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94강(마27:37-4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7. 15:05

마태복음 강해 제194(27:37-4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 5 22()

 

예수님이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바로 내려오시면 어째서 아니 되는 것일까요?(4:5-7, 27:37-44, 16:31)

 

첫째로, 예수님께서 감당하고 계시는 십자가의 길은 참으로 굴욕스럽고 모욕적인 것입니다;

(1)  창조주의 한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1:1-4, 14) 사람들이 일개 유대인의 왕이라고 놀리고 있습니다(27:37). 정식으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인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하고 있으니 그것이 꼴볼견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인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모독입니다. 따라서 사도 나다나엘의 경우에는 그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더 크신 칭호 하나님의 아들이스라엘의 임금앞에 내세우고 있습니다(1:49). 한 마디로, 창조주의 영광을 어떻게 일개 민족의 왕의 자리에 비교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물며 본문에서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면서 놀리고 있습니다.

(2)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이 어처구니가 없게도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로마총독에게 고발을 했습니다(19:12). 그 고발에 의하여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고 있습니다(19:14-16). 그런 일을 행한 유대교지도자들이 여기서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놀리고 있는 것입니다(27:42). 그와 같은 작태는 그들의 고발내용이 애초부터 인위적인 조작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증거입니다.

(3)   로마병정들을 동원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 강도 두 사람을 함께 못박고 있습니다(27:38). 그 의미는 나사렛 예수의 죄질이 강도와 같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혹세무민하여 그 마음을 빼앗고 로마에 반역하도록 몰아가고 있으니 강도와 다를 바가 없다는 시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일개 강도와 동일시하면서 십자가에서 처형하고 있으니 유대교지도자들과 로마총독의 처사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수위를 이미 넘어서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4)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들이 덩달아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27:39-40).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만약 격노하여 스스로 신위적인 능력으로 자신을 치유하고서 묶임을 풀고 십자가에서 단숨에 내려오는 기적을 연출한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 점에 대해서는 항목을 달리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의 행태도 일반 백성들과 똑 같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기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27:41-43).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없는 자가 마치 하나님의 아들이나 된 듯이 그리고 메시아가 되는 듯이 그 동안 백성들을 속이고 다녔으니 그 꼴이 보기가 좋다는 비웃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처형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입니다.  

(6)  더 모욕적인 것은 함께 십자가에 못이 박힌 강도들도 유대교지도자들의 희롱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7:44). 물론 의사 누가는 두 사람의 강도 가운데 한 사람은 그러하지 아니하였다고 더 자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23:39-43). 어쨌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있는 논리는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는 남은 구원하였지만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는 없는 자이다(27:42a). 둘째, 자신을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면 믿겠지만 그런 기적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이다(27:42b). 셋째,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것이다(27:43). 그러나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것이 틀림이 없다는 논리적인 주장입니다.

둘째로, 유대교지도자와 로마총독 그리고 일반백성들과 강도들 모두의 비웃음을 단숨에 그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사실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치유하고 신위적인 능력을 불어넣어서 스스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도록 조치하는 것은 심히 간단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조치를 하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의 시대를 열면서 이미 그 문제가 다음과 같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6:16)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5-7). 말씀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능력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행사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제물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심으로써 그 사실을 믿는 백성들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시는 도중에 예수님이 스스로 내려오시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두 가지로 생각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구원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 대신에 조롱하는 자 비웃는 자를 신위적인 능력으로 강력하게 징계하고 심판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보복의 악순환에 다시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피의 보복을 그치게 만드는 온전한 구원과 영생의 길이 절대로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그 능력을 함부로 사용하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자신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아버지 하나님은 그 발을 받쳐서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도록 조치를 해준다면 과연 누구의 영광이 빛나게 될까요? 그 해답은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의 종처럼 부리고 있는 예수님의 영광이 빛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스럽게 하는 방법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이용하여 자신의 위세를 드높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경우 하나님의 명령 그대로 단지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게 하면 되는데 그대로 따르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20:8). 모세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내게 함으로써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백성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과 위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20:10-11). 그 일로 말미암아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를 못합니다(32:49-51).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불경이며(20:12)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라고 하겠습니다(4:7).

(3)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바로 내려오시게 되면 과연 자신들의 말처럼 유대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고서 따르게 될까요? 아닙니다. 두려워하고 오히려 멀리하고자 할 것입니다. 구원주의 모습이 하나님의 두려운 능력의 시현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의 내용처럼(18:13-14)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2:36-37). 그리고 그리스도가 자신의 죄를 대속하고자 끝까지 인내하고 참으셨다고 하는 그 사랑을 깨닫는 데서 새로운 인생이 출발하고 있습니다(2:5-11).

(4)  그와 같은 사실을 깊이 받아들이자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오심과 대속의 죽으심을 예언하고 있는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을 복음서와 함께 묵상을 해야만 합니다(24:44-49). 그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영적인 진리로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로서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것이 육신을 입고서 인생을 살고 있는 동안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과업입니다. 그 사실을 적시하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16:31).

결론적으로, 인생을 살고 있는 동안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도중에 십자가에서 하차를 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참으셨는가 하는 그 이유를 깨닫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기 위하여 끝까지 인내를 하셨습니다. 동시에 자신이 온전히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그것이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26:39).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얼마나 내려오고 싶었겠습니까? 자신을 조롱하며 비웃고 있는 자들을 혼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참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인생 가운데 끝까지 인내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