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82강(마26:36-4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1. 11:25

마태복음 강해 제182(26:36-4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 5 8()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기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정확하게 이 땅에서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특별히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크게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구현하기 위하여 성육신과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 죽음과 무덤 속 부활이라는 독특한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승천과 성령님의 오심 그리고 심판주로 다시 오심도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절차들입니다.

참고로, 아버지의 뜻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요한복음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6-17),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6:38-40).

그런데 좀 더 구체적인 상황 속에 들어가게 되면, 어느 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어느 것이 자신의 인간적인 소원인지 잘 구별이 안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보통사람과 똑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러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3 6개월 동안 열두 제자들과 늘 함께 공생애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영향을 엄청나게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이 받고 있는 영향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젊은이답게 청운의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메시아의 나라가 다윗의 제국으로 이 땅에 서는 것을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지니고 있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로마제국과 헤롯 왕가 등 외세를 모조리 물리쳐주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왕이 되어 영원히 안전하게 자신들을 다스려달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열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들을 동원한다고 하면 그 일은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26:53). 그러나 그 방법은 단지 인간적인 바램에 불과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예수님이 이미 알고 계십니다(26:54). 그 방법은 선민에게는 완전이익이지만 외세 곧 이방인들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꼭 십자가를 지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다른 죄 사함의 방법이 있을 것만 같아서 계속 예수님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육신을 30년 넘게 입고 있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극형인 십자가의 처형 그 희생만은 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 시도 때도 없이 기도로써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육신의 생각과 영적인 판단이 다르기 때문에 그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고자 예수님이 끊임없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고 있는 기도의 여러 절차들(26:36-46)

 

그 간절한 요청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유월절이 무교절 만찬으로서 시작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6:17-20). 그러므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끝내시고 자신의 기도처소인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이 엄숙합니다(26:26-30, 36). 그리고 그때 행하고 계시는 조치가 특별합니다(26:36-46). 이제부터 마지막 기도를 준비하고 행하시는 예수님의 여러 절차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일부러 겟세마네 동산을 찾아가고 있습니다(26:36a). 겟세마네 동산은 대도시 예루살렘과 교외마을 베다니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감람 산을 말하고 있습니다. 별로 높지 아니한 동산입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듯이(19:3, 20:18-21) 그렇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직접 조용하게 기도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둘째로, 8명의 제자를 앉아서 기다리게 한 다음에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등 3인의 제자만을 데리고 예수님은 평소 자신만의 기도장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26:36b).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8명의 제자들을 멀찍이서 기다리게 하고 따로 기도하게 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기도와 제자들의 기도는 그 내용이 크게 다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간구하는 내용은 십자가를 꼭 져야만 하느냐 아니면 달리 구원의 방법 그 대안을 찾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제자들이 간구하는 내용은 하루속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메시아의 나라를 다윗의 제국으로 가나안 땅에 성립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중신(重臣, 중요한 신하)이 되어 그 일을 돕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관심사가 다르고 미래를 보는 눈이 다르며 당장 처하고 있는 환경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8명의 제자들을 멀찍이서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고 평소 자신을 가까이서 수행하고 있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3인의 제자를 대동하고서 더 진행합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기도는 공식적인 행사라기보다는 무척 개인성향이 강한 것이므로 조심스럽게 소수의 제자만으로 수행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자신의 마음의 상태에 관하여 3인의 제자들에게만 밝히면서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26:38). 그것은 참으로 특이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고통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자신을 가까이서 수행하고 있는 세 명의 제자들에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26:37). 그리고 그들의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있는 간접적인 표현이 다음과 같이 들어 있습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26:38). 여기서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복음을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묵상을 하는 시간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피땀을 흘려가면서 간절하게 그 유명한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26:39, 22:44). 세 명의 제자들마저 조금 떨어져 있게 하고서 예수님이 홀로 간절한 기도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십자가를 지는 대신에 다른 방법을 강구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번 거절을 당해 왔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체포와 처형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의 기도는 더욱 처절한 것입니다(22:44). 그러나 기도의 결과 대안이 없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따르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있습니다(26:39). 다만 남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육신이 약하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과 도우심 그리고 견딜 수 있는 힘주심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특청(特請, 특별한 요청)하고 있는 기도는 단 한번으로 끝나지가 아니할 것입니다.

다섯째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한 시간도 간절하게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26:40). 스승과 제자는 다릅니다. 서로가 서로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부문이 있고 또 전적으로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문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과 완전한 사람의 아들들인 제자들은 그 인식과 관심사항이 많이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대속의 죽으심에 대하여 사전에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설명을 해주었지만(16:21, 17:22-23, 20:18-19, 26:2) 그들은 그 일이 직접 자신들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만큼 절실하지가 않습니다. 그 결과 스승을 위하여 깨어서 한 시간도 기도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26:40).

여섯째로, 마음에는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여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에 전념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시고서 예수님의 기도가 더욱 절실해지고 있습니다(26:41-42). 사도 마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잠 자는 모습을 보시고서 첫 번째 기도와 똑같은 내용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26:39, 42). 그러나 더 나중에 기록이 된 사도 요한의 복음서를 보면 마지막 기도의 내용이 상당히 풍성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앞날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에게 부탁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내용들입니다(17).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두 번째의 기도의 내용에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에 발생할 제자들의 앞날에 대하여 아버지께 간구하는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을 할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를 하신 후 3인의 제자들과 함께 그 장소를 떠나고자 하십니다(26:43-46). 같은 내용의 기도를 세 번이나 드렸다고 마태는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26:44). 첫 번째 기도의 결과 이미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확실하게 예수님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26:39). 그리고 3인의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의 영적인 상태뿐만 아니라 육신적인 상태가 더욱 나약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두 차례나 시간을 두고서 확인하고 있습니다(26:40-41, 43). 그 결과 예수님은 나약한 육신을 위하여 무엇을 덧붙여서 기도를 하고 있을까요?

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에게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리면 사나흘 버틴다고 합니다. 길게 버티는 경우는 일주일이나 된다고 합니다. 오래 버틸 수록 그 고통의 시간은 길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단 6시간으로 줄어들어 있습니다. 육신의 고통의 시간을 많이 줄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방적으로 줄여주시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이 또 다른 기도의 제목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24:20-22).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결코 혼자서 독단(獨斷, 상의 없이 행하고 있는 자기 혼자만의 결단)으로 실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거듭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 절차가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도우심을 철저하게 얻고 있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이 공생애를 통하여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동역자들입니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합니다(26:38). 그리고 그들의 중보기도가 동시에 요청이 되고 있습니다(26:40-41). 본문에서는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 그러한 친구들입니다(26:37). 그와 같은 내용이 솔직하게 기술이 되고 있는 것이 본문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