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77강(마26:17-20)(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8. 23:47

마태복음 강해 제177(26:17-2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430()

 

천국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마지막 유월절 만찬(26:17-20)

 

첫째로,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쉽도록 먼저 도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인생은 이별과 만남의 연속적인 조합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별자정회(別者定會),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듯이 한번 만난 자는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 있고 헤어진 자는 다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헤어져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먼 훗날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22:8-10, 26:29, 3:29) 이 땅에서 예수님과 헤어지는 절차를 가져야만 합니다(26:2, 11). 그 절차가 바로 본문의 내용처럼 주님이 임재하시는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 참석을 하는 것입니다(26:17-20). 그리고 예수님이 의미를 부여해주시는 그대로 성만찬과 향유부음의 의미를 평생 동안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대신하여 그 제자로서 온 세상에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26:10-13, 26-28, 고전11:24-26).

둘째로, 사도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 제26장의 내용을 쫓아가다가 보면 본문 제17절에서 드디어 무교절의 첫날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날에 이르기까지 긴박한 상황에 대한 묘사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간결합니다;

(1)   유월절 시작 이틀 전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계실 때에 유대교지도자들이 대제사장의 관아에 모여서 예수를 잡아죽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습니다(26:3-4). 그러나 유월절 행사에 국내외에서 몰려들게 되는 많은 백성들의 시선 때문에 도저히 체포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26:5).

(2)   그러나 다음날 가룟 유다가 그들을 찾아감으로써 나사렛 예수에 대한 체포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습니다(26:14-16). 드디어 십자가 죽음으로 나아가는 관문이 열리고 있으며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하는 채비가 급 물살을 타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때부터 예수님이 제자들과 육체적으로 헤어져야만 하는 시간이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습니다(26:16). 비록 죽은 지 삼일만에 부활의 몸을 입고 되살아난다고 예언이 되고 있지만(20:19) 그것은 미래지사이며 영적인 일입니다. 육체적으로 함께 땀과 눈물을 흘리며 36개월 동안 공생애를 지내고 있는 가장 인간적이고도 친밀한 시간은 이제 종말에 다다르고 있는 것입니다.

(4)   비록 영원한 만남이 예약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헤어지는 시간은 역시 안타까운 것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아니하는 과거의 시간을 눈물로 떠나 보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똑 같은 인생살이를 경험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서도 그 점은 동일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만은 가장 의미가 있게 제자들과 함께 보내고 싶어하십니다.

(5)   이제 유월절 만찬을 나누고 나면 그 밤에 대제사장들이 보낸 하인들과 병정들에 의하여 체포가 되어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을 그 시간에 해주어야만 합니다. 어떻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면 확실하게 천국잔치에 참석할 수가 있는지를 정확하게 가르쳐주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유월절 만찬의 내용을 차분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사도 마태가 서술하고 있는 제26장의 기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앞으로의 긴박한 사태의 전개를 예수님이 진작에 알고 계십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26:2). 그래서 그런지 태연하게 유월절 하루 전에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초청을 받아 그 집에서 식사를 하십니다(26:6). 그 자리에서 익명의 여인이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느닷없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붓게 되는 사건이 발생을 합니다(26:7-10).

(2)  그 향유부음사건의 의미에 대하여 제자들의 견해와 예수님의 견해가 전혀 다릅니다; 제자들은 그 향유의 비싼 가격에 유의하면서 그것을 자신들에게 주었더라면 구제활동에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무척 아쉬워합니다(26:8-9). 반면에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활동은 언제나 할 수 있지만 만민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이번 한번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26:11). 아울러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그 은혜를 갚고자 옥합을 깨뜨려서 결심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귀하다고 생각하십니다(26:12). 그러므로 자신의 귀한 것을 바쳐서 그 죄 사함의 은혜를 깨닫게 해준 그 여인의 미담을 복음과 함께 온 세상에 널리 전하라는 것입니다(26:13).

(3)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나아가는 그 길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를 엿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익명의 여인을 시켜서 그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고 있습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고난 가운데에서도 담대하게 질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뜻을 깨닫고 그 다음날 유월절이 시작되자 제자들과 헤어질 준비를 하십니다. 그 절차가 바로 유월절 만찬을 특별히 예루살렘 성내에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시는 것입니다(26:18-19).

(4)  제자들도 어렴풋이 스승인 예수님과 헤어질 시간이 닥치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절하게 여쭙고 있습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26:17). 예수님의 답변이 이상합니다. 마치 그 장소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아니하는 장소이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장소가 있습니다.

(5)  그 장소를 찾는 방법이 다음과 같습니다; “(제자에게)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26:18-19). 그 집이 바로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으로 그 장소를 찾아서 헤매기 전에 먼저 그 장소가 어떻게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기도로써 물어야만 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늙은 청지기와 같이 기도와 더불어 찾아 나설 때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이나 장소를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24:12-27).  

(6)  그 다락방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더라도 전혀 비좁지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장소는 그렇게 적합한 곳입니다. 넘치거나 비좁지 아니한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장소입니다. 그래서 기분 좋게 모두들 식사자리에 앉고 있습니다;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26:20).

넷째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네 번의 유월절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독 마지막 유월절 만찬만이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가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3:16-17). 그것이 하나님 말씀과 율법의 근본취지임을 복음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마음과 용서의 뜻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말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몸으로 느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희생이 임박하지 아니한 상태에서 유월절 만찬을 가져보아야 그 효과는 미미할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야말로 성도들이 진실로 기억할 만한 가치가 풍성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십자가로 향하시기 전날 밤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유월절 만찬은 성도들이 평생 기억을 해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육신을 벗으시기 전에 예수님이 공생애를 함께 한 제자들에게 주시고 싶은 이야기가 모두 그 가운데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만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면 장차 천국혼인잔치에 모두가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짧은 별리 다음에 영원한 만남이 약속되어 있기에 그 헤어짐은 인내로써 견딜 만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