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90강(마27:11-1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6. 04:34

마태복음 강해 제190(27:11-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518()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질심문(對質審問, 양쪽 당사자를 한 자리에 불러서 서로의 의견을 청취하는 것)의 특징(27:1-4)

 

첫째로, 예수님은 로마총독에게 그 신병이 넘어가게 됨에 따라 더 이상 유대의 종교법이 아니라 그때부터 로마법의 적용을 받게 됩니다. 그 로마법의 성격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흔히 로마의 법은 만민법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로마제국 내 120개 이상의 민족을 평등하게 다스리고 있는 법이 바로 로마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로마총독인 본디오 빌라도는 장군출신답지 않게 굉장히 신중합니다(27:11-14). 피고인 나사렛 예수는 물론 그를 고발하고 있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의견을 모두 청취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동등하게 한 자리에 모아서 서로 질문하고 답변을 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로마인들은 별로 크지 아니한 이태리 반도에서 출발하여 유럽과 중근동을 모두 아우르는 대 제국을 형성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몽골제국 이전까지만 해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제국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들이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고 또한 오랫동안 통치할 수 있었던 이유를 학자들은 세 가지로 꼽고 있습니다; 첫째, 로마의 칼입니다. 둘째, 로마의 놀라운 포용력과 개방정책입니다. 셋째, 로마의 만민법입니다.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세계전쟁사(世界戰爭史, world history of war)에 있어서 가장 살상(殺傷,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을 많이 한 무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로마의 검입니다. 별로 길지도 아니하며 뭉퉁해보이는 그 양날의 칼이 가장 많은 인구를 살상했다는 것입니다. 그 숫자는 원자탄으로 죽은 수보다 더 많습니다. 비근한 예로 주후 70년에 로마의 군대가 유대인들의 반란을 진압할 때에 예루살렘 등지에서 110만명을 그 로마병정의 칼로 도륙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2)  로마의 포용력과 개방의 정신은 대단합니다. 로마제국의 정치와 법치 그리고 군대의 운용에 있어서는 라틴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학문과 철학 그리고 예술에 있어서는 거침없이 헬라어와 그 문명을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민족에게 종교적인 자치권을 허용했습니다. 유대교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 결과 산헤드린 대 공회가 최고의 의결권과 종교재판권을 행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단지 통치차원에서 황제에 대한 숭배사상만을 강요했을 뿐입니다. 나아가서 출신족속을 차별하지 아니하고 로마제국의 확장에 공헌을 하게 되면 시민권을 주고 드물게는 왕위까지 수여해주었습니다.

(3)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학자들은 소아시아 다소의 주민들이 로마를 도운 공로로 시민권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3). 따라서 사도 바울의 집안도 그때 시민권을 받은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습니다(22:28-29). 둘째, 왕위를 수여 받은 대표적인 경우가 헤롯 대왕입니다(2:1). 그는 하스모니안 왕가의 공주와 결혼을 하고 처남이 되는 왕자와 함께 당시 로마의 실권자 안토니우스를 알현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안토니우스는 신분만 높고 경륜이 없는 유대인 젊은 왕자보다는 비록 에돔 족속의 후손 이두매 출신이지만 식견이 뛰어나고 영리한 부마 헤롯에게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위를 수여한 것입니다.

(4)  물론 유대인들은 이방인 출신 헤롯을 왕으로 영접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입성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도움을 얻어서 군대를 끌고 들어오는 헤롯 대왕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헤롯 왕가가 유대 땅에 탄생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사입니다(2:1, 14:1, 3:1, 12:1, 25:13). 그와 같은 로마의 개방적인 포용정책은 훗날 세계적인 대제국들에게 계승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몽골제국과 대영제국, 그리고 중국과 아메리카합중국에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5)  로마의 법은 세계적인 대제국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만민평등의 법률체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과 관련하여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심문을 하고 있는데 그 절차는 로마의 법 제도에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공정한 재판을 위하여 피고와 원고 양쪽으로부터 의견을 신중하게 청취를 하고 있습니다.

(6)  참고로 한 가지를 더 말씀 드리자면, 주후 324년에 동서로 분열된 로마를 하나로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택이 되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이제는 로마도 하나, 황제도 하나, 종교도 하나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보기에 만민구원사상을 설파하고 있는 기독교야말로 로마제국의 사상적 통일을 위해서 가장 적합한 종교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일시에 모든 로마제국내의 민족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라고 칙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전체 백성의 1할도 되지 아니하는 기독교인들이 그들 모두를 교인으로 한꺼번에 받아들여서 성도로 종교교육을 시키는 것이 무리입니다. 그 결과 엄청난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이방의 종교와 사상의 영향으로 기독교의 교리와 본질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잡고자 로마의 황제와 교황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로마교회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이제는 본문을 살펴보면서 로마총독 앞에서의 심문의 특징과 예수님 답변의 의미를 도출해보고자 합니다;

(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27:11);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로마총독에게 끌고 와서 십자가 처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19:12). 그러므로 로마총독인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가장 먼저 파악을 해야만 하는 사항이 나사렛 예수가 자칭 유대인의 왕이냐?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지금 로마황제가 파견한 총독 앞에 서 있습니다. 그가 라고 대답하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고발하고 있는 내용을 상당부분 시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면 로마의 반역자로 인정이 되어 목숨이 위험한 처지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도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27:11). 어째서 목숨이 위험한 줄 번연히 아시면서도 그렇다고 시인을 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사실이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1:21, 2:2, 24:30, 26:64, 1:49, 2:19-22, 6:15, 18:37).

(3)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27:12); 예수님이 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고발하고 있는 내용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스스로 변호하지를 아니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종교적인 이유입니다. 둘째, 정치적인 이유입니다.

(4)  첫째, 종교적인 이유의 핵심은 진리라고 하는 것이 본래 인간의 법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심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서로 차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선민사상과 만민구원사상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는 로마총독과 같은 권력자 앞에서가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판결할 문제입니다. 그것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5)  구체적으로, 선민사상과 만민구원사상의 차이에 대하여 일일이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인간사회에서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며 완전한 외인취급을 받고 있는 죄인과 이방인 나아가서 원수까지 용서하며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복음이 말로써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기 때문입니다(5:43-48, 8:11, 9:9-13). 그러므로 이제는 로마총독 앞에서 다시 설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사실을 눈으로 보여주어야만 할 때입니다.

(6)  좀더 설명을 해보자면, 예수님 입장으로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피조물인 인간이 알아듣기 쉽게 복음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선민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자신들의 유대교리와 어긋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와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오로지 자신 선민 유대인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믿고 있으니 그들의 생각을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뜯어고쳐야만 하는 것일까요? 일일이 대꾸를 하기가 힘이 듭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집단적인 이기심이 근본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고칠 수가 있을까요? 극단의 조치가 필요할 따름입니다.

(7)  일찍이 선민으로 자처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요나의 이야기밖에는 해줄 말이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이십니다(12:38-42, 16:4). 이방 땅에는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의 복음으로 전하지 아니하고 있는 선민들이 먼저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설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만민의 죄를 사하는 대속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정답일 따름입니다. 그 결과 부활의 영광으로 예수님의 복음이 옳으며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진리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1:16-17).

(8)  둘째, 정치적인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로마총독 앞에 끌고 온 유대교지도자들의 속셈을 그대로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만민구원의 복음으로 설파하고 있는 예수님을 혹세무민으로 그리고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로마황제에게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발하고 있는 그들 대제사장과 장로들입니다. 말도 되지를 아니하는 그들의 주장에 일일이 답변을 한다는 것이 구차한 노릇입니다.

(9)  예수님은 그들이 일종의 차도살인’(借刀殺人,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남의 칼을 빌려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계책을 사용하고 있는 줄 번연히 알고 계십니다. 이제 조용히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게 되는 부활의 새 아침이 밝아 올 것입니다(12:31, 16:7-12).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 시대를 내다보시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10)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27:13); 본디오 빌라도가 그 이상한 대질심문의 장면을 보고서 참지를 못하고 한 마디를 하고 있습니다. 바보처럼 너 예수는 왜 변명을 하지 아니하고 있는가? 라는 뜻입니다. 로마의 재판은 먼저 양쪽 당사자의 의견을 모두 들어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양편이 한 자리에서 마주 보고 서로 질문하고 답변하는 형식을 취하도록 만들어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자초지종을 파악하는 형식입니다. 로마가 온 세상에 자랑할 수 있는 그 제도가 예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있으니 빌라도로서는 심히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렇지만 빌라도의 마음 속에 한 가지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빌라도)가 그들(유대교지도자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27:18).

(11)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27:14); 로마의 총독으로서 빌라도는 유대 땅에서 많은 재판을 해본 사람입니다. 재판을 하면서 대질심문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금요일 아침의 대질심문만은 굉장히 특이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렇게나 예수를 고발하고 비난하고 있는데 예수는 시종일관 묵묵부답이기 때문입니다. 하도 답답하여 말문을 열도록 종용을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이미 예수는 죽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고 있는 그 장면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번쩍이고 있습니다.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것이 성취가 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53:7-8).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성도들이 배워야만 하는 신앙생활의 태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공격하며 세상의 법정에 고발하고 있는 그들에게 오히려 구원과 죄 사함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묵묵히 인내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 대속의 제물이 되고자 예수님께서 끝까지 인내를 하셨기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며 제자가 되는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이제는 주님의 제자답게 예수님의 신앙을 본받아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