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민수기 강해 제44강(민9:15-2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9. 19. 04:15

민수기 강해 제44(9:15-2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터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71123()

 

성막을 세운 날부터 구름이 성막을 감싸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을 인도하고 있는가?(9:15-23)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그날부터 여호와께서 앞서 가시며 백성들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 방법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모세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13:20-22).

한마디로, 여호와께서 가장 앞서 가시고 그 뒤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따르고 있으며 구름의 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이신 여호와께서는 피조물인 사람들의 눈에 보이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눈에 보이는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백성들의 길을 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구름이 멈추어 서게 되면 그 자리에 백성들이 진을 펼치고 머무르게 됩니다.

그런데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으로 성막을 만들고(25:8-9) 그것을 출애굽후 둘째 해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루에 광야에 세우고 있습니다(40:17). 성막이 시내 산 앞에 온전히 세워지자 갑자기 구름이 성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됩니다(40:34). 그때부터 성막을 덮고 있는 구름이 위로 떠오르게 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인도함을 받아 행진을 하게 됩니다(40:36). 그리고 그 구름이 다시 성막으로 내려와 움직이지 아니하고 있으면 백성들이 행진을 멈추고 그 자리에 진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40:37). 그리고 그 구름 가운데서 밤에는 불기운이 나타나서 백성들이 머물고 있는 광야를 춥지 않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40:38).

벌써 모세는 출애굽기에서 그렇게 상세하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역할에 대하여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서 다시 그 사실을 자세하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이틀이든지 한달이든지 일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9:15-23). 언뜻 보면, 출애굽기 제40장의 내용을 대동소이(大同小異, 크게 다르지 않고 비슷비슷한 것)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을 묵상해보면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약속의 땅 가나안에 빨리 들어가서 안정된 정착생활을 하고 싶은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입니다. 황량한 광야에서의 삶이란 짧으면 짧을 수록 좋은 것입니다. 나무가 자라기 힘든 메마른 광야이므로 사람들이 생존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한낮의 폭염과 밤의 추위 그리고 세찬 바람과 온갖 독충들 더구나 물을 구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그곳은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곳입니다. 비록 여호와께서 친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더위와 추위를 완화시켜주고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라고 하는 먹거리를 제공해 주신다고 하더라도 그 광야생활의 불안정함과 고달픔은 여전한 것입니다.

(2)  둘째,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길을 안내하는 구름이 성막 위에서 움직이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이 한 달 또는 일년이 걸리기도 합니다(99:22). 생각 같아서는 군대를 앞세워서 그대로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가나안 남부의 광야이므로 목적지가 멀지도 않습니다. 일주일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그 땅으로 들어설 수가 있는 거리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여호와께서 구름이 그들의 길을 인도할 때까지 무조건 기다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것이 여호와의 종의 삶의 모습이라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성막을 분해하여 운반을 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텐트를 모두 걷어서 다시 길을 떠난다고 하는 것이 여간 시간이 걸리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시 성막을 조립하여 세우고 백성들이 자신들의 텐트를 치며 이스라엘 군인들이 자신들의 진영을 새로이 구축하는 것이 역시 쉽지 아니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구름이 성막 위에 며칠 머무르지 아니하고 두둥실 떠올라 백성들의 길을 인도하고 있습니다(9:20). 백성들이 부랴부랴 천막을 걷고서 행진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아니하여 구름이 다시 성막 가까이 내려와서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속으로 불만과 원성이 자자하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결국, 여호와를 시험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17:7) 이제는 성숙한 믿음을 선보이고 있다고 모세가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는 대목이 바로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9:15-23).

그와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9:15-16);

(1)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성막의 지성소에 임재를 하십니다(25:8-9, 22). 그러므로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는 그 구름이 성막을 가리고 있습니다(9:15). 그 옛날 시내 산 정상에 여호와께서 강림을 하실 때에도 그러합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백성이 다 떨더라”(19:16),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가마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19:18). 또한 모세의 회막에 여호와께서 임재하실 때에도 그러합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33:9-10). 짙은 구름으로 여호와의 임재의 현장을 가리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면 사람들이 죽게 됨으로 그것을 예방하고자 하는 조치라고 하겠습니다(33:20).

(2)  여호와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길을 앞서 인도하십니다(13:21-22). 영이신 여호와의 모습을 피조물인 사람들이 볼 수가 없습니다(4:24). 그 대신에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는 그 구름과 불기운을 백성들이 보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19:18, 40:35, 9:15).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낮에는 앞서가는 구름기둥을 보면서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그 구름 가운데 빛과 열기를 발하고 있는 불기둥의 도움을 받아 행진을 하거나 밤의 추위를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9:17-18);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길을 여호와께서 인도하십니다. 그 방법이 여호와의 진면목을 감추고 있는 그 구름과 불을 사용하여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그 성막과 그것을 위에서 감싸고 있는 구름과 불기운을 항상 주시하고 있습니다.

(2)  구름이 성막의 위에서 하늘로 떠오르게 되면 그것은 행진준비를 하라는 신호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진행하던 구름이 아래로 내려와 성막 위에 멈추게 되면 그것은 그곳에서 쉬게 된다는 표시입니다. 구름이 멈추는 그 자리에서 백성들이 행진을 멈추고 성막을 조립하여 세우며 자신들의 진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3)  그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광야생활 가운데 계속된 일과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모세가 여기서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9:17-18). 특히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사용한 여호와의 신호를 철저하게 믿고서 그 두려운 광야에서 오랜 세월 민족의 대 이동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보여주고 있는 올바른 신앙생활의 정석입니다.

셋째로,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9:19-20);

(1)  사람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많이 다릅니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오래 한 자리에 머물렀으므로 이제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을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합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구름기둥을 성막 위에 배치한 채 전혀 움직이지를 않고 계십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온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2)  반대의 경우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래간만에 구름기둥이 성막 위로 내려 앉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먼 길 행진을 멈추고 성막을 다시 세우며 진지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를 겨우 쉬었을 뿐인데 야속하게도 다음날 아침 성막 위에서 구름이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오르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성막을 분해하고 장막을 거두어서 행진의 준비를 해야만 합니다. 참으로 고단하고 피곤한 일정입니다. 마음속에서 원망과 불평이 생기지 아니할 도리가 없습니다.

(3)  그러한 경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을까요? 모세는 본문에서 그렇게 불합리하게 보이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전지전능하신 여호와의 판단과 생각을 믿고서 순종을 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앞세워서 섣부르게 행동을 하게 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훗날 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사울의 사례가 그 사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적국인 블레셋의 군대가 이스라엘 진영 가까이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삼상13:5-6). 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출전을 해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사무엘이 아직 도착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삼상13:8). 사무엘이 와야 빨리 전쟁의 승리를 위한 제사를 여호와께 지내고 출전을 할 수가 있습니다.

2)    그런데 그를 기다리다가 시간이 많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지체를 하다가는 유리한 고지를 적군들이 모두 선점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한 급박한 사정을 눈치 챈 부하들이 아우성입니다. 사울 왕이 용단을 내립니다. 사무엘 대신 자신이 번제를 드리고 출전을 준비한 것입니다(삼상13:9-10). 바로 그때에 뒤늦게 대제사장 사무엘이 당도합니다.

3)    사무엘은 사울 왕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꾸중합니다(삼상13:11-13). 전쟁의 승리가 여호와에게 달려 있는데 여호와의 신호를 읽지 못하고 그것을 기다리지도 못하고 있으니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의 왕으로서는 자격미달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만약 여호와의 명령을 지켰더라면),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삼상13:13-15).

넷째로,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이틀이든지 한달이든지 일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9:21-22);

(1)  모세는 백성들이 참으로 인내하기 힘든 경우가 있었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를 믿고 그 신호를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성숙한 여호와신앙이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하였음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참으로 힘든 두가지 경우가 다음과 같이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2)  첫째, 구름이 저녁에 멈추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세우고 진을 구축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다시 구름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겨우 하루를 쉬고서 또 고된 행진에 나서야만 합니다. 불평과 불만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3)  둘째, 약속의 땅 가나안이 별로 멀지 아니한 광야입니다. 그런데 구름이 성막 위에서 미동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이 이틀이 지나 한달이 경과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생각 같아서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아니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가나안으로 진격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말리고 계십니다. 구름이 일년동안 움직이지를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인내하기 힘든 그 세월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사히 극복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이 글을 기록하고 있는 모세는 마음이 뿌듯하기 그지 없습니다.

다섯째로,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9:23);

(1)  성도가 인생길을 가는 동안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그곳에 머무르고 그 명령을 따라 행진을 한다면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전도와 선교의 일정입니다(9:23a). 그렇지만 여호와께서 지시하시는 그 길이 성도의 개인적인 사정이나 판단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쉽게 100% 순종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리고 혼자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역을 하는 경우 또는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경우에는 그 맡겨진 직임에 만족을 하고 분수를 지켜서 제 몫을 온전히 감당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9:23b).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두가지를 잘 준수했다고 본문에서 결론삼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참고로, 이방인 사도로 존경을 받고 있는 사도 바울의 세계선교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2차 소아시아 선교를 하면서 그는 터어키에서만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감히 서쪽으로 건너가서 유럽선교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소아시아 동쪽으로 가려고 하는 바울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16:6). 그래도 바울은 고집스럽게 자신의 생각으로 동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사도 바울의 발길을 유럽으로 향하도록 간섭하십니다(16:7).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보게 되자 비로소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채고 있습니다(16:9-10). 따라서 위험한 초행길이지만 유럽의 선교에 첫발을 내디디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실하게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앙생활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성도 자신의 생각과 뜻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 및 주님의 뜻과 판단을 따라서 인생길을 끝까지 순종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지니고 유한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뜻은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상식에도 맞지가 않으며 불합리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음 두가지 사실을 성도들이 반드시 명심해야만 합니다;

(1)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갇혀 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한꺼번에 통찰하시면서 결정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을 인간세상에서 이미 성취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로 올바르게 살아가게 되면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전부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위의 두가지 사실을 믿고서 남은 인생을 복음의 일꾼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고 여호와의 종으로 끝까지 순종하여 살아감으로써 많은 생명살림의 열매를 얻으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