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79강(마26:21-3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10. 07:37

마태복음 강해 제179(26:21-3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55()

 

예수님과 함께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26:21-30)

 

첫째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26:21-2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사람들을 얼마나 긍휼하게 여기고 있는 것일까요? 구원주 그리스도의 긍휼의 마음의 정도를 그대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본문에서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26:21). 보통사람 같으면 제자가 스승인 자신을 반대파에게 팔아 넘긴다고 하는 사실을 미리 알게 되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처를 할까요? 당연히 여러 제자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 자를 지목하여 붙들어서 응징을 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배신자는 평생 동안 사람구실을 못하고 뉘우칠 기회마저 놓쳐버리고 말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조치를 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의 야망과 출세욕에 눈이 멀어서 스승을 팔아서라도 입신양명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있는 벽촌 가룟 출신 유다의 처지를 지극히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의 이름을 끝까지 거명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의 마음은 진하다고 하겠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그 긍휼의 사랑 앞에 회개를 하는 자는 누구나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룟 유다가 그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6:25, 49, 13:30). 그는 스스로 후회를 하면서도 끝까지 대속의 구원주이신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로써 자신의 비극적인 인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27:5). 또한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다른 제자들 역시 조금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자신들은 배신자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 받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26:22).

둘째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26:23). 자신은 배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승으로부터 확인 받고 싶어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위와 같이 실로 이상한 답변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월절 만찬에서는 서로가 떡을 떼어서 그것을 공동의 소스그릇에 찍어서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승과 제자들이 같은 소스 그릇에 손을 넣고 있습니다. 비단 가룟 유다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답변은 가룟 유다를 간접적으로 가리킬 수도 있지만 그러하지 아니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 확대해석을 해보자면, 다른 제자들에게도 가룟 유다와 같은 야심과 출세욕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은근히 시사해주고 있는 대목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10:35-45).

실제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대제사장들이 보낸 하인들과 병정들에게 끌려가시고 나자(26:56-57) 예수님의 예언 그대로 제자들이 모두 제 살 길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26:31).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로서 외세를 신위적인 능력으로 단숨에 물리치고 이스라엘 제국을 부활시킬 것으로 믿었던 제자들이 하나같이 크게 배신감과 절망감을 느끼고 스승의 곁을 떠난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모두들 그러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유스러운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7: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7:3).

셋째로,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26:34a). 기독교의 정경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외경 가운데 소위 유다복음이 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님이 체포를 당하고 십자가형에 처해져야만 만민구원의 시나리오가 성취될 수 있는데 그 일을 가룟 유다가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서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 가룟 유다는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는 논리입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예수님의 증언에 따르면 칭찬이 아니라 그에게 화가 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가룟 유다가 화를 당할 수 밖에 없는지 근본적으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과 모세의 깨달음이 큰 도움이 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0:41-42),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30:19).

먼저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의 선택과 마리아의 선택의 차이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모세의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 앞에 생명과 사망 그리고 복과 저주를 동시에 두시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는 전적으로 당사자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잘못 선택한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추궁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26:34a).

본문에 비추어보면, 복음을 이루기 위하여 그렇게 선택을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유다복음과 같은 것은 그야말로 억지논리이며 구차한 변명 내지 자기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가 그 역할을 선택하지 아니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께서는 복수의 선택지(選擇肢, options)를 복수의 후보자에게 항상 내밀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차제에 명확하게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26:34b). 가룟 유다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스승을 배신하고 죽음의 길로 밀어 넣었기 때문에 엄청난 화를 당하게 됩니다. 자책감(自責感, feel guilty)을 못 이겨서 자살로 그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27:5). 그러므로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했더라면 유다 자신에게 좋았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심히 당연한 말씀으로 들리지만 자세히 묵상을 해보게 되면 만만치 아니한 명제가 다음과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

(1)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그 영혼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고 아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일단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면 누구나 한번쯤은 인생살이 가운데 구원을 받고 죽은 다음에 영생으로 나아가게 되는 그 길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2)  그 선택은 반드시 인생 가운데 있게 됩니다. 만약 그 선택의 기회가 단 한번도 주어지지 아니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특단의 조치를 마련하시고 있습니다(24:14, 5:25-29).

(3)  그렇다면 가룟 유다처럼 잘못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는 참으로 문제가 심각합니다. 다시는 그 선택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지 나사로의 비유도 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16:26, 30-31).

(4)  그러므로 차라리 아직 사람으로 태어나지 아니한 경우가 더 좋습니다. 지옥행을 면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하나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자는 복음을 접하는 그 순간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100년 안팎의 인생살이 가운데 선택한 그 결과에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못 얻느냐가 최종적으로 결정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26:25). 스승을 배신하고 적대세력에게 팔아 넘기는 행위는 엄청난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잘못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내심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고서 한번 속여넘기자고 하는 태도입니다. 그러한 잘못이 원죄의 특징임을 창세기가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 지라”(3:8),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4:9).

풀이를 해보자면, 일단 나무 사이에 숨으면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살해하고 그 시신을 땅속에 몰래 파묻어버리면 완전범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눈을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들의 눈 정도의 기능으로 여기고 있는 한심한 신앙의 행태입니다. 한 마디로, 창조주를 피조물의 위치로 끌어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용서할 수 없는 불신앙입니다.

그러한 신앙은 요셉의 신앙과 정반대입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39:9). 하나님의 눈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찰하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있는 요셉입니다. 그것이 형통의 길이며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작은 결론을 맺어보자면, 완전범죄를 꾀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잘못을 가룟 유다가 신앙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감히 예수님 앞에서 함부로 범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6:25).

여섯째로,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26:26).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 의미는 자신의 몸을 만민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제물로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쳐다보는 자는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제물로 제사를 드려야만 사해질 수 있는 엄청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 그대로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예수님의 찢기신 육신을 생각합니다.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그 조각을 받아 먹고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결심합니다.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희생하여 대신 얻은 자신의 남은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찢기신 몸을 대신하여 자신이 주님의 소원 곧 지상명령을 이루어드리는 인생을 살아가고자 결심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다짐을 새롭게 하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성찬식의 의식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일곱째로,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7-28). 예수님이 6시간만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면 그 죽은 몸은 향품으로 처리가 되어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19:40-41). 하지만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에 피와 물이 땅으로 흘러내립니다(19:34). 그 피가 골고다 해골언덕 아래 잠들어 있는 수 많은 영혼들에게 뿌려지게 됩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예수님의 보혈이 적셔갈 때에 죄인이 의인이 되는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옛날 유월절 양의 피를 보시고 죽음의 천사가 건너뛰어 넘어갔듯이(12:13) 예수님의 피에 그 몸을 담그고 있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새로운 인생이 그렇게 시작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여덟째로,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26:29). 예수님은 포도나무이며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 가지입니다(15:1a, 5).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농부가 되십니다(15:1b). 포도나무를 가꾸고 있는 뜻은 좋은 포도열매를 얻어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 포도주는 천국의 혼인잔치자리에서 매우 요긴하게 사용이 될 것입니다(26:29).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잔치자리에서 물로 최상품의 포도주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2:7-10). 그 최상품의 포도주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산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포도주를 천국에서 맛보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그 포도주는 하나님 혼자서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생 가운데 사람들과 함께 만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포도나무의 가지 곧 예수님의 제자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실천으로 이 세상에서 맺는 포도열매를 소재로 하여 천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상품의 포도주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와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제자와 성도들은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하는지 모릅니다.

좀더 쉽게 풀이를 해보자면, 성도들은 진리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깨달아서 마치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한 의미를 연결해보면, 성도들은 진정한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감으로써 천국의 혼인잔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상품의 포도주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제자들과 함께 그 포도주를 마시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십니다(26:29).

아홉째로,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 가니라”(26:30). 예수님과 함께한 유월절 만찬이 하나님 찬양으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모두들 찬양을 하면서 마음껏 기도하기 위하여 감람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찬양과 기도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특히 다가올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더욱 필요합니다. 요컨대, 찬양과 기도가 예수님처럼 대속의 삶을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6:17-18).

 결론을 대신하여 한 말씀을 드리자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 같습니다. 특히 성도가 고난의 한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생명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서 기쁨으로 올려드리는 찬양은 참으로 값진 것이며 마치 최상급의 포도주와 같습니다. 그와 같은 찬양은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