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89강(마27:1-1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6. 04:32

마태복음 강해 제189(27:1-1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517(주일)

 

사도 마태만이 배신자 가룟 유다의 최후에 관하여 상세하게 기술을 하고 있는 이유(26:47, 27:1-10)

 

4복음서 가운에 유일하게 마태복음만이 배신자 가룟 유다의 최후에 관하여 상세하게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서에서는 어째서 유다의 최후에 관하여 기록을 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엉뚱하게도 의사 누가는 그의 복음서가 아니라 초대교회의 역사서인 사도행전에서 유다의 최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예 그 의미까지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의사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실과 사도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체계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풀이와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의사 누가가 사도행전 제1장에서 사도 마태의 본문 기록이 정확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가룟 유다의 배신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은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여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 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69:25)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109:8) 하였도다”(1:16-20). 의사 누가가 해석하고 있는 가룟 유다의 인생의 의미를 풀이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었던 자입니다(10:4, 1:17). 그것은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하나님의 은혜에 속합니다. 만약 그가 세상적인 성공과 이익에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배신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능히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며칠 후에 곧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머리 좋은 가룟 유다가 사도행전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며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을 것입니다.

(2)  그러나 가룟 유다는 그 은혜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를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되는 편이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1:16). 메시아라고 믿었던 예수는 다윗의 뒤를 잇지 아니하고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고 서너 차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16:21, 17:22-23, 20:18-19, 26:2). 그의 예언이 알게 모르게 퍼져나가자 예루살렘의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제국을 재건하는 위대한 메시아의 길을 선택하지 아니하겠다는 내용이 분명하기에 예루살렘 백성들이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3)  이에 따라 유대교지도자들은 힘을 얻어서 유월절만 지나면 아예 예수를 체포하여 처형해버리려고 합니다(26:3-5). 그렇게 정세를 읽은 가룟 유다는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세상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 “자신이 앞장을 서서 내부고발자가 되어 유월절 기간 중에 스승을 팔아 넘김으로써 확실하게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신임을 획득하고 일약 출세를 하겠다는 계산입니다”(26:14-16, 47). 그는 참으로, 영악하게도 말을 갈아탐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고난의 위기를 세상적인 성공의 기회로 도리어 탈바꿈시키고자 하는 자입니다.  

(4)  그렇지만 세상적으로 아무리 머리회전이 빠르고 처세술이 뛰어난 가룟 유다라고 하더라도 한 가지 전혀 고려를 하지 아니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아니하시고 복음사역의 현장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 죽음은 대속의 은혜를 베풀자고 하는 것이며 그 희생의 보답은 부활의 영광입니다(2:31-32). 부활의 영광 곧 창조주의 새로운 창조를 믿고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신앙인데 그것이 유다에게는 전혀 없습니다(11:25-26).

(5)  바야흐로 새 시대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초대교회의 역사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배신하여 유대교지도자들에게 팔아 넘긴 가룟 유다는 그 시대를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스승을 적들에게 팔고서 받은 돈은 공동묘지를 사는 값이 되고 그 묘지에 자신이 가장 먼저 자살을 하여 묻히게 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18-19). 그리고 그의 직분마저 다른 제자에게 넘어가버리고 맙니다(1:20-26). 그와 같은 의미를 의사 누가가 사도행전 첫머리에서 전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사도 마태의 기록을 따라가면서 가룟 유다의 최후에 대하여 묵상을 해보면 다음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1)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의 처형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로마총독을 찾아가고 있습니다(27:1-2). 그 기록과 동시에 마태는 그때에’(27:3a)라는 접속부사를 사용하여 교묘하게도 예수를 판 유다의 후회와 자살 이야기를 연결시켜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기사의 배열은 상당히 의도적입니다.

(2)  마태는 어떠한 의도로 그렇게 기록을 전개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사두개파 유대교지도자들의 행태와 가룟 유다의 최후를 함께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불법적으로 체포하여 밤새 심문을 했습니다(26:57-68). 그리고 나서는 로마총독에게 끌고 가서 십자가처형을 허락 받으려고 시도를 합니다(27:1-2). 그들은 종교적으로 자신들을 크게 비판하고 있는 예수를 제거함으로써 유대교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합니다. 마찬가지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유대교지도자들에게 팔아 넘김으로써 말을 갈아타고 한번 입신양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3)  양편 모두 메시아를 처치함으로써 행복한 여생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사도 마태는 본문에서 가룟 유다의 엄청난 후회와 회한에 찬 자살극을 보여줌으로써 결코 그러하지가 아니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대목이 다른 복음서에서는 없는 사도 마태만의 기록입니다. 사도 마태의 주장 그대로 가룟 유다의 후회와 죽음을 시작으로 하여 함께 예수를 체포하고 처치한 유대인들 모두가 불우한 시대를 살다가 40년 후에 로마군대의 진격으로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4)  유다가 먼저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27:3-4). 예수를 체포하고 종교재판을 끝낼 때까지는 내부고발자로서 가룟 유다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단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유다의 증언 등을 통하여 예수를 유죄로 판정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판결은 내린 다음에는 배신자 유다가 필요할 리가 없습니다. 이제는 로마총독에게 신병을 인도하고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정치적인 압력만 가하면 됩니다. 그래서 유대교지도자들은 헌신짝처럼 유다를 버리고 있습니다(27:4).

(5)  믿었던 유대교지도자들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가룟 유다가 앞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두 가지입니다; 첫째, 만약 진정한 회개를 했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로 나아가서 용서를 구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 땅에서 풀자면 당사자인 예수님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16:19). 둘째, 그러나 유다는 그러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잘못을 범한 자가 자신이기에 잘못을 범한 자신을 죽임으로써 그 죄악의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6)  본문에서 가룟 유다의 선택은 그 의미가 죽은 자에게는 잘못을 더 이상 묻지를 아니한다는 세상적인 이치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27:5). 하지만 그것은 영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죽음의 잠을 깨워서 종말론적인 심판을 행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5:29).

셋째로, 여기서 가룟 유다가 자진(自盡,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한 다음 그 사후처리를 하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행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27:3, 6-8);

(1)   그들은 예수의 몸값으로 지불한 은 30세겔을 다시 받아서 성전의 금고에 보관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핏값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27:6).

(2)   여기서 핏값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의 의미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한 행위가 그들에게 꺼림직합니다. 그 돈을 볼 때마다 그 일이 새삼 떠오를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보관을 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3)   두 번째의 의미는 그 돈을 되돌려줌으로써 가룟 유다가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유대교지도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27:3-4). 그러므로 대제사장들이 그 돈을 볼 때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의 죽음으로 그 잘못을 사죄하고 있다고 하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유다의 피가 그 돈을 통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4)   두 가지 경우 모두 꺼림직합니다. 따라서 좋은 일에 사용하여 그 책임을 가볍게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역시 대제사장들이 그렇게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27:7-8).

(5)   끝으로, 사도 마태의 놀라운 해석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 한 토막을 기억하고서 여기에 적용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힌놈의 골짜기로 가서 무죄한 자의 피가 그곳에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19:1-4). 예레미야의 예언은 선지자 스가랴에 의하여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30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 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30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11:12-13).

(6)   선지자의 예언을 사도 마태가 본문의 말미에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30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27:8-10).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사도 마태가 강조하고 있는 사실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을 팔아 치운 가룟 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듯이 유대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을 처형하고자 한 일을 크게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의 주장 그대로 40년 후에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유다의 땅이 초토화가 되고 맙니다. 둘째, 유다가 되돌려준 은 30세겔로 유대교지도자들이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공동묘지로 사용합니다. 그것은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예언도 곧 성취가 될 것이라고 하는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장차 세상의 종말과 주님의 재림도 예언 그대로 성취가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성도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지상명령의 실천과 자기성화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