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86강(마26:58-6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2. 14:13

마태복음 강해 제186(26:58-68)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 5 14()

 

산헤드린 대 공회가 예수님을 성전모독죄와 하나님 아들 참칭죄 등 신성모독죄로 정죄하고 그 죄질(罪質, 죄의 본질)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결을 내리다(26:58-68).

 

첫째로, 대제사장들을 위시한 유대교지도자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까요? 사도 마태의 기록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일까 의논을 하고 있습니다(12:9-14).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율법규정을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 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20:8-10). 그리고 모세의 율법규정에 따르면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31:15).

(2)   사실은 예수님이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한 것이 바리새인들의 살의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시발점입니다(12:8, 14). 모세오경에 따르면 안식일의 주인은 천지를 지으시고 그 날에 안식을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2:1-3, 16:28-29). 그런데 예수님이 그 자리를 침범하고 있으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탄의 세력인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기록이 그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 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14:12-15).

(3)   그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을 사도 마태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 지라.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12:22-24). 예수님이 귀신이 들려서 농아자가 된 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은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사탄의 나라의 왕입니다;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12:26).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고 있는데 그것을 오해하여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사탄의 세력으로 몰아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12:27-28).

(4)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을 사탄의 세력으로 몰아서 죽이고자 하는 자는 역사적인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복음사역을 돕고 있는 성령님을 모독하고 그 역사를 거역하는 자는 도저히 용서함을 받을 수가 없다고 다음과 같이 단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12:30-32).

(5)   포도원 농부의 비유의 결말 이야기를 듣고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21:43-46).

(6)   예수님이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시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부터 행하고 계시는 모든 일들을 보고서 유대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여 죽이기로 결의하고 있습니다(26:3-5). 주요한 대목은 첫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대제사장을 비롯한 장로들을 비판한 일(21:13), 둘째,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유대교 선생과 율법학자들을 강하게 질책한 일(23:1-31), 셋째,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반대하고 있는 유대교지도자들은 물론 유대교의 상징인 예루살렘과 성전까지 멸망을 당하게 된다고 예언한 일(23:32-24:2) 등입니다.

둘째로, 그러나 막상 예수님을 체포하여 산헤드린 대 공회에 세운 이후에(26:57) 대제사장 가야바와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죽일 명분을 찾고 있는데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의 내용은 처음과 상당히 다릅니다;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고 허언(虛言, 지킬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6:61-62). 둘째,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6:63). 셋째, 예수님이 직접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을 것이며 또한 하늘 구름을 타고서 이 땅에 다시 온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6:62-64).

그렇다면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는 예수님을 반대한 애초의 이유들이 전혀 거론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안식일을 범한 죄, 사탄의 힘을 빌려서 이적을 행하고 있다고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점, 율법선생과 유대교 학자들을 외식하고 있는 종교적 지도자들이라고 크게 모독한 일, 예루살렘과 성전의 멸망을 예언한 일 등에 대한 논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마태는 그날 밤 예수님을 정죄했던 산헤드린 대 공회는 거짓 증거를 찾기에 급급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이르되”(26:59-60).

셋째로, 정작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유대교지도자들의 살의(殺意, 죽이고자 하는 의도)는 자신들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난했던 예수님의 행동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점에 대해서는 논의를 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그러한 사항에 대해서는 의제(議題, 회의의 제목)로 상정하지를 아니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다른 건수로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이라고 정죄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다른 명분과 증인을 만들어내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마침내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뜻밖의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상식에 비추어보면 허무맹랑한 혹세무민의 발언이며 그들의 유대교리에 비추어보면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고 있는 발언이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나온 것이 확인이 되고 또한 거침없이 예수님이 그렇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두 사람의 증인을 내세워서 예수님이 행한 허황한 언행에 대하여 증언하게 한 것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헤롯 왕가가 46년 동안이나 증축을 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서 감히 사흘 동안에 다시 짓겠다고 예수님이 주장을 했으니 그것이 혹세무민이 아니면 무엇이냐는 논리인 것입니다(26:60-62, 2:19-20).

(2) 궁지에 몰아 넣었다고 판단을 했는지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26:63). 예수님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들이 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하는 답변이 아닙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답변을 얻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답변이 나타나기만 하면 즉시 신성모독죄로 정죄를 하고 사형에 해당한다고 산헤드린 대 공회에서 판결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26:65-66).

(3) 가야바 대제사장의 질문에 정확하게 답변을 하게 되면 예수님은 사형 감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진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26:64).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외치고 있습니다; “그가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26:65-66a). 공회원들의 호응이 즉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26:66b-68).

끝으로,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의 확인과 답변이 훗날 역사 가운데 사실로 발생하고 있으며 또한 진리로 입증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증거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새로운 성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적으로 완벽하게 임재하여 계시는 예수님의 부활의 몸입니다(2:21-22). 마찬가지로 세례를 통하여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과 합하여 영적으로 자신의 장례를 치르고 부활에 참여하게 된 제자와 성도들에게도 같은 은혜가 임하고 있습니다(24:49, 1:8, 2:1-4, 6:4, 고전6:19-20). 그리고 40년 후에 예루살렘이 로마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성전이 불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무려 110만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살해를 당하고 남은 자들이 이방 땅으로 유랑을 떠나게 되는 참혹한 사건이 역사 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과 그 뜻을 전하러 오신 주님 앞에 다시 한번 겸손하게 옷깃을 여미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가 내밀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 그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자신의 이익과 신념에 어긋난다고 하여 사람들의 상식과 종교적인 교리를 명분으로 삼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정죄하는 행위를 반복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은 물론 모든 역사의 주인이시다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청지기이며 종이라는 신분에 만족하고 그 맡기신 사명에 한결같이 충실하여야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