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98강(마27:50-6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9. 14:29

마태복음 강해 제198(27:50-6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 5 26()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 초래하고 있는 충격들(27:50-60)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 왜 사람들과 자연계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자(27:50) 드디어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1:14-18) 진면목 그대로 잠시 이 땅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27:50-61). 지금까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니다 또는 그리스도이다 아니다로 양론이 있었지만 십자가 죽음의 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기이한 현상은 그와 같은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증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27:54-61). 특히 그 충격은 그곳에서 그 당시에만 주어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 인류의 역사를 주도하고 있는 새로운 흐름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도 마태의 서술의 순서를 참고하여 다음과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성소 휘장이 둘로 갈라지고 있습니다(27:51a). (2)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져나가고 있습니다(27:51b).  (3) 무덤 속에서 죽음의 잠을 자고 있던 성도들이 부활을 하고 있습니다(27:52-53). (4) 백부장과 그 부하들이 심히 두려워하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27:54). (5)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이 증거자가 되고 있습니다(27:55-56). (6) 바리새파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27:57-61). 그 의미에 대하여 하나씩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소 휘장이 둘로 갈라지고 있습니다(27:51a). 유대인들이 선민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기 때문입니다(25:21-22, 33:9, 40:34-35, 왕상8:11). 그 지성소에는 아무나 출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하루 대속죄일인 10 10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16:15-17, 29). 그렇게 지엄한 지성소가 일시에 그 휘장문이 둘로 쪼개어짐으로써 일반에게 공개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유대교가 더 이상 만민구원의 역사에 방해가 되어서는 아니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지도자들이 옳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장이 옳았다고 하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장면입니다(1:16-17, 10:2-4).

둘째로,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져나가고 있습니다(27:51b). 창조주가 본체의 영광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타날 때에 그 위엄을 이길 수 있는 피조물이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모체가 되고 있는 땅이 견디지를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1:2, 11-12, 24, 2:7, 19:18). 그리고 그 단단한 바위가 창조주의 신위를 이기지를 못하고 터져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말적인 심판의 두려움을 천하만물이 미리 잠시동안 맛보고 있는 광경이라고 하겠습니다(19:16, 벧후3:12).

셋째로, 죽음의 잠을 자고 있던 성도들이 부활을 하고 있습니다(27:52-53). 하나님의 영광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11:40).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믿는 자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6:39-40). 예수님은 자신에게 죽음의 잠을 자고 있는 성도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그리고 실제로 베다니의 나사로를 무덤 속에서 되살려내고 있습니다(43-44). 그 능력이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사를 완벽하게 드리고 나자 다시 성도들의 부활로 일부 터져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백부장과 그 부하들이 심히 두려워하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27:54). 기본적으로 유대교인들의 선민구원사상과 예수님의 만민구원사상은 서로 양립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일행의 복음사역의 장소는 항상 두 사상의 갈등과 대립의 현장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복음사상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맞이하시자 그 열매가 가장 먼저 이방인인 로마군인들의 입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27:54).

다섯째로,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이 증거자가 되고 있습니다(27:55-56).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끝까지 감당하시자 놀라운 사건들이 그곳에서 발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널리 그리고 후세에 전해줄 증거자가 필요합니다(24:45-48). 그 역할을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이 맡고 있습니다(27:55-56). 며칠 후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및 장례 그리고 무덤 속 부활이라는 생생한 현장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도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에 이와 같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24:6-12). 그 대목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섯째로, 바리새파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27:57-60). 그것은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도 변화가 발생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공회원 가운데 두 사람의 실명이 복음서에 등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사도 마태는 아리마대 요셉이 바로 지금까지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7:57). 그리고 요셉의 동료인 니고데모도 그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일찍이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천국을 볼 수 있으며 또한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물었던 바리새파 공회원입니다(3:1-10).

그들이 왜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을까요? 때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고서 유대교지도자들의 위세가 대단한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본색을 드러낸다고 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위험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태도의 변화를 초래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그들에게 하나의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인 그들 두 사람은 십자가의 죽음이 무기력한 패배자의 죽음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그리스도 예수가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자신을 희생한 거룩한 제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눈치를 채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때까지 줄곳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서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은근히 예수님을 지지했던 자들입니다(7:50, 19:38). 그것은 한 마디로,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아니하고 있는 양심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심각한 의미를 막상 그들이 깨닫고 나자 더 이상 그렇게 미온적으로 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구원하고자 하는 창조주의 마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십자가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어떻게 그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의 안전만을 도모하고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쳐다보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만 할 때입니다.

그 첫걸음이 로마총독 빌라도를 찾아가서 용감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인수하는 것입니다(27:58). 화려하지는 않지만 지극정성으로 향품처리를 하고 장례를 치릅니다(27:59, 19:39-40).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이 사용하려고 골고다 동산에 마련해둔 부자의 굴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하고 있습니다(27:60). 그것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53:9).

결론적으로,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 참으로 주님을 회개의 눈물 가운데 만나고 창조주의 피조물 사랑의 마음을 이해하여 새로운 인생을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과감하게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그 해답이 본문에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복음사역에 나서고 십자가 대속의 인생을 받아들였듯이 제자들도 그렇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 앞에 만민구원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누구보다 먼저 동참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성도들이 그들처럼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힘차게 달려가야만 할 것입니다. 참고로, 그와 같은 인생을 살아간 사도들과 제자들의 발자취 곧 초대교회의 역사가 의사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 풍성하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