 아들 호밥을 얻게 됩니다. 딸들이 모두 시집을 가고 나자 그는 아들 호밥을 따라 겐 족속과 함께 유랑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한 모세가 미디안 족속들이 살고 있는 호렙 산에서 장인을 만난 이후에도(18:1-27) 그들은 때로 함께 만나 동행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10:29). 이제 늙은 장인 대신에 젊은 청년인 처남 호밥이 처족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  둘째, 이스라엘의 역사서에서는 호밥과 그의 아버지인 이드로를 겐 족속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16, 4:11, 삼상15:6).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겐 족속은 그 직업이 대장장이이며 유목민입니다. 그러므로 미디안 땅을 비롯하여 여러 광야를 떠돌고 있습니다. 훗날 사울 왕이 아말렉 족속을 쳐부술 때에 마침 겐 족속이 그곳에 머물고 있어 미리 대피를 시킨 경우도 있습니다(삼상15:6). 그러므로 겐 족속은 바란 광야와 신 광야 그리고 가나안의 네게브 지역에 이르기까지 모두 익숙합니다. 그러한 그들의 도움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필요합니다. 그에 따라 모세가 처남인 호밥에게 부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자신들과 동행하여 주기를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돌아가리라.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10:30-32);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돌아가리라”(10:30); 호밥이 가족을 이끌고 시내 광야 북부에 들어왔다가 그곳에서 매형인 모세와 누나 가족을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고지도자인 매형 모세로부터 극진한 처남 대접을 받게 됩니다. 젊은 그는 기분이 좋아서 함께 동행하면서 바란 광야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바란 광야가 참으로 생소한 곳입니다. 그러나 겐 족속인 호밥에게 있어서는 친숙한 광야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나다가 호밥은 다른 지역으로 떠나고자 합니다. 자신의 동족인 겐 족속의 무리에서 이탈을 한 지가 제법 시간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떠돌이 집시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분방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데 군율과 율법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행진이 떠돌이인 호밥의 마음에 크게 들지 아니한 것입니다.

(2)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10:31); 이제 바란 광야에 들어와서 처남 호밥의 도움으로 진지를 잘 구축하고 있는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앞으로 바란 광야에 이어 신 광야와 가나안 남부인 네게브 지역에도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때에는 처남 호밥의 경험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그런데 그는 갑갑하다면서 집시인 겐 족속에게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모세가 처남 호밥에게 진심을 다하여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가 떠나고 나면 24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생소한 광야에서 어떻게 진지를 형성할지 그리고 정찰을 할지 막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디 함께 동행하면서 자신들의 눈이 되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있습니다(10:31).

(3)  우리와 동행하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대로 우리도 당신에게 행하리이다”(10:32);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호밥에게도 나누어 줄 것이라고 약조를 하고 있습니다. 함께 동행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되면 그곳에서 기업을 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하면 더 이상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안정적인 정착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에 호밥이 선뜻 동의를 할까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역마살이 끼어 있는 떠돌이 겐 족속에게 정착생활을 권유하는 것이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3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3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10:33-34);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1)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3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3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10:33); 여호와의 산이 바란 광야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앞서 여호와의 산이라고 불리고 있는 미디안 광야의 호렙 산과 시내 광야의 시내 산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모세가 처가살이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40세의 모세가 그만 80세의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호렙 산 불꽃 가운데 모세를 불러서 여호와께서는 출애굽의 인도자로 그 사명을 부여하십니다(3:1-12). 오직 모세 혼자 그곳 호렙 산으로 불러서 말씀을 나누시고 사명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2)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시내 산 앞에 당도를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삼으시면서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의 성립을 그곳에서 선포하십니다(19:4-6). 그 일을 위하여 시내 산 정상에 강림을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와를 만나기 위하여 혼자서 시내 산 정상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19:20, 24:2).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그것을 신정국가의 법률인 율법으로 백성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24:15-18, 34:29-35).

3)    여호와께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북진하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십니다(25:8-9). 모세가 백성들에게 지시하여 성막을 완성하여 세우게 되자 여호와께서는 그곳에 임재를 하시고 행진 중에도 언약궤에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언약궤를 붙들고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거나(10:35) 성막이 다시 세워지게 되면 지성소 언약궤 앞으로 여호와를 찾아가서 역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25:22, 10:36).

4)    그런데 여기서는 성막도 아니고 언약궤도 아닙니다. 모세가 바란 광야의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10:33). 혼자서 여호와를 그곳에서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란 광야의 그 산이 호렙 산이나 시내 산처럼 역시 여호와의 산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한 어려운 발걸음을 고의적으로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생소한 환경 가운데 모세 혼자 지도자로서 남겨졌기 대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는 그곳의 지리와 환경을 아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을 지리적으로 돕고 있던 처남 호밥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막막하고 답답한 심정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세가 믿고 있는 것은 여호와와 구름기둥 그리고 언약궤 뿐입니다.

5)    언약궤와 성막이 가까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세는 많은 백성들이 함께 진을 치고 있는 평지에서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바란 광야의 높은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 옛날 호렙 산이나 시내 산에서 자신을 만나 주시던 그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산 위에서 밤새도록 간구하고 있는 모세입니다. 오늘날 그 산의 이름을 학자들은 바란 광야의 카르콤 산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2)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10:34); 두가지의 의미입니다; ①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북진을 할 때에 여전히 여호와께서 앞서 가시면서 구름기둥으로 그 길을 인도하여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②또 하나는 그 여호와의 구름이 뜨거운 광야 길을 행진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차양막이 되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신 여호와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으로 말미암아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계속하여 북진을 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10:35-36);

(1)  매일 기도하는 이유는 그 매일의 삶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60만명의 대군을 앞세우고 180만명의 민간인들이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북진을 하는 것이 얼마나 신이 나고 흥미진진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참으로 불안한 삶의 연속입니다. 내일은 어떠한 어려움이 밀어 닥칠지 그리고 어떠한 적들이 습격을 해올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북진을 총책임지고 있는 모세로서는 매일같이 여호와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어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2)  모세로서는 오늘 선민들을 도와 주신 것처럼 내일도 변함없이 도와 주시기를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언약궤라는(25:22) 성물을 붙잡고 행진을 시작할 때에 그리고 행진을 멈추고 진을 칠 때에 모세가 드리고 있는 간절한 기도의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10:35-36).

(3)  모세의 기도 가운데 두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는 모세와 백성들의 기도가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적들을 물리치신다는 것입니다(10:35). 그러한 간구함이 없다고 하면 여호와께서는 그 기도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어야 구원이 응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17:15-19).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하는 결단을 하지도 아니하는데 무조건 영적인 복을 퍼부어 주시는 그러한 주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19:8-9).

2)    또 하나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만 보호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온세상의 피조물 모두를 감찰하시고 죽어가는 생명들을 전부 살리시기에 참으로 바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에게만 임재하시고 자기들만 돌보시고 계시는 그러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모세는 여호와께서 이제 돌아오셔서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의 기도를 여기서 드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모세와 같은 믿음의 용사라고 하더라도 생소한 환경 가운데 동족 240만명을 계속 인솔하라고 하면 겁을 집어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출애굽과 홍해의 기적을 일으키신 바가 있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앞서 선도를 하신다고 하더라도 육신적인 두려움과 무거운 책임감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그곳 지리에 두루 밝은 처남 호밥에게 끝까지 동행하여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호밥이 떠나가고 맙니다. 이제는 홀로 남겨진 모세가 언약궤를 붙잡고 여호와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바란 광야의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도우심을 거듭 요청하며 자신의 답답하고 무거운 마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모세의 마음이 진하게 배어 있는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변함없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북진하고 있는 그 길을 선도하고 계십니다. 구름기둥이 광야의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고 있습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언약궤가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모세는 용기를 내어 다시 백성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두렵고 힘이 들더라도 아무쪼록 모세처럼 여호와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믿고서 끝까지 믿음의 길을 달려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바란 산으로 볼 수 있는 카르콤 산의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