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93강(마27:32-3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7. 15:03

마태복음 강해 제193(27:32-3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521()

 

사형판정을 받은 예수님을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그 과정 중에 발생하고 있는 여러 사건에 대한 묘사(27:32-36)

 

첫째로, 예수님의 체력이 쉽게 바닥이 나고 있습니다(27:32). 사도 마태는 그 사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태의 진술 그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채 1km도 진행을 못하시고 있습니다. 그러자 로마병정들이 구레네’(오늘날의 리비아, 2:10) 사람 시몬에게 대신 십자가를 지워서 골고다 언덕으로 행진을 하고 있습니다(27:32).

참고로, ‘골고다’(영어로는 갈보리’) 언덕의 위치는 오늘날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동방기독교에서는 부활교회라고 호칭하고 있음)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위치는 예루살렘 성 서부언덕이며 좁게는 성전이 자리를 잡고 있는 모리아 산 내에 있는 서쪽언덕입니다(22:2, 대하3:1). 모리아 산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져 있으며 그 면적은 1평방킬로미터 미만입니다. 그러므로 성전 내에서 출발을 한다면, 서쪽언덕인 골고다까지는 길어야 1km정도의 거리입니다.

하지만 로마총독부가 성전 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총독부가 성전 바깥이지만 그래도 예루살렘 성내에 위치하고 있다고 보고서 서쪽 골고다 언덕까지의 최장거리를 한번 산출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고대의 예루살렘 지도를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예루살렘성의 면적이 450에이커 곧 180ha미만이라고 합니다. 그 크기는 가로 세로가 1,400m이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산의 방법은 첫째, 1정보에 해당하는 1ha 100mX100m의 면적입니다. 둘째, 13X1316918019614X14이므로 180정보는 가로 세로 각각 1,400미터를 넘지 못합니다. 셋째, 따라서 예루살렘에 위치하고 있는 로마총독의 관아에서 서쪽 골고다 언덕까지의 거리는 길어야 1,400미터 정도입니다. 그 정도의 거리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33세의 청년 예수님의 체력이 그렇게 고갈이 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풀이가 됩니다;

(1)   지난 목요일 밤부터 금요일 아침까지 밤새도록 안나스의 집(18:13), 가야바의 저택(18:24), 산헤드린 대 공회(26:57, 59), 헤롯 안디바의 거처(23:7), 빌라도의 관아(27:2) 등 계속 장소를 바꾸어가면서 진행된 심문 때문에 탈진을 했기 때문입니다.

(2)   서너 차례의 심문과정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배신감과 절망감입니다. 구체적으로, 제자들이 하나같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납니다(26:56). 베드로는 예수님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서슴지 아니하고 배교를 하고 있습니다(26:69-75, 22:61).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철저하게 자신을 배척하고 있습니다(27:23).

(3)   더구나 예수님 홀로 대속의 십자가를 져야만 하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버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27:46). 한 마디로, 영적인 절망감이 마침내 육체적인 기력의 탈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1km도 전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27:32).

둘째로, 왜 하필이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27:32) 그 일을 통하여 시몬의 생애에 어떠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요?

(1)  왜 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이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우고 있는 것일까요? 그 확실한 이유는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몇 가지 유추를 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시몬은 멀리 리비아에서 온 순례자입니다.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는 교포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2:10). 그는 경건한 하나님신앙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시몬은 골고다언덕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계시는 예수님 가까이에서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있었기에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고 있습니다(27:32). 셋째, 시몬은 약골이 아니고 강건해 보였습니다. 로마병정이 보기에 능히 십자가의 무게를 견딜만한 체력입니다(6:13, 고전6:20). 그래서 픽업이 되고 있습니다.

(2)  시몬 다음에는 누구에게 그 기회가 제공이 될까요? 저나 여러분 모두에게 그 기회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참된 제자의 수가 그리 많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7:14, 16:24).

(3)  그 후 시몬의 행적을 추적해보면 그 일로 인하여 그의 집안이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엄청난 변화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첫째, 구레네 사람들이 구브로 사람들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개척하고 이방선교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11:20). 구브로 사람으로는 바나바(4:36, 11:22) 그리고 구레네 사람으로는 시몬이(27:32, 15:21,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 앞장을 서고 있을 확률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사도 바울이 시몬의 아내 곧 루포의 어머니를 자신의 믿음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16:13). 셋째, 마가가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들의 이름을 그의 복음서에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15:21). 따라서 초대교회 시대에 마가가 구레네를 포함하는 애굽지역 알렉산드리아 곱틱교회의 수장이 되었다고 하는 전승이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마가는 시몬의 아들인 알렉산더 및 루포와 함께 곱틱교회를 개척하면서 튼튼히 세워나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4)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서 골고다언덕으로 함께 동행을 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이 변하고 그의 집안이 초대교회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직접 십자가로 가시는 주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실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왜 하필이면 골고다해골의 곳’(일종의 공동묘지)이라는 곳으로 끌고 가는 것일까요?(27:33) 겉으로 보자면, 십자가 처형장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좀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마태의 기록을 참조하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지내시면서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6-28).

그 말씀의 뜻은 사도 요한의 복음서를 참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6:53-55). 한 마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를 받아 마신다는 것과 그 주검이 안장이 되는 그곳 골고다에 함께 있다는 그것이 새로운 삶을 얻는 방법이 되고 있습니다(37:1-10). 물론 그것은 사도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영적으로 세례의 의미가 되고 있습니다(6:4).

그렇다면 공동묘지 골고다에 묻힌 자들에게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해골에 예수님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습니다(27:33). 그 거룩한 희생의 어린양이 그들과 함께 같은 동산에 안장이 되고 있습니다(27:59-61, 19:41). 그 대속의 피와 부활의 능력이 죽은 자들을 살릴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다음 기록과 같은 은혜가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8-29).  

넷째로,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예수님은 어째서 맛만 보고 마시기를 거절하고 있을까요?(27:34) 고통이 극심한 환자에게는 강력한 진통제를 사용합니다. 신경을 마비시켜서 잠시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어주기 위함입니다. 그와 같은 목적으로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잠깐 맛을 본 다음에 마시기를 사양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맨 정신으로 고통을 이기고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해야만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17:24-26). 그리고 유언과 같은 십자가 상의 일곱 마디를 전해주기 위한 것입니다(27:46, 23:34, 43, 46, 19:26-27, 28, 30).

다섯째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 왜 병정들이 그 옷을 나누고 있는 것일까요?(27:35)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반사막성 기후 곧 낮의 폭염과 밤의 냉기가 대단한 곳이므로 옷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겉옷이 이불을 대신한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오죽이나 살기가 힘든 기후였으면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을 위해서 낮에는 구름기둥을, 밤에는 불기둥을 보내어주었겠습니까?(13:21) 여기서 로마총독부의 군인들은 외지근무를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살기 좋은 고향 이태리 반도에서 변방의 척박한 유대 땅에까지 와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임지의 반사막성 기후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옷뿐만 아니라 이불을 대신하고 있는 예수님의 그 겉옷이 필요합니다. 서로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제비뽑기를 하고 있는 광경입니다(27:35).

(2)  대속의 고난과 중보자의 고통은 예수님이 대신 당하시고 사람들은 그 옷을 벗겨서 이익만 향유하면 된다고 하는 사고방식에 대하여 일침을 가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좋은 사례가 있습니다; “주후 324년에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황궁 안에 목사를 배치했습니다. 언제나 자신 가까이에 있도록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죽기 전에 회개를 하고 황궁목사의 죄 사함의 기도를 받고자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 황제의 권력을 마음껏 누리며 제멋대로 세상재미에 빠져서 살고자 한 인물입니다. 그러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를 하고 천국에 가고자 했습니다. 한 마디로, 모든 대속의 고난과 중보자의 고통은 예수님께서 짊어지시고 그 열매는 고스란히 콘스탄티누스 황제 자신이 장사꾼처럼 약게 누리겠다고 하는 태도입니다.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일까요?(16:24, 1:12-13, 8:8, 12:1-2)

  끝으로, 어째서 군인들이 앉아서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것일까요?(27:36) 그것은 로마총독의 명령 때문입니다. 혹시 예수를 그 제자와 지지자들이 십자가에서 끌러서 내려가지 않을까 총독이 끝까지 염려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죽음이 있을 때까지 철저하게 지키면서 나사렛 예수파의 습격에 대비를 하라는 총독의 엄중한 명령입니다(27:65, 15:44-45). 그리고 대제사장과 장로들도 그렇게 확실하게 처리를 해주기를 총독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27:62-66).

  결론적으로,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의 수가 적지 않습니다. 100명이나 됩니다. 그 책임자가 백부장이고 그의 부하들이 모두 동원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7:54a, 15:39, 45, 23:47). 그런데 그날 그들이 십자가 앞에 경비를 서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큰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하더라”(27:50-54). 요컨대, 단지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 앞에 있었기 때문에 그 부활의 증거자가 되고 있습니다(24:48).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항상 함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