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80강(마26:31-35)(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0. 07:39

마태복음 강해 제180(26:31-3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 5 6()

 

예수님은 왜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미리 말해주고 있는가?(26:31-35, 75)

 

첫째로, 사람들의 본성이 어떠하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정확하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면책적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는 주인의식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한 세 가지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깊이 생각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기록 그대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은 사람들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 차원이 높고 창조적인 것입니다(48:6-7, 55:8-9). 그러므로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비천하고 초라하며 죄인인지를 먼저 깨닫고 인정을 해야만 합니다(18:27, 41:14, 5:8, 18:13, 딤전1:15). 결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자기면책적인 경향을 고수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경향성을 벗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제자들의 문제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차제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본성을 한번 음미해보시기를 바랍니다;

(1)   자기중심적입니다; 모든 자연과 환경 그리고 사회가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 세상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이라고 은연중에 믿고들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사라지고 나면 모든 것이 다 필요가 없는 것인 줄 알고 있습니다.

(2)   자기면책적입니다;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들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잘못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인생을 살고 있어서 그러한 것이지 자신은 아니라고 애초부터 면책을 시켜놓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들 생각하고서 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잘못을 범하는 측은 자신이 아니고 주로 타인들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3)   자기주인의식입니다; 언뜻 보면, 참 좋은 의식입니다. 세상의 주인으로서 주체적으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고 또한 사회를 운영하고자 하니 얼마나 근사합니까? 하지만 창조주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곤란한 사상입니다. 피조물이 스스로 자신이 창조주인 줄 알고서 세상을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본래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주의 뜻에 맞도록 경영하도록 위임을 받고 있는 청지기들입니다(1:26-28). 그런데 이 세상을 자신들의 뜻대로 운영하고자 아예 주인이 없거나 죽은 것으로 치부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포도원농부의 비유가 그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1:33-42).

둘째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와 아니 계실 때의 차이를 정확하게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13:7),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26:31). 예수님이 목자라면 제자들은 양들입니다. 목자가 사라지게 되면 양들은 헤매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양들 가운데 우두머리가 생겨납니다. 우두머리가 하는 일은 양들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을 끊임없이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두머리가 가는 길을 양들은 순종적으로 뒤따라 갑니다.

양들인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3년반 동안 지내는 사이에 두 가지의 착각에 빠져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평생 동안 영원히 자신들과 함께 공생애를 사실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 메시아로서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고 유대인의 왕으로 즉위하시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지금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습니다(21:7-8). 그러므로 자신들은 평생 동안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고 행복하게 살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10:35-41, 6:15).

둘째, 양들인 자신들과 지도자이신 예수님이 은연중에 일심동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복음사역의 길에 항상 함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자신들이 분리가 된다고 하는 상상을 해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지도 생각을 해보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9:15).

하지만 기본적으로, 목자와 양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목자는 사람이지만 양은 그 가축에 불과합니다. 양은 목자가 있기 때문에 좀더 나은 길로 인도함을 받고 있으며 나은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양떼의 주인인 목자의 이름으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10:9-11, 14:12-14)”. 만약 목자가 사라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 가치가 가축의 하나로 전락을 하고 맙니다. 그리고 양의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가 옹립이 됩니다. 그때부터 단지 심심하여 일종의 흥미거리만을 쫓아서 졸졸 뒤따라 다니게 될 따름입니다.

그러한 양들의 행동 가운데에서는 하나님이 기억할 만한 가치가 거의 없다고 하겠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목자가 되고 있기 때문에 그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미가 있는 인생살이를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다시 제자들을 끌어 모으실 것임을 언약하고 있습니다(26:32). 예수님의 십자가처형이 결코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부활의 역사입니다.

물론 12명의 제자 가운데 한 명 가룟 유다는 진작에 제 갈 길로 떠나고 맙니다(26:47). 그러면 11명의 제자가 남게 되고 그들도 예루살렘을 떠나서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26:31). 그 가운데 8명이 갈릴리 출신입니다. 그들은 고향 갈릴리로 되돌아가고 말 것입니다(21:2-4).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주님을 떠난 그들이 고향 갈릴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옛날 방식 그대로 물고기를 잡으면서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그냥 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갈릴리로 그들을 찾아오심으로써 새로운 시대 곧 초대교회의 시대가 전개되는 것입니다(21:15-19). 그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예수님의 예언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26:32).

넷째로, 교회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이 되는 것일까요? 인간의 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지로 말미암아 탄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장담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 그러나 베드로의 의지가 무색해지고 말 것이라고 예수님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26:34).

수제자로 자처하고 있는 의리의 사나이 베드로는 도저히 동의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강력하게 자신의 사내대장부다운 의지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26:35a). 다른 제자들도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26:35b). 열한 제자들의 의지가 역사 가운데 관철이 되고 있을까요? 어림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순순히 체포를 당하시자)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26:56),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26:75).

결론 삼아 말씀을 드린다면, 교회는 인간의 의지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노력으로 운영이 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하심 가운데 우리의 주님으로 말미암고 있습니다(40:14, 11:33-36, 1:8). ‘26:32’절 말씀 그대로 예수님이 부활의 능력을 가지고 제자들을 찾아 오심으로부터 교회의 역사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과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성립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족을 더하자면, 부활의 주님께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생업의 현장으로 되돌아가버린 제자들을 다시 찾아 오심으로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26:31-32, 21:1-7). 그러므로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실패하였다고 침체에 빠지거나 좌절할 일이 결코 아닙니다(10:39). 다시 찾아오시는 주님을 다시 맞아들이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다시 옷 입으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