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76강(마26:6-13)(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7. 22:49

마태복음 강해 제176(26:6-13)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 4 29()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자신의 향유를 부은 여인들(26:6-13, 14:3-9, 7:36-50, 12:1-8)

 

  첫째로, 본문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은 익명입니다(26:7, 14:3). 그렇지만 값비싼 향유를 머리에 부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치르고(26:12-13) 있을 정도로 믿음과 헌신에 있어서 매우 뛰어나다는 사실에 비추어서 많은 사람들이 막달라 마리아임에 틀림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둘째로, 또 한 사람의 익명의 여인이 누가복음에서 자신의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고 있습니다(7:37-38). 그녀는 막달라 마리아로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특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향유를 부은 시점이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가 아니라 초창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장례준비를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속죄함 받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녀가 향유를 붓고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예수님이 보시고서 그 죄를 사해주고 있습니다(7:47). (2) 그녀는 자신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사실과 분명히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3) 그 장소가 한 바리새인의 집입니다(7:36).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에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적혀 있습니다(26:6, 14:3). 비록 한 바리새인의 이름이 나중에 시몬’(7:40-44)이라고 알려지고 있으나 그 이름은 매우 흔한 이름입니다. 따라서 그가 문둥이 시몬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

셋째로, 막달라 마리아와 비슷한 시기에 아주 유사한 일을 행하고 있는 또 한 사람의 마리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예수님의 머리가 아니라 발에 자신의 향유를 붓고 있습니다(12:3). 그 이름이 실명이며 베다니 마리아라고 기술이 되고 있습니다.

넷째로, 여기서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흔한 이름 마리아를 사용하고 있는 여인들 가운데 성도들이 기억해야만 하는 마리아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와 사도들의 행적을 적고 있는 사도행전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여러 명의 여인들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네 사람의 마리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어머니가 마리아입니다(1:18). 그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외에도 남편 요셉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생산했습니다. 딸들의 이름은 모르고 있지만 아들들의 이름은 복음서에 실려 있으므로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6:3)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 네 명이 예수님의 남동생들입니다. 특히 야고보와 유다는 야고보서와 유다서의 저자들입니다. 참고로, 예수님의 어머니는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15:40)라고 기술이 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예수님의 유명한 여자 제자로 막달라 마리아가 있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여자들이 많아서 구별을 하기 위하여 그 이름자 앞에 출신고향 막달라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곳은 나사렛처럼 갈릴리 서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그녀는 일찍이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준 나사렛 예수에게 크게 감사하여 물심양면으로 예수님 일행의 공생애를 돕고 있습니다(8:2-3). 그녀가 익명으로 본문을 비롯하여 마가의 복음서에서 향유를 부은 여인으로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26:6-13, 14:3-9). 그녀의 헌신을 귀하게 여기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그녀에게 가장 먼저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20:11-18).

(3)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을 전해 들은 여인 가운데 또 한 명의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어주고 있습니다(12:3-8). 그녀가 바로 베다니 나사로의 막내 여동생인 마리아입니다(11:1, 12:1-3).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마다 나사로의 집에서 묵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나사로는 서로 친구 사이가 되어 있습니다(11:11, 36). 그 사실로 미루어보아 예루살렘 동쪽 3km에 자리를 잡고 있는 베다니는(11:18)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손님들이 많이 들리고 있는 곳입니다. 베다니에는 저렴하게 이용을 할 수 있는 민박집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특히 베다니의 마리아 이야기가 많이 수록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특히 11-12) 그녀는 사도 요한과 동년배이며 동무 사이로 보입니다.

(4) 또 한 사람의 마리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마가의 어머니인 마리아입니다(12:12). 그녀의 남동생이 사도 바나바입니다(4:36, 4:10). 바나바가 구브로 섬(오늘 날의 키프로스)에서 예루살렘으로 뒤늦게 건너온 것으로 보아 마리아 역시 구브로 출신 유대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녀는 큰 부자이며 예수님 일행에 대하여 무척 호의적입니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아주 큰 저택을 소유하고 있으며 예수님 일행에게 유월절 만찬을 지낼 수 있도록 엄청난 규모의 다락방을 제공하고 있습니다(14:13-16, 51-52). 오순절 당시 그녀의 다락방에서 120명이나 되는 성도들이 열흘이나 모여서 함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1:14-15, 2:1-4) 그녀의 대저택은 평소 다른 목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구브로 섬 출신인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큰 저택을 소유하고 있으며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차비를 갖추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은 일종의 무역중개업을 영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로마제국이 유럽과 중동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많은 교역이 지중해 해상무역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선박이 이태리나 그리스에서 중동으로 들어올 때에 구브로 섬에서 식품과 장작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그곳이 지중해 항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중간기지인 셈입니다. 동시에 구브로 섬에서도 많은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곳에 광물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개무역지로 유명했던 구브로 섬과 큰 소비도시 예루살렘을 연결하고 있는 마리아의 집안은 상인들을 위한 객점을 운영하면서 무역중개업으로 크게 번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말하자면, 마가가 외삼촌인 사도 바나바 및 사도 바울 일행을 따라서 제1차 세계선교에 나섰다가 어째서 소아시아 밤빌리아에 도착하자마자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버렸는지(13:13) 그 속사정도 짐작을 할 수가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별세하고 나자 청년 마가는 집안의 무역중개업을 이어받고 있어서 그 일에 무척 바빴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비록 외삼촌 바나바의 권유로 세계선교에 나섰지만(13:5) 집안일에 계속 마음이 쓰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집안일을 돌보기 위해서 선교여행에서 도중하차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점을 율법학자출신인 사도 바울은 상당기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15:37-41). 물론 나중에는 바울도 마가를 용서해주고 있습니다(딤후4:11). 그러나 구브로 섬에서 한때 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보이는 사도 바나바는 처음부터 넉넉히 이해를 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15:37, 39).

다섯째로,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26:6). 때는 유월절이 시작되기 이틀 전입니다(26:2).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실 계획이십니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금번 유월절에 그곳에서 발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0:18-19, 26:2). 따라서 숙식을 예루살렘에 가까운 인근마을 베다니에서 하시고 있습니다(26:6a). 그때에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병환자 시몬이 예수님 일행을 집으로 식사초대를 하고 있습니다(26:6b, 8). 상당히 특이한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일행이 남자만 13명이 되는데 그들을 모두 식사자리에 초청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따르면, 나병환자는 격리의 대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병환자인 시몬이 예수님 일행을 초청하여 식사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정확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환대를 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시몬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병이 낫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2)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26:7).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가 나타나서 머리에 액체를 붓는다고 하면 깜짝 놀랄 일입니다. 그것은 횡포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향기가 그 액체에서 진동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놀라움과 함께 무엇인가 다른 생각이 들게 됩니다. 처녀가 시집갈 때를 위하여 조금씩 모으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다짜고짜 붓고 있는 그 행위가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게 될까요? 두 가지의 판이한 반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3)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26:8-9). 처음 반응은 열두 제자들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시다가 무척 당황하셨겠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단지 그 향유가 매우 비싼 것이기에 그것을 왜 머리에 붓고 있는지 그것이 애석하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신들에게 미리 언질을 했더라면 머리에 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서 일행의 경비로 요긴하게 사용할 수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입장이나 그 여인의 의도를 전혀 살피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저 기부를 받아서 자신들이 편하게 전도여행을 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그 명분은 어디까지나 그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그 돈으로 가난한 이웃을 요긴하게 도울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16:9). 그와 같은 태도가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4)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26:10-11).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의도를 단숨에 알아채시고 있습니다. 그 여인의 생각보다 제자들의 생각이 훨씬 못합니다. 그래서 야단을 치시고 있습니다(26:10). 제자들의 생각이 무엇인지도 예수님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공동의 여행경비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체면을 생각했음인지 달리 말하고 있습니다.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크게 도울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애석해하고 있는 것으로 일단 인정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좋은 일은 앞으로 얼마든지 실천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26:11a). 그 말씀으로 미루어보아, 사회에는 항상 부자와 가난한 자가 병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좋은 생각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라는 큰 사건 앞에서는 잠시 접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시게 되면 다시는 제자들이 육체적으로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생애를 함께 지낼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26:11b). 비록 영적인 부활의 몸을 입고 되살아나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육체적인 친밀한 사제지간이 이미 아닌 것입니다(20:14, 28, 21:12, 17).

(5)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26:12-13). 예수님은 그 여인의 숨은 의도에 대하여 제자들과 집주인 시몬에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예수님 자신이 대속의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유월절 양이 되어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26:2). 그 사실을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익명의 여인을 통하여 그 머리에 향유를 부어주신 것입니다(26:12). 마치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과 같은 그 일을 그 여인이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가시는 그 복음의 마지막 길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으로 전송을 하고 계시는지를 제자들이 깊이 이해하고 영원히 잊어버리지 말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26:13).    

  결론적으로, 그 여인의 행위를 통하여 밝히 드러나고 있는 창조주의 마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 장차 제자들과 성도들의 사명이 될 것입니다. 그 마음은 독생자를 희생시켜서라도 만민을 구원하겠다고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살림의 의지입니다(3:13-18. 6:38-40, 51-58). 동시에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눈물입니다(3:13-17, 11:35-39, 14:9, 22:44, 2: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