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마태복음 강해 제174강(마25:31-46)(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8. 6. 04:04

마태복음 강해 제174(25:31-4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427()

 

재림하신 주님의 민족심판과 개인심판의 기준(25:31-46)

 

첫째로, 먼저 민족심판과 개인심판과의 관계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각 민족 별로 한꺼번에 심판을 해버리신다고 하면 참으로 야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염려를 하지 아니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쪽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25:32-33)는 구절에 대하여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각 민족 별로 심판을 한다는 의미가 분명히 들어 있습니다. (2) 그런데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라는 말의 뜻이 모든 사람을 그 민족을 따라 빠짐없이 그 앞에 다 끌어 모으고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경우에는 각각 구분하기를이라는 말의 뜻이 개인 별로 각각 구분하여 심판한다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양자의 해석을 모두 반영하여 종합적인 풀이를 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먼저 민족 별로 양과 염소를 구분합니다. (2) 그 다음에는 민족 내부에서 다시 양과 염소를 구별해냅니다.

둘째로, 그와 같이 두 단계에 걸쳐서 신중하게 심판을 하게 되면 어떠한 특징이 드러나게 될까요? 구체적으로, 개인별로 재 분류를 한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좌에서 우로 또는 우에서 좌로 옮겨질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쉽게 말해서, 다시 옮겨지는 숫자가 많을지 아니면 별로 많지가 아니할지에 대한 고찰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우선 그 수가 그리 많지 아니할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양의 민족 가운데 살고 있는 개인은 좋은 민족의 영향으로 양으로서의 삶을 용이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염소의 민족 가운데서 살고 있는 개인은 염소의 삶을 영위하기가 쉽습니다. 그것이 환경적인 영향입니다. 그러므로 개인별로 재 분류를 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옮겨지는 숫자는 그리 많지가 아니할 것입니다.

(2)  그렇지만 20세기 전반기 저명한 미국의 정치철학자이며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버 같은 사람은 달리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라고 하더라도 집단적으로는 얼마든지 부도덕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집단은 타 집단에 대하여 무자비하며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얼마든지 전쟁을 벌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소위 그의 명저인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의 내용입니다.

(3)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요? 창세기와 복음서의 내용을 참조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가계를 통하여 그 내용이 설명이 되고 있으며 예수님의 예언 가운데 그 내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서장자 이스마엘과 적장자 이삭은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똑같이 위대한 하나님신앙의 모범을 보였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아들로 태어나서 자라고 있지만 이스마엘은 활과 칼로써 살아가고(16:12, 21:13, 20)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24:63) 살아가게 됩니다.

(4)  이삭의 쌍둥이 아들의 경우에도 그와 같습니다. 장자 에서는 칼로써 살아가게 됩니다(25:27, 27:40). 반면에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살아가게 됩니다(28:20-22, 31:3, 18). 둘째, 예수님의 종말예언도 이삭의 집안처럼 구원을 받는 자와 버림을 받는 자의 비율을 반반’(半半, fifty and fifty)으로 내비치고 있습니다(24:40-41). 그러므로 민족의 환경적인 요인이 그리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5)  단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있다고 자랑을 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서 죽인 사건을 보더라도 분명히 그러합니다. 따라서 환경적인 여건이야 어떠하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똑바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한 마디로, 여호수아와 같은 결단으로 신앙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5).

셋째로, 민족심판이든지 개인심판이든지 주님의 심판의 기준은 동일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사랑으로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한 자는 오른쪽으로 분류가 되어 구원과 영생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에는 자연히 왼편으로 분류가 되어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됩니다”(22:37-40, 25:34-36, 40-46). 관련구절을 따라가면서 그 뜻을 음미해보고자 합니다;

(1)  주님이 오른 편으로 분류한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복을 받게 됩니다(25:34a). 그 복의 내용은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하여 예비가 된 나라를 상속하는 것입니다(25:34b).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성도들이 상속권을 가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8:15-17).

(2)  다니엘 선지자의 글의 내용에 따르게 되면 그 나라는 영원한 성도들의 나라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7:14, 18, 22, 27). 그리고 사도 바울의 기록에 따르게 되면 그리스도가 종말 끝에 하나님 아버지께 바쳐 올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고전15:24).

(3)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곧 천국은 세상 끝에 새 하늘 및 새 땅과 더불어 창조가 되어 하늘에서 땅으로 임하게 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21:1-2, 10). 그 성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성전을 대신하고 있으며(21:11, 22) 생명수가 흐르고 생명나무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22:1-2).

(4)  세상을 이긴 성도들이 입성을 하여 하나님 앞에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곳입니다(21:7). 히브리서 저자는 그 성이 바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고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16). 그 성으로 성도들을 구원하여 인도하시는 분이 바로 구원주 그리스도이십니다(3:16-17, 6:39-40, 14:1-3).

(5)  오른쪽으로 분류가 되는 민족이나 개인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나그네에게 쉴 곳을, 헐벗은 자에게 옷을, 병든 자에게 치료를, 옥에 갇힌 자에게 돌봄을 제공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의와 공로를 드러내기 위하여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신앙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의 생명을 돌보고 살린 것입니다”(25:35-40). 물론 그 반대로 행동을 한 자가 왼쪽으로 분류가 되고 있습니다(25:41-45). 이상이 재림하시는 주님의 세상심판의 기준입니다.

(6)  그런데 사람들이 궁금하여 질문을 하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곤란에 처한 이웃의 생명을 살리고 돌본 사실에 대하여 그리스도는 주님 자신을 돌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25:35, 40). 구체적으로, “내가(그리스도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25:35-36)고 말하고 있습니다.

(7)  그래서 사람들이 묻고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25:37).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명쾌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40). 재림하시는 주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직접 다스리시는 임금이 되십니다(25:34a, 40a). 그 임금은 백성들과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8)  그와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제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12:5),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한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끝으로, 사도 마태는 종말에 관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빌려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25:45-46).