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83강(마26:45-4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2. 04:43

마태복음 강해 제183(26:45-4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511()

 

씨 뿌리는 비유’(13:18-23)를 되돌아보게 하는 인자, 죄인, 파는 자, 제자의 의미(26:45-46)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제자들 앞에서 인자’(人子, son of man)라고 부르고 있습니다(26:45b). 그 뜻은 나도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분은 마리아의 친아들이며 목수 요셉의 의붓아들입니다. 그러나 굳이 친아버지를 말하라면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1:18). 창조주가 아버지이시기에 예수님의 정체는 본래 인자가 아니고 천자’(天子, son of God)입니다. 하지만 제자들과 공생애를 함께 지내시면서 예수님은 그들과 별로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자신을 지칭하여 인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8:20, 9:6). 그 점은 초대교회에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장로들과 사이 좋게 지내기 위하여 스스로 장로의 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벧전5:1, 요이1:1).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강조하고 계시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1)   역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성도들에게 인자이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옷 입고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제공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사역의 현장에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가 풍성하였듯이 여러 제자들의 사역의 현장에서도 그러합니다(10:1, 10:17-20). 그리고 그와 같은 은혜는 교회의 역사 가운데 사도와 성도들에게 계속 주어지고 있습니다(16:15-18, 2:41, 3:6-8, 6:8). 특히 전도와 선교의 현장에서 그러한 것입니다.

(2)   구약시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인자라고 부르시면서 생명의 말씀을 위탁하셨습니다(2:1-8, 8:17). 마찬가지로 신약시대가 시작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완전한 말씀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고 있는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 복음의 깊은 뜻을 깨닫고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고 있습니다. 곧 보혜사 진리의 성령님을 보내어 주신 것입니다(14:16-17).

(3)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강조하셨기 때문에 사람의 아들인 제자와 성도들이 죄 사함을 받고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8:15, 21:7).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있다는 것 그것이 구원이며 영생입니다. 그것이 죄 사함이며 용서이며 회복입니다. 이 땅에서도 맛볼 수 있는 하나님 자녀의 권세입니다(1:12-14).

둘째로,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죄인들입니다(26:45c).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 유대교지도자들이 그러합니다(26:4). 그들은 예수님의 만민구원의 복음이 자신들의 유대교리와 어긋나기 때문에 예수님을 처단하려고 합니다. 그들의 유대교리는 선민들의 특권을 잔뜩 율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의 취지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여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 있습니다(19:6). 그러한 목적으로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고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3:12). 여기서 제사장나라의 역할은 다른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것입니다(4:27-31, 19:18, 34, 66:20-21, 4:11, 16:4).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만을 섬기는 거룩한 삶의 모습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백성을 말합니다(24:15, 삼상2:30).

그런데 유대교지도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애굽과 같은 외세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있는 이방인들은 모두 타도와 멸망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오로지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들만이 다윗의 제국을 회복하고 온 세상에 시온의 영광을 다시 떨칠 것입니다”. 그것은 집단이기적인 민족우월사상입니다. 만민구원을 원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면으로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교의 앞날에 큰 장애이며 제거의 대상입니다.

셋째로, 예수를 파는 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26:46).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의 물건이나 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첫째, 팔 수 있는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이미 사람이 아니고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스승을 30’ 세겔에 팔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은 종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21:32, 26:15).

그가 왜 스승 예수를 그렇게 싼 값에 팔아 치우고 있는 것일까요? 두 가지로 그 내심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1)   애초부터 나사렛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제자 노릇을 한 것은 다른 속셈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 남부 메마른 벽촌 가룟 출신이기에 유다는 누구보다도 출세에 대한 야망이 큰 사람입니다. 대도시 예루살렘에 와서 청운의 꿈을 펼쳐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는 젊은이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로 보이는 나사렛 예수의 제자가 되어서 그 선지자의 노하우를 모두 배우고자 합니다.

(2)   그런데 예수가 유대교지도자들의 눈에 가시가 되고 있습니다. 언제 제거를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유다 자신도 잘못하다가는 한꺼번에 제거가 될 것만 같습니다. 위기가 닥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머리가 영민한 유다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자 합니다. 재빨리 대제사장들의 편에 서서 스승을 잡아서 죽일 수 있도록 협조해줌으로써 살아날 기회를 얻고자 합니다. 동시에 공을 세우게 되면 유대교 내에서 새로운 입지가 마련이 될 것입니다.

넷째로, 나머지 열한 명의 제자들이 기도를 하지 아니하고 자고 있습니다(26:45a).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스승이신 예수님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문제로 얼마나 고민하고 슬퍼하면서 피땀 흘려 기도를 하고 있는지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26:37-38, 22:41-44).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스승과는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서 만민의 죄를 지고 가는 유월절 어린 양의 사명을 감당하고자(1:29) 입성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십자가 처형장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2) 반면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유대인의 왕이 되고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귀의 등에 자신들의 옷을 안장으로 깔고 있습니다(21:7). 그리고 백성들의 환호에 마음이 들뜨고 있습니다(21:8-11). 제자들은 메시아의 나라가 예루살렘에서 곧 성립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나라에서 차지할 높은 자리에 관심을 가지고서 서로 다투기도 합니다(20:21-24).

다섯째로,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신 바가 있는 씨 뿌리는 비유’(13:18-23)를 가지고 조명해볼 때  그 깊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짐작하게 됩니다;

(1)  인자(26:45b)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천국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는 자입니다(13:18-19, 23).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의 본뜻을 복음으로 밝히 드러내고 있지만 백성들은 그 말씀을 영접하는 자와 배척하는 자로 나누어집니다. 그 마음 밭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마음 밭을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으로 4구분하고 있습니다(13:19-23).

(2)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교지도자들은 길가와 같습니다(13:19). 본문에서 그들은 죄인의 손”(26:45c)입니다. 그런데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고 있습니다. 여기서 악한 것은 유대인들의 선민우월사상을 말하며 나아가서 이방인들에 대한 저주와 멸시로 점철되어 있는 유대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유대교리를 생활율법으로 규례화하여 대대로 지켜 나오고 있는 선민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아무리 만민구원사상이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 취지라고 부르짖어보아야 쇠귀에 경읽기’(牛耳讀經)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명(, 목숨, 생명)만 재촉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3)  스승인 예수를 파는 자”(26:46)인 가룟 유다는 그 마음이 가시떨기와 같습니다. 그는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13:22)입니다. 무려 36개월 동안이나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복음을 가르침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사로잡혀서 스승을 배신하게 됩니다. 예수를 스승으로 계속 따르게 된다면 유대교지도자들의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적으로 입신양명하고자 하는 자신의 앞길을 망치게 됩니다. 반대로, 대제사장들의 편에 가담하게 되면 부귀와 영화가 찾아올 것만 같습니다. 한 마디로, 영생의 말씀과 세상적인 성공을 맞바꾸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라고 하겠습니다.

(4)  나머지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은 어디에 해당이 될까요? “제자들”(26:45a)은 기도의 현장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들은 돌밭과 같습니다(13:20);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13:21)입니다. 스가랴의 예언 그대로 목자를 치게 되면 양들이 뿔뿔이 제 살 길을 찾아서 흩어져버립니다(13:7).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들이 그러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비록 강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결과는 그렇게 전개되고 맙니다.

  이제 결론을 맺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돌밭과 같은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은 땅’(13:23)옥토’(沃土, 비옥한 땅)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이유가 바로 그 옥토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만 합니다. 죄의 용서를 받고서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의 임재와 내주 역사하심으로 비로서 제자들에게 복음이 내면화되고 생활화되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도자로서의 삶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