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95강(마27:45-4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8. 08:13

마태복음 강해 제195(27:45-4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 5 23()

 

예수님의 고통에 찬 마지막 모습에 대한 사도 마태의 묘사(27:45-46)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에 찬 마지막 모습에 대하여 사도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6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되더니 9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27:45-46),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27:50).

참으로 간단한 서술이지만 그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질문을 가지고 묵상을 해야 할 과제가 담겨 있습니다; (1) 사도 마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오전 9시부터 12시 정오까지의 경과를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임종의 시간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2)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뜻은 고통에 찬 신음소리로서(22:1) 하나님 아버지에게 부디 나를 버리시지 말고 살려달라고 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입니다. 그것은 임종을 앞두고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인간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과연 그러한 이유로 그같이 부르짖고 있는 것일까요? 무언가 이상합니다. 무엇인가 심각한 의미를 달리 전달하고 있는 대목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순서대로 하나씩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마가는 때가 제3(오늘 날 오전 9)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15:25)고 분명히 기록을 하고 있는데 마태는 아예 오전 9시부터 정오까지의 모든 기록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왜냐하면, 최초의 복음서가 마가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마태가 마가복음의 내용을 참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오전의 기록을 생략하면서 제6(27:45, 정오)부터 제9(27:46, 오후 3)까지의 묘사를 클로즈업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사도 마태는 임종과 종말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더 알기 쉽게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지혜의 왕으로 불리고 있는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7:1-4).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는 세상의 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창조가 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창조는 단 한번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48:7).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65:17-19, 21:1a). 그것은 옛 하늘과 옛 땅이 종말을 고하고 있는 그 시점과 일치하고 있습니다(21:1b).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희구하고 있는 성도는 자신의 육체의 종말과 세상역사의 종말을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신실하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3)  임종이 가까워질수록 진지해집니다. 그리고 그 삶의 가장 진한 농도가 그곳으로 쏠리고 있습니다. 사도 마태는 복음의 가장 짙은 진액을 성도들에게 맛보게 하고자 정오부터 오후 3시 운명 전까지의 예수님의 마지막 시간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33년간에 걸치는 예수님의 일생도 마지막 36개월 동안의 공생애가 백미입니다. 그리고 36개월의 공생애기간에 있어서도 가장 깊은 교훈과 심각한 행적은 예루살렘에서 보내신 마지막 6개월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4복음서가 모두 십자가 당일의 현장을 가장 생생한 기록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깊은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당하고 계시는 고통의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아야만 합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은 혹시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는 구절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정신적 영적인 두려움이 임종의 고통보다 더 크다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숨이 끊어지는 것은 영혼이 그 동안 거처하고 있던 이 세상의 육체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합체가 되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탄생과 정반대의 수순입니다. 그러므로 분리의 고통은 합체의 고통 곧 산모가 대신하고 있는 산고의 고통과 같은 수준이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누구나 그 엄청난 죽음의 고통을 견디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그 고통은 누가 대신 감당해줄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한 평생 살아온 당사자 본인의 몫입니다.

(2)  그런데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더 큰 두려움이 육체적인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의 테러수준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 곧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는 그 엄숙한 시간대에 만약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지 아니하신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죽음의 고통보다 더 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완전소멸의 공포가 찾아옵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영생의 하나님 손에 온전히 맡길 수가 있을 때에 안심하고 이 세상을 하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께서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아니하시고 그냥 지켜보고만 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손발이 묶여 있는 예수님이 심히 답답하여 견디지를 못하고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

(3)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마지막 순간에 창조주 하나님을 찾게 될 것입니다. 모든 영혼이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그 영혼은 마지막 순간에 돌아갈 생명의 고향을 찾고 있습니다(11:16). 그와 같은 진리를 모세와 선지자들과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30: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20-2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16).

  참고로, 사람의 창조는 특이합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창조주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생기로서 그 코에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1:26-27, 2:7a). 그 결과 사람은 생령(生靈, living soul)의 존재 곧 영과 육이 합체가 된 유일한 존재가 됩니다(2:7b). 그런데 그 영과 육이 분리가 되는 순간이 인생 가운데 찾아오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인생의 마지막 슬픈 운명입니다.

이제 영과 육이 분리가 되고 나면 다시는 영육합일체의 인생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성도가 장차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 세상에서 창조된 원래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22:30). 그러므로 옛 하늘과 옛 땅을 고향으로 삼고서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은 영과 육의 생이별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누구에게나 임종의 시간이 가장 큰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살펴본대로 그러한 측면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뜻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약해진 인간의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 이상의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뜻은 마지막 순간까지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며 그 동행을 요청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종의 순간에 함께 하시고 그 영혼을 받아주시게 되면 그것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의미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마지막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23:46).

결론적으로, 가장 캄캄한 어두움 가운데 새벽이 밝아오듯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그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새로운 창조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살게 되는 새로운 창조는 자신의 영혼이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받아들여질 때에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시여 나의 영혼을 받아 주시고 다시 새로운 창조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소서. 저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겨드립니다”. 그러한 의미의 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의 마지막 기도가 될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